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18년 12월 9일)
- 빌립보서 3:20-4:7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주 안에 서라 - 빌3,20-4,7.docx
<빌립보서 3:20-4:7>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2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3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 두 번째 주일을 맞았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립니다.
그분이 오셔서 만물을 새롭게 하실 그 날을 소망하며 기다립니다.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에 속한 존재가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이 땅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아직 주님의 통치가 온전히 회복되지 않은 이 곳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서 있어야 할 위치는 어디입니까?
본문 1절 말씀 다시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자, 어디에 서라고 말합니까?
예, ‘주 안에’ 서라고 권면합니다.
주 안에 선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우리 그리스도인이 주님으로 고백하고 섬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서셨던 그 자리에
우리도 선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요12:26)
자기를 낮추며 내려오셔서 친히 우리 죄인의 자리에 서시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시고 영광스런 모습으로 높여주셨던 것처럼,
이 땅에서 자기를 낮추고 그리스도가 서셨던 그 자리에 서서 살아가는 그 사람을
주님께서 결국 구원하시고 높이시며 영광스럽게 하시겠다 말씀합니다.
이 ‘주 안에 서는 삶’에 관한 구체적인 권면들이 이어지는 본문에 제시되고 있는데요,
그 내용을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오늘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원합니다.
첫째로,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권면합니다.
사람 사는 데는 어디나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인가 봅니다.
그것은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 교회는 문제가 없거나, 문제의 소지를 일절 차단하는 곳이 아니라,
발생하는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해결해가는 곳이라 할 것입니다.
바울이 편지를 보낼 당시 빌립보 교회 안에도 몇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 문제들이 없었다면 빌립보서는 기록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 문제들 중 하나가 본문 2절에 암시되고 있는데, 바로 ‘교우간에 갈등’입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 이 두 사람은 그 교회에서 꽤 영향력 있는 여인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유오디아 집사님과 순두게 집사님… 빌립보 교회에 기둥같은 집사님들…
그들에 관련된 문제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다만 그 문제가 공동체의 화합을 깨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들에게 바울이 권면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 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바울은 그들에게 ‘같은 의견’을 가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같은 마음’을 품으라 말합니다.
그리고 그 앞에 ‘주 안에서’를 덧붙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 그들이 ‘같은 마음’을 품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
처음엔 그 정도로만 생각했었는데, 가만 보니 더 깊은 의미가 있는 듯 합니다.
그들 둘 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제가 정말 사랑하고 귀히 여기는 유오디아 집사님과 순두게 집사님… 두 분께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두 분 모두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그 ‘예수님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빌립보서 2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나님이심에도 자기를 비우고 낮추어 우리와 같이 되시고,
우릴 위해 목숨까지 내어주신 그 예수님 마음을 품으라는 권면이지요.
그렇다면 이 예수님 마음이 실제 인간관계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을까?
방금 읽은 본문 바로 앞에 있는 빌립보서 2장 2-4절을 다시 함께 읽겠습니다.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다른 형제자매를 대하는 모습이라 합니다.
교회는 모두 함께 그 마음을 품고 이렇게 서로를 대하며 문제를 해결해가는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3절에서 바울은 그의 가까운 동역자 하나에게 다음과 같이 부탁합니다.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여기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이란 유오디아와 순두게 두 사람을 말합니다.
비록 그들이 문제를 일으키긴 했으나 그들을 귀히 여기고 잘 도와주라는 것이지요.
그 이름들이 하나님께 기억될 이름들이라는 걸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바울의 권면을 생각하며 우리도 우리 공동체 지체들 하나하나를 소중히 바라보며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권면합니다.
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는가? 늘 기뻐할 일만 있는 게 아닌데…
이렇게 생각할 사람이 있을 걸 알았기에, 바울은 한번 더 강조한 것입니다.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기뻐하기 힘든 상황에도 의지적으로 기뻐하란 말입니다.
여기서 또 중요한 전제가 ‘주 안에서’입니다.
주 안에서는 기뻐하기 힘든 상황에도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빌립보서를 쓸 당시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 감옥에 갇힌 상태였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만 보면, 기뻐하기 힘든 상황이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빌립보 성도들에게 그 일로 낙심하거나 슬퍼하지 말라 합니다.
오히려 그로 인해 복음이 다른 방식으로 놀랍게 전파되고 있음에 기뻐합니다.
그는 비록 매여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는 모습에 기뻐합니다.
말하자면, 바울의 기쁨은 예수님과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는 기쁨,
늘 예수님 안에 거하는 기쁨이었고,
그 기쁨은 그 무엇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누리셨던 기쁨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분의 기쁨은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기쁨,
아버지 사랑 안에 거하는 기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도 예수님의 자리에 서서,
그분이 누리신 기쁨을 충만히 누리길 바라십니다(요15:11).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을 기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또한, 여러분의 기쁨을 빼앗는 일은 무엇입니까?
누군가의 작은 말 한 마디에도, 내 계획대로 안 된 약간의 실망스런 결과에도,
우리는 쉽게 기쁨을 빼앗기곤 합니다.
어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어린아이는 하루에 400-500번을 웃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장년이 되면 이 웃음은 하루 15-20번으로 감소된다고 합니다.
인간은 기쁨과 웃음 속에서 태어나고 점점 기쁨과 웃음을 잃어버리며 끝나는 셈입니다.
이해인 수녀님의 “기쁨이 열리는 창”이란 시가 있습니다.
나는 기쁨이란 단어를 무척 사랑한다.
어린 시절부터 세상 모든 것들이
나에겐 다 신기하게 여겨져 행복했고
놀라운 것들이 하도 많아
삶이 지루하지 않았다.
나의 남은 날들을
기쁨으로 물들여야지 하고
새롭게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마음의 창에 기쁨의 종을 달자.
