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과 생명

<창세기 1:29>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요한복음 6: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어젯밤 서울 이태원에서 엄청난 참사가 있었습니다. 할로윈 파티에 모인 사람들이 좁은 골목길에서 인파에 밀려 쓰러지며 151명이 죽고 80여명이 다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희생자들은 대부분 젊은이들, 그중에 여성들이 많다고 합니다. 듣고도 믿기지 않는 이 황당하고 끔찍한 일 앞에 할 말을 잃습니다. 사고 희생자와 가족들을 위해 기도할 뿐입니다.

누군가의 죽음 소식을 접할 때마다 살아있음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다시 또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살아있음의 의미에 대해 얼마전 설교한 바 있습니다. 살아있음이 은혜라 하였습니다. 또한 살아있음은 함께있음이요, 할 일이 있음이라 하였습니다. 살아있음은 또한 돌이킬 수 있음일 것입니다.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요12:36)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니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13:4-5)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그가 먹는 것이다” 19세기의 철학자 포이에르바흐가 한 말입니다. 인간을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보려는 시도를 비판하며 한 말입니다. 그런데 포이에르바흐가 이 말을 하기 한참 전에 이미 성경은 인간을 그렇게 정의하고 있었습니다. 성경의 창조 이야기 속에서 인간은 뭔가를 먹어야 하는 존재로, 또 온 세상은 그의 음식들로 묘사됩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하나님은 인간을 무언가를 먹어야 사는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분이 창조하신 다른 피조물들을 음식으로 제공하십니다.

얼핏 보면 별로 새로울 것 없는 당연한 얘기 같은데, 사실 이 말씀 속에는 인간 조건에 관한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인간은 살기 위해 먹어야 합니다. 오래 계속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세상에 대해 의존적입니다. 자기 밖 세상을 자기 몸 안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이어 그것을 자기 자신, 자기 살과 피로 바꿔야 합니다. 물론 이 과정은 그저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고역이 아니라 즐거운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인간이 사는 데 필요한 그 음식을 제공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말합니다. 인간이 자기 생명에 대해 의존성을 갖는 그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인간을 위한 음식으로 제공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말합니다. 즉 인간의 생명이 궁극적으로 생명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을 먹고, 왜 먹는가? 물질주의자 포이에르바흐에게도, 그의 동시대 종교인들에게도, 이 질문은 무의미해 보였을 것입니다. 양측 모두에게 먹는다는 것은 그저 물질의 문제로만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실 성경은 먹는 일을 그저 물질의 문제로만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것은 물질의 문제인 동시에 영적인 문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먹기에 좋은 많은 것들이 하나님의 약속과 함께 선물로 주어졌음을 말합니다(창2:9,16). 또한 성경은 인간이 먹어서는 안 될 어떤 것이 하나님의 명령과 함께 거기 존재하고 있음을 말합니다(창2:17). 다시 말해, 성경의 창조 이야기 속에서 음식은 말씀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먹는 일은 그저 물질의 문제가 아니라 또한 영적인 문제, 하나님과의 관계 문제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의 눈으로 볼 때 ‘무엇을 먹느냐’는 인간이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사느냐와 관련된 문제입니다. 인간은 이것, 혹은 저것을 먹지만,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것을 먹습니다. 신앙 안에서 한 사람이 무언가를 감사함으로 먹을 때, 그가 얻는 것은 그저 그 음식 속에 담긴 영양소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도 동시에 섭취됩니다. 또한 신앙 안에서 한 사람이 먹지 말아야 할 어떤 것을 먹지 않을 때, 그가 느끼는 것은 그저 위장의 배고픔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과 배고픔이 더욱 강렬해지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인간은 배고픈 존재, 무엇보다 하나님께 배고픈 존재입니다. 우리 안에는 오직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어떤 신학자의 말처럼, 우리 삶의 갈급함과 배고픔의 이면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물론 인간만이 배고픈 존재인 것은 아닙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먹음으로 삽니다. 온 창조세계가 음식에 의존합니다. 하지만 이 우주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독특함은 오직 그만이 주어진 음식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Blessing이란 영어단어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축복’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찬양/감사’의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의 blessing에 대해 자신의 blessing으로 반응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 여기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의 독특한 지위와 역할이 있습니다.

