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예배 – Ondřej Kolář

본문: 막7: 31-37

Ježíš se vrátil z území Týru a šel přes Sidón k jezeru Galilejskému územím Dekapole. Tu k němu přivedou člověka hluchého a špatně mluvícího a prosí ho, aby na něj vložil ruku. Vzal ho stranou od zástupu, vložil prsty do jeho uší, dotkl se slinou jeho jazyka, vzhlédl k nebi, povzdechl a řekl: Effatha, což znamená otevři se! I otevřel se mu sluch, uvolnilo se pouto jeho jazyka a mluvil správně. Ježíš jim nařídil, aby to nikomu neříkali. Čím více jim to však nařizoval, tím více to rozhlašovali. Nadmíru se divili a říkali: Dobře všecko učinil. I hluchým dává sluch a němým řeč.

31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경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경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매

32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33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밷아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34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35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

36 예수께서 저희에게 경계하사 아무에게라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계하실수록 저희가 더욱 널리 전파하니

37 사람들이 심히 놀라 가로되 그가 다 잘 하였도다 귀머거리도 듣게 하고 벙어리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

 

Milé sestry, milí bratři,

형제 자매 여러분,

víme dobře, jak ztráta sluchu a řeči člověka bolestně odděluje od ostatních lidí. Prý ještě více než ztráta zraku. Seznamování, rozhovor, sdílení, ale i běžné vyřizování různých věcí – to vše je hodně těžké a vyžaduje veliké úsilí obou stran, neslyšícího i slyšícího. Pomysleme také na to, kolik pocitů i jemných významových odstínů vyjadřujeme tónem a barvou řeči. Vdnešní době si čím dál více píšeme a méně se setkáváme a hovoříme. Jenže psaná komunikace je nutně ochuzená a zploštělá, mnohé se vní ztratí. Je taky více náchylná k nedorozumění, odcizení a konfliktům, k nimž by v případě rozhovoru mezi čtyřma očima často vůbec nemuselo dojít. Mluvené a slyšené slovo naopak dokáže otevřít skutečnou blízkost.

우리는 청력과 언어의 상실이 어떻게 사람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고통스럽게 떨어뜨려 놓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청력과 언어의 상실이 시력을 상실하는 것보다 더한 고통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서로 알아가는 것, 이야기 하는 것, 공감하는 것, 일상 속의 다양한 일들을 처리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이 매우 어렵고, 이러한 것들을 극복하고자 한다면 청각에 장애가 있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서로간에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또한 어조와 말의 색깔들로 얼마나 많은 감정과 미묘한 어감 차이를 표시하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문자로 의사표시를 많이 하고, 만나고 이야기 하는 일은 훨씬 적게 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자를 사용하는 소통은 필연적으로 곤궁해지고 밋밋해질 수 밖에 없으며, 많은 생생한 부분들이 손실될 수 밖에 없습니다. 문자 소통은 눈과 눈을 마주보며 소통하는 것에 비해 오해와 소외와 갈등을 불러 일으키는 취약함이 있습니다. 이에 반해 직접 말하고 듣는 것은 많은 친밀감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Dnešní příběh se odehrává vcizině. Pohanská města Týros, Sidón a Dekapole byla pro židy symbolem bezbožnosti a zvrácenosti. Těmto končinám se zbožný člověk raději zdaleka vyhnul. Ježíš sám v tom zpočátku nebyl výjimkou: své poslání viděl především mezi svými bratry a sestrami ve víře, jim přinášel Boží království. Později ale hranici mezi souvěrci a pohany překročil a Boží blízkost dal zakusit právě těm, kteří měli kBohu nejdál.

오늘 본문 이야기는 이방땅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이교 도시 두로, 시돈, 데가볼리는 유대인들에게 불경건과 타락의 상징이었습니다. 경건한 사람들은 이러한 변방 지역을 기피하였는데, 사역 초기에 예수님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즉, 예수님도 사역 초기에 우선 유대 형제 자매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셨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예수님은 유대 형제 자매들과 이방인들의 경계를 넘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이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Dnešní příběh je o obnově komunikace a Ježíš vtomto směru činí první krok. Abych mohl druhého pochopit, musím nejprve překonat předsudky a bariéry, které mě od něj oddělují. Musím být nejprve sním, být mu nablízku. Nemohu porozumět, když jsem o něj daleko a jsem odkázán na informace z druhé ruky, fámy, lži. Ježíš se odvážně vydává po neprošlapané cestě, aby se mohl setkat s cizím člověkem.

