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21년 8월 22일)
- 고린도전서 15장 42-44, 53-58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지금 여기서 우리가 하는 주의 일은 헛되지 않다 - 고전15, 42-44,53-58.docx
<고린도전서 15: 42-44, 53-58>
42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 … ]
53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부활을 믿습니다. ‘그리스도인’ 중에도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이 경우 그 사람이 믿는 기독교는 신약성경이 말하는 기독교와 사뭇 다른 것이 될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크게 다음 두 가지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인의 부활을 믿는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다시 오실 때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영광스런 새 몸을 입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살 것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어떤 이들은 우리가 죽으면 몸은 썩어 없어지고, 영혼만이 다른 곳에 계속 존재할 거라 생각하는데, 그것은 신약성경이 말하는 바가 아닙니다.
예수께서 죽으신 후 새 몸을 입고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 믿는 자들도 죽은 뒤에 새 몸을 입고 부활할 것입니다.
우리중 누구도 자기 경험을 통해 죽음 이후를 알지 못합니다. 또한 우리중 누구도 자기 경험을 통해 세상 끝에 있을 일을 알지 못합니다.
부활은 결국 믿음의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하고 그리스도인의 부활을 예언하는 성경에 근거해서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저는 부활을 믿습니다. 우리가 예배중 고백하는 사도신경 속에는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라는 구절과 “몸의 부활을 믿습니다”라는 내용이 들어 있는데, 이것은 저의 신앙고백입니다.
어떻게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느냐고 누군가 제게 말한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을 믿으면서 어떻게 부활을 믿지 않을 수 있는가?
부활을 믿고 안 믿고는 각 사람의 선택일 수 있지만, 그 믿음의 유무는 그 사람의 미래 뿐 아니라 현재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은 죽음 너머에 대한 소망이 없기에 늘 죽음 앞에서 살아갑니다. 그 결과는 죽는 게 무서워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 쉽습니다.
반면 참으로 부활을 믿는 사람은 죄와 죽음의 권세를 이기며 오늘을 살 수 있습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과 소망이 지금 여기서 그들이 하는 일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도 부활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굳건히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나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십시오. 오늘 우리의 수고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버리지 않으시고 영화롭게 하실 것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또한 지금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하는 일들이 무의미하게 사라지거나 잊혀지지 않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이루실 위대한 일의 일부가 될 것임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걸어간 십자가 여정의 승리를 드러냅니다. 우리도 이 부활 신앙 위에 굳게 설 때 예수님 가신 승리의 길을 잘 따라갈 수 있습니다.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을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는” 일이라 말합니다.
우리가 씨앗을 심으면 그것이 후에 나무가 되고 또 열매가 됩니다. 하지만 심는 그 순간에는 그저 알맹이에 불과할 뿐 장래의 형체는 아직 나타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후에 내가 입게 될 새 몸은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이 몸과 같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내가 이 몸을 가지고 심는 것을 따라 그날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새로운 형체의 몸을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각 사람이 입게 될 새 몸이 어떤 모습일지 지금 여기서 다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첫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새 몸에서 못자국과 창자국을 보고 그분임을 알아보았던 것처럼, 그날에 내가 입게 될 새 몸은 이 땅을 사는 동안 내가 주님 앞에서 한 일들을 신비롭게 반영하는 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요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죽음 이후에 맞게 될 미래는 우리가 죽음 이전에 살아가는 현재와 어느 정도 연속선상에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죽음 이후에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아갈 삶은 우리가 죽음 이전에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과 어느 정도 연속선상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까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며 살아야 합니다. 지금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이 진행해가고 계신 일, 그리고 결국 그분이 온전히 이루실 그 일에 동참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회복,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 속에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가 회복되게 하는 일입니다.
구원은 그저 죽은 뒤에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이미 이 땅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는 이미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동참하며 살아갑니다.
