- 연합 예배 (2022년 3월 6일)
- 고린도후서 6장 1-10절
- 설교자: Ondřej Kolář 목사
- 연합예배설교문20220306.docx
고린도후서 6장 1-10절
1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2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3 우리가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5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6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8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SaB, tento biblický text jsem nevybral záměrně, s ohledem na současnou politickou situaci. Je jedním z oddílů, které se tradičně čtou na první postní neděli. Avšak z jeho aktuálnosti člověka až zamrazí. Stačí, když místo Božích služebníků, o kterých se tu hovoří, dosadíme ukrajinské hrdiny: Také oni prožívají soužení, rány, vyčerpání, bezesné noci. Jsou pro nás většinou neznámí, mnoho o nich nevíme – a přece známí, protože o nich denně slyšíme ve zprávách. Jsou slavní, vždyť nemine den, kdy bychom neprovolávali slávu Ukrajině – ale současně jsou hanění, protože je nepřátelská strana vykresluje jako zločince a nacisty. Jsou chudí, protože je válka o mnoho připravila – a přece nás obohacují, především svou odvahou a touhou po svobodě, pro kterou jsou ochotni tolik obětovat.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지금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순절 첫째 주일에 통상 읽혀지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갖는 시사성으로 인해 우리는 오싹함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종들 대신에 그 곳에 우크라이나 영웅들을 갖다 넣어도 문맥이 잘 통하기 때문입니다. 즉, 우크라이나 영웅들 역시 지금 환란과 고통을 당하고 있으며, 피로감을 느끼고 잠을 못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며 우리는 그들 대부분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에 대해서 잘 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뉴스에서 그들에 대해 매일 듣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명예롭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로 하여금 우크라이나에 영광이 있기를 소원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그들은 치욕을 당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적들이 그들을 범죄자와 나치로 폄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쟁으로 많은 것을 빼앗겼기 때문에 그들은 가난합니다. 반면에 그들은 자유를 향한 용기와 열망을 위해 기꺼이 그토록 희생함으로써 우리를 부요하게 합니다.
Některá biblická místa nám bývají dlouhou dobu uzavřená, nedokážeme se s nimi ztotožnit, protože nezapadají do naší zkušenosti. A pak, když ujdeme v životě kus cesty, anebo se ocitneme ve víru převratných událostí, se nám toto místa náhle rozjasní a začnou hovořit srozumitelnou řečí. Když jsem například dříve četl žalmy, obvykle jsem přeskakoval místa, kde žalmista prosí Hospodina, aby zničil jeho nepřátele a dokonce mu radí, jakým způsobem to má provést. Tyto pasáže se mi zdály příliš kruté a těžko slučitelné s Ježíšovou výzvou k milování nepřátel. Dnes je čtu s mnohem větším porozuměním, i když se snažím úplně nepodlehnout nenávisti, která z nich prosvítá.
성경의 여러 구절들은 오랫동안 우리들에게 닫혀져 있어서 우리는 간혹 그러한 성경 구절들이 우리의 경험에 맞지 않고 우리는 그런 성경의 말씀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얼마간의 세월이 흐른 뒤 또는 예기치 못한 큰 일을 겪고 난 뒤 그 성경 구절이 갑자기 분명해지면서 당연한 것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예를들어, 시편에서 시편기자가 주님께 그의 원수들을 물리쳐 주시라든가 또는 원수 앞에서 어떻게 해야할지 조언을 구하는 말씀을 읽었을 때, 저는 그 부분의 말씀을 건너 뛰곤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부분의 말씀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매우 잔인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는 그러한 부분의 성경 말씀에서 미운 감정에 완전히 굴복되지 않을려고 노력하겠지만 그러나 그러한 부분의 성경말씀을 그 전보다 훨씬 더 큰 이해를 갖고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Slovo apoštola Pavla se nám díky aktuálnímu dění přiblížila, ale přece jsou nám dál v lecčem vzdálené. Křesťané v Evropě nejsou pronásledováni a bezprostřední nebezpečí jim nehrozí. Nejsme obklopeni nenávistí, ale spíš nezájmem a lhostejností. Tu a tam si církve dokonce získávají jisté uznání a sympatie. Nemáme důvod si stěžovat na nepřátelské okolí či dokonce na ně svalovat vinu za to, že naše zvěstování lidi neoslovuje. Stejně tak se úplně neztotožňujeme se způsobem, jak Pavel hodnotí svou službu a práci dalších misionářů. Těžko o sobě můžeme tvrdit, že se vždycky a za všech okolností prokazujeme bezúhonností, poznáním, trpělivostí, dobrotivostí, Duchem svatým, nepředstíranou láskou, slovem pravdy a mocí Boží. Je v nás přece také mnoho temnoty, bloudění, sobectví, zlých duchů, klamu, strachu a bezmoci.