인간을 먹어야 살 수 있는 존재로 창조하시고, 그에게 먹을 것들을 지정하여 제공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그 속에서 인간이 모든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연합된 모습으로 살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선물로 받은 세상을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으로 채우는 삶의 방식 속에 인간을 위한 참 생명의 선물이 예비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금지된 과일을 먹었습니다. 그 나무의 열매는 딱 한 가지 점에서 동산의 다른 열매들과 달랐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선물로 주신 음식이 아니었다는 점. 그래서 그것을 먹는 일, 그 음식과 연합되는 일은 하나님과의 연합에서 떨어져나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배제한 채 세상과만 연합한 인간의 모습, 하나님을 잊어버린 채 세상만을 사랑하는 인간의 모습, 그리고 그로 인해 참 생명에서 끊겨진 인간의 상황을 보여줍니다.

예레미야 2장 13절에 말씀합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하나님이 모든 것 중에 모든 것이심을 아는 데서 떨어져 나갔기에 세상은 타락된 세상입니다. 이 타락된 세상 속에서, 먹어야 사는 인간의 조건, 자기 밖 세계에 대한 그의 의존성은 하나의 닫힌 회로가 됩니다. 인간은 여전히 사랑하고 여전히 배고프지만, 그의 사랑과 허기는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것들에 묶여버립니다. 그리고 이렇게 세상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될 때,  결과적으로 모든 것은 가치를 상실합니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모든 것의 의미와 가치가 발견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닫힌 회로 속에서 인간은 먹는 일이 진정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일이 될 수 있음을 깨닫지 못합니다.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된 세상은 죽어가는 세상입니다. 음식 그 자체를 생명의 원천이라 생각하는 사람에게 먹는 일은 그 죽어가는 세상과의 연합, 곧 죽음과의 연합입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지 않은 음식을 먹음으로 세상에 타락이 임했다면, 다시 하나님이 선물로 내려주신 음식을 먹음으로 세상에 구원이 임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 하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그분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 찢기신 살이 세상의 생명을 위한 음식이라 하십니다.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는가?”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요6:53-57)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그분 속에 무언가 다른 생명이 역사하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는 세상적인 기준에서 가진 것이 별로 없는 사람이었으나 무엇이 부족한 사람처럼 전혀 느껴지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까지도 죄인들을 위해 내어줄 수 있을 만큼 자유로운 사람, 충만한 사람, 넘쳐흐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삶의 비결이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라는 말 속에 담겨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의 삶은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과 연합된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4) 예수님 안에 있는 그 생명은 우리가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진정 갈망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드러내주는 빛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 갈망의 끝점에 계신 하나님, 모든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께로 인도해주는 빛입니다. 예수께서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신 것 같이 이제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살 것입니다.

인간은 그가 먹는 것이다. 참된 생명의 음식 예수님을 내 안에 받아들여 나의 살과 피가 되게 할 때 우리는 예수님 닮은 사람, 하나님의 사람으로 오늘을 살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것(말씀)으로 살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교회학교 어린이들이 식사전 기도하는 일을 연습하고 있다 합니다. 처음 하는 아이들에게는 그것도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일 수 있습니다. 식사 전 기도하는 그 시간을 통해 우리 자녀들이 보이는 것 너머의 더 본질적인 것을 보는 믿음의 눈을 갖게 되길, 또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과 더욱 온전히 연합하는 은혜를 경험하길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에 감사와 찬양이 회복되길 바랍니다.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모든 좋은 것들에 대한 감사를 미루지 마십시오. 당신의 소중한 아들을 우리의 생명을 위한 음식으로 내어주신 하나님을 향한 찬양을 그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입은 우리가 그분께 마땅히 되돌려드려야 할 바요, 우리의 삶이 예수님의 생명으로 채워질 수 있는 길입니다.

날마다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들을 감사함으로 받아 누리며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