구원은 인간을 위한 구원이면서 동시에 구원받은 인간을 통한 더 큰 세상의 구원입니다. 구원은 단지 영혼만이 아니라 인간 존재 전체에 대한 것이며, 미래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현재에 대한 것이며,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통해서’ 하시는 일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자주 빠지게 되는 두 개의 극단이 있습니다.
한쪽 극단에는, 기독교인의 주된 임무가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혁명을 통해 지금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쪽 극단에는, 주님이 돌아오셔서 모든 것을 바로잡으실 때까지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영혼 구원에만 신경 쓰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관점은 모두 주 안에서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으므로 흔들리지 말고 주님의 일을 하라는 바울의 권고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합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이 이 세상의 참 주님이심을 믿고,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대로 하나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임하길 기도한다면, 이 세상의 불의에 만족하며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울 수 있다는 오만과 승리주의도 문제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노력조차도 소용없다고 말하는 패배주의도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세우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그 일을 이루어가길 기뻐하십니다.
1세기 사두개인들이 부활을 믿지 않은 근본 원인은 부활이, 하나님이 이 세상을 뒤집으신다는 뜻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부활을 믿는 사람들, 죽음을 이기는 산 소망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들은 불의한 세상의 현상유지를 바라는 기득권자들에게 늘 위험한 존재로 인식될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복음에 순종하고자 한다면,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라면,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시고 우리가 성령으로부터 힘을 얻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면, 현재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일은 바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가 이루어지는 일, 이 세상 모든 불의와 거짓과 폭력의 현장 속에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가 이루어지는 일을 소망하며 우리가 기도하고 행동하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사람에게 사랑과 감사와 친절을 표현하는 일, 장애를 가진 아이가 걷거나 읽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 보낸 시간, 하나님이 창조하신 다른 피조물들을 소중히 돌보는 일,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위해 기도하며 돕는 일, 내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길을 고민하고 결단하며 실천하는 일 등… 우리가 주 안에서 하는 일들은 모두 헛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곧 낭떠러지로 떨어질 기계에 기름칠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의 일부가 될 일을 믿음과 소망과 사랑 안에서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실제적으로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신약학자 톰 라이트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일에 참여하는 것의 의미를 거대한 성당을 짓고 있는 석공의 이미지를 통해 설명합니다.
건축가는 이미 전체 설계도를 염두에 두고 있고, 어떤 돌을 어떤 식으로 조각할지에 대해 석공 팀에게 지침을 전달했습니다. 감독은 전달 받은 임무를 각 팀원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어떤 사람은 특정 탑을 위한 돌을 다듬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이어진 부위의 선을 감추는 정교한 패턴을 조각할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낙숫물받이의 동물 장식이나 문장 작업을 할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성인과 순교자와 왕과 여왕의 석상을 만들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도 각자 자신이 맡은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 것이고, 물론 다른 많은 부서들이 완전히 다른 임무로 똑같이 바쁘다는 사실도 알 것입니다. 자신이 작업하는 돌과 석상을 완성하고 나면, 그들은 최종적 건물에서 자신들의 작업이 어디에 놓일지 자세히 알지 못해도 그 작업을 넘길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작업한 부분이 표시되어 있는 전체 설계도를 보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작업한 부분이 드디어 제자리에 가 있는 완성된 건물을 보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건축가를 신뢰하기 때문에 주어진 지침에 따라서 자신들이 한 일이 낭비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압니다.
그들 자신이 성당을 짓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당을 짓는 일을 위해서 일하고 있고, 그 성당이 완공되면 그들의 일은 더 가치가 높아질 것이고 고귀해질 것입니다. 그들이 작업장에서 돌을 쪼개고 다듬고 할 때 그 일이 가졌을 의미보다 더 많은 의미를 지니게 될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 하나님 나라의 일에 함께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지금 여기서 우리가 하는 주의 일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아멘.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부활의 복음과 소망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세상 불의와 거짓과 폭력이 만연한 곳, 아픔과 슬픔이 있는 모든 곳에서 당신은 지금도 일하고 계시는 줄 믿습니다. 승리하신 예수님의 길을 따라 이 땅에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이루어가는 일에 동참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