오늘 이야기는 소통의 회복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소통을 위한 첫발을 내 디디십니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나는 타인과 나를 가로막고 있는 편견들과 장벽들을 극복해야 합니다. 나는 먼저 그 사람과 함께 있어야 하고, 그 사람과 가까워져야 합니다. 내가 소통하고자 하는 사람과 멀리 떨어져 있거나, 그 사람에 대해 전해들은 정보나 말이나 잘못된 소문에만 의지하고 있다면 나는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낯선 사람을 만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가보지 않은 길을 과감히 선택하셨습니다.

 

Ale ani pohanské okolí není až tak uzavřené, jak by se mohlo zdát. Najde se někdo, kdo nemocného člověka přivede až kJežíši a vysloví zástupně prosbu o uzdravení, protože sám nemocný ji kvůli svému postižení vyslovit nedokáže. I vpohanské cizině narazí Ježíš na lidi ochotné pomoci. Tito lidé možná nemají tu správnou víru, ale neztratili lidskost a soucit. Ale nejen to: nezdráhají se poprosit o pomoc cizince, tedy odhodit své předsudky. Nejen Ježíš, ale i tito neznámí pohané překračují hranice. Ježíš se přibližuje jim a oni se přibližují jemu.

이방땅은 생각했던 것만큼 닫힌 곳이 아니었습니다. 귀먹고 어눌한 자는 그의 장애로 인해 예수님께 나아올 수 없었는데 그를 예수님께 데려와 대신해서 낫게해 달라고 예수님께 청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방땅에서도 기꺼이 돕고자 하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이방인들이었으므로 그들이 올바른 믿음을 갖고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인간성과 연민의 마음은 잃지 않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낯선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편견을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경계를 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다가가시고 그들도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옵니다.

 

Nakonec tedy dochází ke zdárnému setkání. Takové setkání cizích a odlišných lidí zpočátku vyžaduje úsilí a někdy i trochu sebezapření, ale vyplatí se. Nakonec z něj vyjdou obě strany proměněny a obohaceny. Každý pokus o vzájemné porozumění, který není jen formalitou či předstíraným zájmem o druhého, jeho účastníky posouvá dál. Každý rozhovor, který je skutečným rozhovorem, nejen dvojitým monologem, upravuje pohled na sebe sama i na svět.

결국 좋은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낯선 사람들 또는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에는 노력이 요구되고 때론 자기를 부인해야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은 가치가 있습니다. 이를 통해 서로가 변화되고 풍요로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이러한 모든 노력들이 상대방에 대한 그저 형식적이고 시늉만 내는 관심이 아니라면 서로를 한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게 할 것입니다. 모든 소통이 진실한 소통이고 상대방을 향한 자기주장 즉, 자기독백이 아닐 때, 그 소통은 나와 세상을 변화시켜 갈 것입니다.

 

Ježíš uzdravoval různým způsobem. Někdy stačilo pouhé slovo. Nyní je zapotřebí mnohem víc. Ježíš neodstraňuje pouze jakousi závadu na tělesné schránce, ale vrací nemocnému schopnost žít v plnohodnotných vztazích. Proto Ježíš vstupuje s nemocným do těsného vztahu, na náš vkus až příliš intimního. Ježíšovy prsty vuších nemocného jako by rozrážely vše, co brání naslouchání, jako by odstraňovaly všechny usazeniny a zábrany v člověku. A svou slinou jako by Ježíš dával kus sebe, kus svého jazyka a své řeči tomu druhému, aby jeho jazyk rozvázal kmluvení. Až tak blízko přichází Bůh v Ježíši k nám.

