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20년 7월 19일)
- 로마서 2장 17-24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종교를 의지하지 마십시오 - 롬2,17-29.docx
<로마서 2:17-24>
17 그런데 그대가 유대 사람이라고 자처한다고 합시다. 그래서 그대는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18 율법의 가르침을 받아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가장 선한 일을 분간할 줄 알며,
19 눈먼 사람의 길잡이요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의 빛이라고 생각하며,
20 지식과 진리가 율법에 구체화된 모습으로 들어 있다고 하면서, 스스로 어리석은 사람의 스승이요 어린 아이의 교사로 확신한다고 합시다.
21 그렇다면 그대는 남은 가르치면서도, 왜 자기 자신은 가르치지 않습니까? 도둑질을 하지 말라고 설교하면서도, 왜 도둑질을 합니까?
22 간음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왜 간음을 합니까? 우상을 미워하면서도, 왜 신전의 물건을 훔칩니까?
23 율법을 자랑하면서도, 왜 율법을 어겨서 하나님을 욕되게 합니까?
24 성경에 기록한 바 “너희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모독을 받는다” 한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로마서 2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말씀에 귀기울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갚으시리라 하였고, 이 하나님의 심판은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행해지리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일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심판은 각 사람이 처해 있던 조건을 고려하여 이루어질 것이고, 사람들 속에 감춰져 있던 것들이 그 심판날에 다 드러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심판이 될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어지는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특별히 유대인들을 향해 매우 강한 어조로 말합니다. 당신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부하는 사람들이지요? 그렇다면 당신들의 삶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고 있나요? 당신들에게도 하나님의 심판은 그 ‘행한 대로’ ‘차별 없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지금 당신들 속에 감춰져 있는 것들이 그 심판날에는 다 드러나 판단받을 것입니다. 그러니 긴장하십시오. 헛된 자부심에 기대지 말고, 참으로 행해야 할 바를 행하십시오.
‘유대인’이란 누구를 말합니까? 일차적으론 ‘아브라함의 후손’을 말하죠. 그들의 조상은 이집트를 탈출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이후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고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법을 따라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겠다 서약한 것이죠.
후에 그들이 ‘유대인’이라 불리게 된 것은, 포로기 이후 그들이 돌아와 살던 지역이 로마 시대에 ‘유대아’(Judea)라 불렸기 때문이라 합니다. 그곳은 과거 이스라엘 왕국이 열 지파와 두 지파로 분열되며 형성된 옛 남유다 왕국의 영토였죠.
로마 시대에도 일부 유대인들은 여전히 그 땅에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또한 많은 수가 지중해 연안에 흩어져 살고 있었죠. 그들을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라 부릅니다. 이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곳곳에 세워진 회당을 중심으로 모이며 정체성을 공유했죠.
지금도 일부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나라 영토 안에 살지만, 또한 수많은 유대인들이 전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그들의 역사와 연결된 민족적, 종교적, 문화적 정체성입니다.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그들의 선민의식, 그 중심에 ‘율법’과 ‘할례’가 있습니다. 자기들이 하나님의 법을 받았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는 것. 또한 자기들 몸에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나타내는 표식이 있다는 것. 그래서 자기들은 하나님께 특별하다는 것.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그들이 어떤 자부심을 갖고 있는지 자세히 묘사합니다. 먼저 그들은 ‘율법을 의지한다’ 합니다. 바울은 부정적인 뉘앙스를 담아 이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의지한다’는 것 자체는 나쁜 일이라 할 수 없겠죠. 하지만 진짜 의지해야 할 것을 의지하지 않고 다른 것을 의지하고 있다면, 그건 나쁜 일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율법을 가지고 있으니 나는 절대 안전하다, 그 어떤 재앙도 심판도 나를 피해갈 것이다’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율법’을 의지하고 있는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을 자랑한다’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자랑하는 게 뭐가 잘못된 일이겠습니까? 다만 ‘하나님을 어떻게 자랑하느냐’가 관건이겠죠. 일찍이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렘9:23-24).
이처럼 하나님이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행하시는 분임을 알고 그 하나님을 자랑스러워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에 힘써 동참하는 가운데 그분을 자랑할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유대인들의 하나님 자랑’은 그런 자랑이 아니죠. 하나님을 오직 자기들에게만 속한 분으로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치 유대인들만의 하나님이라는 듯 자만하여 자랑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 율법의 가르침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가장 선한 일을 분간할 줄 알기에, 스스로를 눈먼 사람의 길잡이요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의 빛이라 생각한다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율법 속에 지식과 진리가 구체화된 모습으로 들어 있기에, 스스로를 어리석은 사람의 스승이요 어린 아이의 교사로 확신한다 합니다.
