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20년 11월 1일)
- 요한일서 3장 1-3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주일 가정예배 예식서 2020.11.1.pdf
<요한일서 3장 1-3절>
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인 형제자매들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당시 그들은 로마제국 하에서 소수자로 존재하며 시험과 박해의 위협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그들은 너무나 보잘 것 없어 보였을 것입니다. 믿음이 흔들리는 순간도 있었을 것이고, 소망이 흐릿해지는 순간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요한은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 다시금 일깨워줍니다.
○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예수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 직접 경험해보기 전에는 결코 이해할 수 없고, 경험한 후에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그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랑으로 우리를 낳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 그 사랑이 이 세상이 속한 사랑이 아니므로, 그 사랑의 결과물인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세상이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돈을 최고로 여기는 세상은 모든 것을 돈의 가치로 환산하여 규정하고 평가합니다. 세상이 그 가치로 그리스도인과 교회를 평가하는 것이야 그들의 자유이겠지만,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그 세상의 가치를 쫓아가거나 그 기준으로 스스로를 바라보고 평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존재하는 게 정상입니다.
○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근대 서구인들은 나를 알려면 나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반대로 생각했습니다. 내가 누구인가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규정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 속의 나이며, 너가 있기에 내가 있고, 너와의 관계 속에서 나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누구인가를 말하는 방식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전에는 아니었지만 이제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가 누구인가가 새롭게 규정되었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우리를 규정하는 가장 확실한 정체성은 이제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이라는 것입니다.
○ 그럼 장래에 우리는 어떻게 될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지금 여기서 이미 아는 확실한 미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나타나심, 혹은 다시 오심입니다. 그 때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 장래의 우리에 대해 지금 우리가 아는 것이 있다고 요한은 말합니다. 역시나 그는 장래에 나타나실 예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장래의 우리에 대해 말합니다. 그 때 우리의 모습은 예수님과 닮은 모습일 거라 합니다. 그 날에 우리가 보게 될 예수님의 모습은 지금 우리가 아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그분의 참모습 그대로일 것이므로, 지금 여기서 그분을 알고 사랑하며 따르는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느덧 그분과 닮은 모습이 되어 그분을 만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 이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예수님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리라 합니다. 여기서 ‘깨끗함’이란 ‘마음의 청결함’과 ‘행위의 의로움’ 둘 다를 말할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청결한 마음과 의로운 행위가 무엇인지 알게 된 사람은 그 예수님을 만날 소망 가운데 자기도 그렇게 되기를 힘쓰리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고행도 아니고 의무도 아닙니다. 그저 자꾸 바라보다 닮게 되는 과정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라”(고후3:18)
○ 구원은 쌓아서 얻는 것이 아니라 뛰어들어 얻는 것입니다. 공적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믿음은 결코 행위를 배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라는 초청에 응답해 뛰어드는 일 속에도 이미 믿음과 행위는 결합되어 있고,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예수의 길을 따르는 일 속에도 믿음과 행위는 결합되어 있습니다. 믿는 단계와 행하는 단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믿는다는 것은 곧 행한다는 뜻입니다. 요한일서에서 사도 요한은 단호히 말합니다: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 주님을 아는 사람이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주님이 행하신 대로 행하는 사람이 주님 안에 거하는 사람이다. 내 주위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실제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제 내 인생의 중심에 내가 아닌 그리스도가 계시게 한다는 뜻입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를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이제 내 인생의 주권을 내어드린다는 뜻입니다. 이 결단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나서 몇 년쯤 지나 고민해볼 일이 아니고, 이 결단과 함께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인생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누구를 중심으로 나의 모든 일이 돌아가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내 인생의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