예수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병을 고치셨습니다. 오직 말씀만으로 고치실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훨씬 많은 것들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단지 아픈 몸을 고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픈 자에게 온전한 관계성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부여해 주십니다. 주님은 아픈 사람과 우리의 어릴 적 동네 친구와 같은 그런 친밀한 관계를 맺습니다. 예수님께서 아픈 사람의 양귀에 손가락을 넣으신 것은 마치 들음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 귀를 막고 있는 모든 더러운 것들을 제거하시는 듯 보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침으로 마치 당신의 일부, 아픈 자에게 당신의 혀와 말의 한 조각을 주심으로 아픈 자의 혀를 풀어주시는 듯 합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주님 안에서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Nakonec přichází přece jen jedno slovo: effatha, otevři se. Ježíš při jeho vyslovení pohlédne knebi, protože tady se má odehrát skutečně cosi mezi nebem a zemí. Otevři se: to není jen výzva nemocným orgánům, aby ,začaly fungovat. To je výzva celé bytosti. Nemocný se totiž po letech izolace má znovu otevřít, vrátit se do společenství a tím znovu začít plně žít.

드디어 한 단어가 터져나옵니다: 에바다! 열리라!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면서 하늘을 우러러보십니다. 왜냐하면 하늘과 땅 사이에서 어떤 한 일이 지금 여기에서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열리라! 이는 단지 아픈 신체기관들이 정상적인 기능을 시작하도록 촉구하는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이는 전 존재를 향한 촉구입니다. 수년간 격리된 삶으로 닫혔던 마음이 열리고, 공동체 속으로 돌아와, 다시 온전한 삶을 살아가라는 촉구입니다.

 

Otevři se, přikazuje Ježíš. Plně se stáváme lidmi jen tehdy, když jsme otevřeni pro druhého, když nežijeme jen sami pro sebe, když se dáme oslovit a sami oslovujeme, když přijímáme a rozdáváme. Ale tomuto našemu otevření musí předcházet Boží otevření, sami to nedokážeme. Bůh nečeká na to, až ho začneme hledat a jemu naslouchat. Jde za námi, do naší hluchoty vůči jeho hlasu, a otevírá nás, abychom slyšeli, co pro nás má. Oslovuje a volá každého znás. Plně se tedy stáváme lidmi jen tehdy, když necháme do sebe proudit oživujícího Božího Ducha, a tak se otevíráme Božímu oslovení. My všichni máme proto slyšet: otevři se a dej se Bohem vytrhnout ze své izolace a sebestřednosti, otevři se knovým výhledům, které pro tebe Bůh připravil.

열리라! 주님께서 명령하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향해 열려있을 때, 우리가 우리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지 않을 때, 우리가 내 자신 또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건낼 때, 우리가 받기도 하고 주기도 할 때, 우리는 인간 본연의 인간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열림이 우리의 열림보다 앞서 있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는 열린 사람들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귀기울이기 시작하기를 기다리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음성에 귀먹은 우리에게 먼저 찾아오셔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고 계신 것을 들려주시기 위해 우리를 열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말을 건내고 계시고 우리 각자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속에서 살리시는 영이신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시도록 우리의 마음을 열고 그렇게 해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건내시는 말씀에 열려져 있을 때 우리는 온전한 인간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친히 예비하신 것을 향해 우리 자신을 열어야 하고, 우리를 고립과 자기중심성에서 끌어내시도록 해야 합니다.

 

Možná nás překvapí, že Ježíš ihned po svém mocném činu nařizuje přítomným, aby o tom nikde nic nerozhlašovali. Nenastala naopak ta pravé chvíle o tom mluvit? Jak může mlčet někdo, komu se právě vrátila řeč? Vícekrát čteme o Ježíšových obavách, že jeho mocné činy budou špatně pochopeny, že to podstatné lidem unikne. Lidé okolo Ježíše však vtuto chvíli dobře pochopili, ským se v Ježíši setkali. Dobře všecko učinil. I hluchým dává sluch a němým řeč, říkali. Pohané, kteří nikdy nečetli bibli, nevědomky ocitovali jednu z jejích nejdůležitějších částí. Kdo učinil všecko dobře? Ne snad Bůh sám, když stvořil nebe a zemi, slunce a hvězdy, zvířata a rostliny – a viděl, že to vše je dobré? Ježíš není jen potulný léčitel. On vrací člověku jeho původní stvořitelské určení. Napravuje to, co člověk porušil. Otevírá nejen oči, uši a zrak – on otevírá celého člověka, a tím obnovuje jeho vztah k Bohu, k bližním i sobě samému. Smiřuje, co bylo odcizeno. Spojuje, co bylo zpřetrháno.