오늘 사도 바울의 본문 말씀이 전쟁 때문에 우리에게 가깝게 다가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 말씀은 우리와는 거리가 먼 말씀입니다. 유럽의 크리스천들은 박해를 받고 있지도 않으며, 임박한 위험에 직면해 있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증오에 둘러싸여 있기보다는 오히려 무관심과 무정함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오히려 교회는 여기 저기서 인정과 동정을 받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복음전파에 대해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을 사람들의 잘못으로 돌리고 비우호적 환경에 대해 불평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그의 사역과 다른 선교사들의 사역을 평가하는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항상 어떤 상황에서도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참음, 자비, 성령의 감화, 거짓없는 사랑, 진리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하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 안에는 오히려 많은 어둠과, 방황과, 이기심과, 악한 영들과, 미혹과, 두려움과, 무력함으로 가득합니다.
Naproti tomu dobře chápeme to, co Pavel říká na závěr. Ta dlouhá věta je plná paradoxů, které ale věrně vystihují náš křesťanský život. Sláva i pohana, zlá i dobrá pověst, známí i neznámí, zdrcení a přece se radující, chudí a přece bohatí, umírající a přece živí. To je Pavlova odpověď na otázku, jací jsou křesťané. Jací tedy jsme? Jaký dopad má naše víra na naše životy? Často se ptám, jestli jsme lepší než naše okolí. Ptám se tak zejména v těchto dnech, kdy jsme svědky obrovské vlny solidarity vůči uprchlíkům z Ukrajiny. Česká společnost je často řazena mezi ty nejvíc bezbožné na světě. Odpovídá však toto přísné hodnocení tomu, jak se dokážeme chovat vůči svým bližním v nouzi? Mnoho lidí sice ústy Boha nevyznává, možná ani v srdci ne, ale dokáže se v pravý čas zachovat jako milosrdný Samařan, kterého Ježíš dával za vzor lásky. A tak se nabízí otázka: Milujeme my křesťané ještě o něco víc? Máme právo se nad ostatní povyšovat?
이런 것들과는 반대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오늘 말씀 끝에 이야기 한 것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긴 문장은 역설로 가득차 있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잘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영광과 욕됨,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 속이는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부요한 자요, 죽은자 같으나 다시 산 자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사도바울의 대답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의 삶에 우리의 믿음은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까? 저는 종종 우리가 우리의 주변 사람들보다 나은 사람들인지 묻습니다. 특히 요즘 우크라이나로부터 피난민들에 대한 큰 연대의 물결이 일고 있는 이 때에 저는 우리는 누구인지 묻습니다. 체코 사회는 전 세계에서 가장 세속적인 사회에 속합니다. 체코사회를 이렇게 냉정하게 세속적인 사회로 평가한다고 해서 위기에 처한 이웃들에 대해서 우리가 무관심해도 된다는 것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입으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고, 마음으로도 하나님을 믿지 않을 수 있지만,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랑의 본보기로서 우리에게 주셨던 것처럼 우리는 때에 맞게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에 한 가지 질문을 드립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인가를 더 사랑합니까? 그럼으로써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사람들입니까?
My křesťané se od ostatních neodlišujeme svou mravní dokonalostí. Nemáme se před nimi čím chlubit. Lišíme se nikoli svými schopnostmi a ctnostmi, ale tím, na koho se ve svých životech spoléháme. Odkud čerpáme sílu. Co je naším jediným potěšením v životě a umírání. Lišíme se tím, že právě vyznáváme svou omezenost, slabost a křehkost. Současně ale víme, že naše životy nestojí na tom, co dokážeme a zvládneme, ani kolika lidem třeba v těchto dnech pomůžeme. Zdroj našeho života, bohatství, radosti a slávy není v nás, ale v Kristu. Nestojíme vždycky vzpřímeně, mnohé věci v životě neustojíme, často padáme. Ale v Kristu vždy znovu vstáváme. Selháváme ve věcech malých i velkých. Ale Kristus nás opět přivádí na správnou cestu. Jsme zdeptáni, někdy už nevíme, jak dál a kam dál. Ale v Kristu nacházíme vždycky důvod k radosti. Umíráme, jsme smutní, když nám zemře někdo blízký, a smrti se bojíme. Ale věříme, že v Kristu žijeme a budeme žít.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도덕적 완전성이라는 면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다를바 없습니다. 도덕적 완전성 앞에서 우리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능력과 덕성에 관한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다를바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를 의지하는가에 따라 그것으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이 됩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힘을 길어 올립니까? 삶과 죽음 속에서 우리의 유일한 기쁨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우리의 한계에 대해서, 연약함에 대해서, 부서지기 쉬움에 대해서 스스로 고백한다는 점에서 다른 사람들과 다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우리의 삶이 우리가 무엇을 증명해 낼 수 있고, 무엇을 극복해 낼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우리가 도울 수 있는가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의 생명과 부와 기쁨과 영광의 원천은 우리 안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늘 똑바로 서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서 많은 것을 할 수 없습니다. 늘 넘어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항상 다시 일어납니다. 우리는 크고 작은 일에 실패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다시 옳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짓밟히기도 하고 때론 어떻게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죽음을 향하여 다가가고 있으며, 가까운 사람이 죽는 슬픔을 당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영원히 살 것을 믿습니다.