사랑하는 이들을 기쁨으로 불러모으자.
슬픈 이들, 우울한 이들, 괴로운 이들이
아주 사소한 것에서도
기쁨을 발견하도록 돕는
기쁨천사가 될 순 없을까?
어쩌면 기쁨은 우리가 노력해서
구해야 할 덕목이기도 하다는 것을
우리는 자주 잊고 사는 것 같다.
욕심을 조금만 줄이고
이기심을 조금만 버려도 기쁠 수 있다.
자만에 빠지지 말고
조금만 더 겸손하면 기쁠 수 있다.
남의 눈치채지 못하는
교만이나 허영심이 싹틀 때
얼른 기도의 물에
마음을 담그면 기쁠 수 있다.
‘주 안에 선다’는 것은 ‘하나님 사랑 안에 머문다’는 뜻입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예수님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내게로 밀려듭니다.
그 무엇도 우리를 하나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말씀에 마음이 든든해집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기쁨과 신뢰가 차오릅니다.
이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가장 좋은 선물을 받았고,
그것은 우리에게 영원한 기쁨의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프랑스 떼제 공동체의 기도문 속에 자주 반복되는 고백이 있습니다.
주 그리스도여, 주님 안에 우리 마음의 기쁨이 있나이다!
주 그리스도여, 주님 안에 우리 마음의 기쁨이 있나이다!
주 안에서 언제나 이 기쁨을 누리는 우리들이 되길 바랍니다.
셋째로, 다른 사람에게 관대하라 권면합니다.
5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여기서 ‘관용’으로 번역된 단어는 ‘타인에 대한 관대함’을 뜻합니다.
넓은 아량, 후한 나눔, 배려와 양보, 용납과 용서 등이 모두 이에 관계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향한 마음과 손에 인색함이 없게 하라는 권면일 것입니다.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은 이런 식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마음이 넓어졌으니…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고후6:11,13)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특별히 ‘모든 사람에게’ 라는 말을 포함시킨 이유는
사람에 따라 그 관대함에 차별을 두지 말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문득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눅6:32-33)
그리고 이어서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권면하시는 말씀…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35)
사실 이것을 실천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은혜를 아는 자’만이, ‘주님 안에 있는 자’만이 노력해 볼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이어서 묵직한 한 마디를 덧붙입니다.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주님이 가까이 계심을 알 때 우리는 타인에게 관대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나에게 어떻게 관대함을 나타내셨는지를 생각하면서,
나도 다른 누군가에게 너그럽게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관대함 속에 ‘자기 의’가 끼어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한, 주님의 오심이 가까왔다는 것을 생각하며 살 때,
우리는 원망 없이 소망 중에 기꺼이 관대함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줘도 우리 주님은 내가 어떤 마음으로 행했는지 다 아실 것이기에,
억울해하거나 아까워하지 않으며 다른 이에게 관대함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5장 7-9절에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마지막으로,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라 권면합니다.
본문 6절과 7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살다보면 염려하게 되는 일들이 많습니다.
먹고사는 문제로, 인간관계의 문제로,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등등…
아마 여러분도 잘 아시는 사실이겠지만, 사람들은 거의 불필요한 일로 염려한다 합니다.
노먼 빈센트 필 박사란 분이 ‘쓸데없는 걱정’이란 글에서 말했다지요..
사람이 하는 걱정 중 절대로 발생하지 않을 사건에 대한 걱정이 40%,
이미 일어난 사건에 대한 걱정이 30%,
별로 신경 쓸 일이 아닌 작은 것에 대한 걱정이 22%,
우리가 어떻게 바꿀 수 없는 사건에 대한 걱정이 4%,
우리들이 해결해야 할 진짜 사건에 대한 걱정이 4%.
결국 사람들은 96%의 쓸데없는 걱정 때문에
기쁨도, 웃음도, 마음의 평화도 잃어버린 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예수님은 “염려하지 말라”고 단호히 말씀하십니다(마6:34).
여러분 중에 속으로 이렇게 생각할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염려를 안 하려 해도 염려가 되는 걸 어떡하란 말이냐?
그 때는 기도하십시오!
염려 대신 기도를 선택하십시오!
내가 지금 염려하고 있다는 걸 인지한 순간, 바로 끊고 ‘주님’을 부르십시오.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무슨 문제건 다 하나님께 가지고 가라는 것입니다.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시68:19) 주님께 내 짐을 모두 풀어놓으라는 것입니다.
또한, 구할 것이 있으면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 자녀의 특권입니다.
하나님은 그 자녀들에게 인색하신 분이 아닙니다.
언제나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길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 언제나 가장 좋은 것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감사’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집니다.
우리는 감사함으로 기도하고, 또한 기도함으로 감사하게 됩니다.
기도 가운데 우리가 하나님께 집중할 때 어느덧 염려는 사라지고 평강이 찾아옵니다.
바울은 그것을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라 표현합니다.
현실은 변한 게 없는데 기도 중에 이해할 수 없는 평강이 찾아와 우리 마음을 위로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가는 길을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함으로 기도하십시다!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십시다.
모든 것을 온전케 하시는 그분이 오셔서 우리 안에서 일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사는 우리들은 이 땅에서 어디에 서 있어야 할까?
“주 안에 서라” 말씀합니다.
주 안에서 모두 같은 마음을 품고,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주 안에서 다른 이에게 관대하고, 주 안에서 기도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우리가 이 땅을 사는 동안 늘 주 안에 서서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께서 서셨던 그 자리에 우리도 서게 하시고, 예수님께서 사셨던 그 모습으로 우리도 살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늘 우리 가까이에 계신 주님을 기다리며 믿음, 소망, 사랑으로 걸어가는 우리의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