놀라운 치유역사 후에 예수님께서 그곳에 있던 사람들에게 이 치유에 대해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경계하셨는데 이는 우리로 하여금 놀라움을 갖게 합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치유사역에 대해 말할 때가 바로 이때가 아닐런지요.. 벙어리로 있다가 말을 하게 된 사람이 어떻게 침묵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강력한 치유사역들이 잘 못 이해되고, 이로 인해 사람들이 본질적인 것을 놓칠까봐 염려하시는 것을 성경 여러 곳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구약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예수님, 약속된 메시야를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귀머거리가 듣게 되고 벙어리가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치유보다 약속된 메시야로서 예수님 자체를 만나는 것이 더 본질적인 것입니다. 성경을 전혀 읽지 않았던 이방인들이 자신도 모르게 성경의 가장 중요한 부분 중의 한 부분을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모든 것을 보시기에 좋게 창조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하늘과 땅, 해와 별, 동물과 식물을 창조하시고, 그것들을 보시니 좋으셨던 것 아닙니까? 주님은 단지 여기 저기 떠돌아 다니시는 치료자가 아니십니다. 주님은 인간을 원래의 창조 목적으로 되돌리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사람이 깨뜨린 것을 바로잡아 주십니다. 주님은 눈과 귀와 시력을 열어주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전 존재를 열어주시고 이를 통해 하나님과 이웃들과 스스로와의 관계성을 새롭게 해 주십니다. 주님은 멀어진 것을 화해시키시고 깨진 것을 회복시키시는 분이십니다.

 

Otevři se – to je náročná výzva ve světě, kde se upevňujeme ve svých vlastních názorech a vzájemně si nenasloucháme, kde méně vedeme dialog a více na sebe nevraživě pokřikujeme. Místo aby naše řeč stavěla mosty, často jen ještě víc rozděluje. Naše naslouchání se zaměřuje jen na to, s čím už předem souhlasíme, před tím ostatním, co slyšet nechceme, zavíráme uši.

열리라! 이는 내 의견만을 고수하고 서로의 말을 경청하지 않는 세상 속에서, 소통이 사라지고 원한감정에 휩싸여 악한 말들을 쏟아내는 세상 속에서는 어려운 도전입니다. 우리의 말들은 다리를 놓기는 커녕 오히려 서로를 더욱 분열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듣고 싶은 것에만 초점을 맞춰 듣고 듣고 싶지 않은 것에는 귀를 닫습니다.

 

Naproti tomu Ježíš učí jiné cestě – cestě otevřeného a odvážného naslouchání, které druhého otevírá a dává mu prostor, aby se vyslovil. Je to cesta mnohem náročnější. Ale právě ta nás vyvádí ze sobectví do společenství, kde jeden druhého respektuje a přiznává mu místo na zemi. Vyvádí nás zpovýšené osamocenosti do vztahů, vnichž se nebojíme vzájemných odlišností, ale snažíme se, aby nás obohacovaly. Effatha, otevři se. Amen.

그러나 세상과 달리 예수님은 다른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타인을 경청하고 타인이 나에게 말을 걸어 올 수 있도록, 타인에게 공간을 만들어 줄 수 있는 열려있고 용기있는 그러한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이 길은 아주 어려운 길입니다. 그러나 이 길이 우리를 이기심에서 벗어나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길이요, 내가 발딛고 있는 곳에서 타인에게 공간을 만들어 줌으로써 공동체를 이루게 하는 길입니다. 이 길은 우리를 심한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하는 길이요, 타인의 다름을 두려워하지 않고 우리를 더욱 풍요롭게 해주는 다양한 관계성들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길입니다. 에바다! 열리라! 모든 영광 주님께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