Na začátku našeho oddílu Pavel vyznává: nyní je den spásy, čas příhodný. Představme si, že by Pavel toto poselství napsal dnes nám. Jak by se nám poslouchalo? Vždyť přítomný čas vnímáme právě opačně: jako čas nejvyšší nouze, čas, kdy se naplno zjevuje nikoli Boží spása, ale lidské zlo. Čas plný bolesti, strachu a absurdity. Jenže pro Pavla je každý den a každý okamžik časem spásy, bez ohledu na to, jak ho prožíváme. Je to totiž čas Bohem darovaný jako šance přidat se k pohybu Boží spásy. Právě v okamžiku, kdy se nejvíc rozmáhá zlo, máme obstát a postavit se na stranu spravedlnosti a pokoje – ve víře, že v Kristu je naše vítězství. Pavel nás volá, abychom nepromarnili tuto příležitost a odevzdali se do Božích služeb. Právě takoví, jací jsme, se všemi svými hříchy a limity. Stěžovat si na svou vlastní hříšnost může být také výmluvou, jak se službě Bohu vyhnout. Spolehněme se, že Bůh dokáže i to málo, co můžeme nabídnout, proměnit v požehnání. Vždyť z našich pár kousků chleba a ryb dokázal nasytit zástupy.
오늘 본문 서두에서 바울은 고백합니다.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지금은 구원의 구원의 날이로다. 바울이 이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 했다고 생각해 봅시다. 우리에게 어떻게 들릴까요? 분명히 우리는 현재시제를 반대로 생각할 것입니다. 즉,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 아니라 가장 위기의 때로 생각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전혀 보이지 않고 인간의 악만 만연한 시간, 고통, 두려움, 부조리로 가득찬 시간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을 어떻게 경험하든 바울에게는 매일 매순간이 구원의 시간입니다. 지금이라는 시간은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하나님에 의해서 기회로 주어진 때입니다. 악이 가장 만연한 그 순간, 그리스도 안에 우리의 승리가 있다는 믿음으로, 우리는 정의와 평화의 편에서 견디고 우리 자신을 세워가야 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기회를 놓치지 말고 하나님의 역사에 우리 자신을 드릴 것을 우리에게 촉구합니다. 우리는 죄악되고 우리의 능력은 제한적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의 죄성을 탓하는 것도 하나님의 역사를 회피할려는 핑계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적은 것을 큰 복으로 바꾸실 수 있으신 분이심을 믿읍시다. 우리가 갖고 있었던 몇 조각의 빵과 물고기로도 군중을 배불리 먹이셨음을 기억합시다.
Nakonec se ale nevyhneme otázce: Proč to tak Bůh chtěl? Proč chce ke svým záměrům použít nás – kteří pro službu Bohu nejsme nijak zvlášť vybavení? V těchto dnech nám možná v hlavě znějí slova žalmistů a spolu s nimi voláme k Hospodinu, aby ukončil násilí, vyhnal nepřátele a vysvobodil utlačované. Proč to nejde hned, nějakým zázrakem? Když Egypťané pronásledovali Izraelce, Bůh způsobil, že se egyptské válečné vozy zasekly, mezi vojáky nastal zmatek a nakonec bylo celé vojsko pohlceno mořem. Různé nečekané zázraky se dějí jistě i dnes. Nakonec jsme to ale my, kdo jsme povolaní do služby Božímu království a kdo se má postavit démonským silám. Ano, my – slabí, a přece silní, ztrápení a přece nezlomení, s prázdnýma rukama a přece plní naděje. Amen.
우리는 다음의 물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원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왜 하나님 역사를 위해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은 우리들을 사용하시기를 원하실까요? 오늘날 시편기자의 기도가 우리의 머릿 속을 맴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하나님께서 폭력을 끝내시고, 원수들을 쫓아내시고, 억눌린자들을 자유롭게 하시기를 촉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어떤 기적처럼 왜 속히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까?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핍박했을 때 하나님께서 애굽군대의 병거를 가라앉히시고, 군대를 어지럽게 하시고, 결국 온 군대가 바다에 의해 삼켜지게 하셨습니다. 오늘날도 여러 놀라운 기적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적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섬기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우리가‘ 마귀의 세력에 맞서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연약한 것 같지만 강합니다. 고통받는 자 같으나 꺾이지 않고, 빈손인 것 같으나 소망으로 가득찬 자들입니다. 아멘!
(번역: 김영만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