확실히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바로 그 역할을 하도록 부르셨습니다. 이사야 42장 6-7절에 말씀합니다: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문제는 ‘그들이 실제로 이 부르심을 따라 이방의 빛이 되고 있느냐’겠죠. 소위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부하는 그들을 통해 과연 하나님의 빛이 세상에 비치고 있는가? 이것을 묻는 바울의 질문이 쉴새없이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남은 가르치면서도 왜 자기 자신은 가르치지 않습니까? 도둑질을 하지 말라고 설교하면서도 왜 도둑질을 합니까? 간음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왜 간음을 합니까? 우상을 미워하면서도 왜 신전의 물건을 훔칩니까?”
아는 것을 따라 살지 않는다는 거죠. 가르치고 설교하는 대로 실천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말씀 앞에 떳떳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설교하고 가르치는 목사로서 제 마음은 더 무거워집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유대인에 의한 신전털이 사례가 당시 역사 기록에서 발견된다 합니다. 어쩌면 그들은 우상의 존재를 믿지 않았기에 이방신전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그런 범죄를 더 쉽게 저지를 수 있었는지 모르죠. 교묘한 자기기만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모든 유대인이 도둑질이나 간음, 신전털이를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요점은, 율법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이라도, 그 아는 것을 따라 실제 행하지 않는다면, 그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으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아는 것만으로는 세상에 하나님의 빛을 비출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죠.
그처럼 알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바울은 말합니다: “율법을 자랑하면서도 왜 율법을 어겨서 하나님을 욕되게 합니까? 성경에 ‘너희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모독을 받는다’(사52:5;겔36:20) 한 것과 같습니다.”
여기 인용된 구약의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방 땅에 포로로 끌려가 있는 수치스런 상황을 배경으로 선포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면서, 그 아는 대로 행하지 않아 비참한 상황에 처한 하나님의 백성들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이 세상 속에서 모독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대할 때 마음이 무겁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도 행하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이 세상에서 모독을 받는 일이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누군가만의 문제만이 아니라 아마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문제일 것입니다.
어쩌면 알고도 행하지 않는 사례보다 살짝 비틀어 적용하고 교묘히 합리화하는 사례가 더 많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것처럼 바라보는 믿음만이 우리를 이러한 자기기만, 스스로 속는 일에서 구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종교’(religion)와 ‘신앙’(faith)의 차이에 대해 생각해보신 적 있습니까? 비교종교학자 Wilfred C. Smith의 설명에 의하면, ‘종교’(religions)는 일종의 ‘축적된 전통’(cumulative traditions)이라 합니다.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의 다양한 신앙의 표현들이라 할 것입니다. 성경본문들, 상징들, 예전, 음악, 교리, 윤리, 신학 같은 것들이 다 여기에 해당할 것입니다.
한편, ‘신앙’(faith)은 종교보다 더 인격적이고 더 깊은 차원의 것입니다. 스미스에 따르면, 신앙, 즉 ‘믿음’은 그 축적된 전통을 통해 인식되고 체험된 하나님께 오늘의 우리가 반응하는 방식입니다. 한마디로 ‘신앙’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충성의 관계’(the relation of trust in and loyalty) 속에서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과거로부터 축적된 종교적 전통의 어떤 요소에 의해 ‘신앙’은 생겨나고 깊어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겨난 오늘의 새로운 신앙적 표현을 통해 ‘종교’는 갱신되고 넓어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을 따라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종교는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종교는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뿐입니다. 율법을 가졌다고, 성경지식이 많다고, 예배를 성대하게 드렸다고, 선행을 많이 했다고, 교회에 등록된 신자라고, 그 자체로 구원이 보장되는 게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만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충성의 관계 속에서 오늘 이 순간을 살아가는 것만이 구원을 경험할 수 있는 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종교를 의지하지 마십시오! ‘기독교’라는 종교가 여러분이 기댈 수 있는 안전한 품이라도 되는 줄 착각하지 마십시오. 종교 뒤에 숨어 적당히 하려는 마음을 버리십시오.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줄기차게 하나님을 바라보고 신뢰하고 사랑하며 순종하십시오. 종교 뒤에 숨지 말고, 다만 종교의 도움을 받아, 종교 너머에 계신 하나님께 날마다 더욱 가까이 나아가십시오.
‘강을 건너면 배를 버리라’는 말이 있죠. 기독교 전통은 오늘의 우리를 하나님께 이끌어주기 위해 존재합니다. 물론 그것은 소중하고 유익한 것이죠.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을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종교 자체에 과도하게 집착하다 하나님을 놓치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유대인’이라 불리는 데 자부심을 느끼는 여러분, 부디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이 말을 하려는 것 같죠. 같은 맥락에서 우리 자신을 향해서도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기독교인’이라 불리는 데 만족하지 말고, 우리 ‘그리스도인’답게 삽시다!
그럴 수 있는 은혜를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결국 주님 앞에 설 것을 생각하며 오늘을 주님 앞에서 살아가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종교를 의지하고 종교 뒤에 숨어 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날마다 더 가까이 나아가는 저희의 삶이 될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