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19년 8월 25일)
- 에스라 3:10-13, 마태 25:14-30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청지기의 기쁨 - 에스라3,10-13+마태25,14-30.docx
<에스라 3장 10-13절>
10 건축자가 여호와의 성전의 기초를 놓을 때에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들고 아삽 자손 레위 사람들은 제금을 들고 서서 이스라엘 왕 다윗의 규례대로 여호와를 찬송하되
11 찬양으로 화답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이르되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하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 기초가 놓임을 보고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로 즐거이 부르며
12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첫 성전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였으나 여러 사람은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지르니
13 백성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간하지 못하였더라”
<마태복음 25장 14-30절>
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으며
17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오늘 구약의 본문은 이스라엘 역사 속의 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기 70년을 지내고,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칙령이 발표되면서,
유다 백성들은 꿈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와 새 성전 건축을 시작합니다.
건축자들이 성전 기초를 놓을 때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악기를 들고 하나님을 찬송하였고,
백성들도 화답하여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시도다” 찬양하였다 합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니, 그 상황에서 백성들이 나타낸 정서적 반응에 차이가 있었습니다.
한 그룹은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질렀고, 또 한 그룹은 대성통곡하며 울었다 합니다.
둘 다 그 상황을 감사함으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표출된 정서는 달랐던 것입니다.
이 차이가 생겨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들이 그 같은 상황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기쁨의 함성을 지르던 그룹은 대체로 젊은층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새 성전 기초가 놓여지는 모습에 기쁨을 나타낸 이유는
그 상황과 함께 시작될 희망찬 미래에 더 마음이 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편, 대성통곡하며 울었던 그룹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
즉 ‘첫 성전을 보았던’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그 모습을 보고 통곡하며 울었던 이유는
그 상황이 연상시키는 지나온 과거에 더 마음이 붙들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이 잃어버린 것, 그들이 잘못했던 것, 그래서 그들이 겪어야 했던 일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그들을 구원하셔서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
그 회한과 감격, 참회와 감사의 마음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그들은 울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같은 상황에서 각 사람마다 느끼는 정서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 정서의 차이는 각 사람이 가진 관심의 차이, 또 그에 따른 해석의 차이를 반영합니다.
기독교 심리학자 Robert C. Roberts는 그의 책 <Spiritual Emotions>에서
‘정서’(emotion)를 ‘관심 기반 해석’(Concern-based construal)이라 정의합니다.
정서는 주체가 그 상황의 의미를 자기 관심에 기반해 즉각적으로 해석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예컨대, 얼마전 토마토 농장을 새로 시작한 한 농부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어느 날 그는 그 지역에 폭설이 예상된다는 일기예보를 듣고 근심합니다.
왜요? 그 상황이 그의 토마토들에게 위협적이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가 그 농장에 그저 고용된 일꾼이라면 얘기가 다를 수 있겠지만,
농장 주인이라면 그 상황에서 자기 작물들을 염려하고 조치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즉, 그의 ‘근심과 염려’라는 정서는 그의 작물에 대한 그의 관심에 기반해 있습니다.
만약 폭설이 무사히 지나간다면, 그 ‘근심과 염려’는 ‘기쁨과 안도’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이 ‘기쁨과 안도’라는 정서도 전에 ‘근심과 염려’라는 정서와 마찬가지로,
그의 작물에 대한 그의 관심에 기반해 있습니다.
다만, 바뀐 상황이 해석의 차이를 낳고, 그것이 다른 정서의 표출로 이어진 것입니다.
이처럼 어떤 상황에서 우리가 표출하는 정서는 우리가 무엇에 주된 관심을 두고
그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며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다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어떤 상황에서 느끼는 정서는
일반 세상 사람들이 같은 상황에서 느끼는 정서와 다를 수 있고,
또 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어떤 상황에서 나타내는 정서는
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같은 상황에서 나타내는 정서와 다를 수 있습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 하나님 나라에 주된 관심을 두고
예수 복음의 빛 속에서 모든 걸 바라보고 반응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초기 사도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요,
사도행전 5장 40-41절 말씀 찾아서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예수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사도들은 체포되고 옥에 갇히고 매를 맞았습니다.
이 상황에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보이는 반응은 낙심, 슬픔, 분노, 두려움 등일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놀랍게도 ‘기쁨’으로 반응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들이 예수의 이름을 위해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겨지고 있다는 인식,
즉, 그들이 예수의 증인으로서 예수의 길을 따른다는 영광스런 인식 때문이었다는 겁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사랑했고, 그분을 닮기 원했고, 또 그분의 사역에 동참하길 원했기에,
그 박해의 상황이 오히려 그들이 길을 잘 가고 있다는 싸인으로 이해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박해의 상황에서 사도들이 나타낸 기쁨의 정서는
그들의 주요 관심이 하나님 나라와 주님 따름에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 기반 위에서 그들은 상황을 복음의 빛 속에서 긍정적으로 이해하며 기뻐했던 것입니다.
‘기쁨’이란 정서는 일종의 만족을 표현합니다.
우리가 관심 두고 있는 무언가가 있고, 상황이 그 관심을 만족시키고 있는 걸 볼 때,
우리는 기쁨 혹은 즐거움을 느낍니다.
그런데 모든 기쁨이 다 ‘좋은 기쁨’은 아닐 것입니다.
슬픔이라고 다 나쁜 것이 아니듯, 기쁨이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나쁜 상황을 좋게 보고, 또 좋은 상황을 나쁘게 보기도 합니다.
한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 나타내는 기쁨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냅니다.
그의 주된 관심이 무엇이고, 그의 마음이 무엇을 갈망하고 있는지를 드러냅니다.
때때로 우리 영혼은 둘로 나뉘어, 은밀히 ‘악한’ 기쁨을 즐길 때도 있겠지만,
우리가 주님 앞에서 더 많이 우리 자신을 정직히 돌아볼수록,
우리는 그 악한 기쁨에 대해 더 많이 고통스러워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목표로 해야 할 모습 중 하나는
진정 좋은 것에 대해 진정 기뻐하고,
진정 나쁜 것에 대해 진정 아파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늘 예수님을 바라보고 따르며 그분이 내 안에 주인되어 사시게 할 때,
시나브로 우리 안에는 그분 닮은 겸손과 사랑의 덕이 생겨나고,
점점더 우리 삶은 그분과 같은 관심, 같은 마음 속에서
주님과 함께 울고 함께 웃는 모습으로 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우리에게 신앙의 세계에 ‘참 멋진 기쁨’이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하나둘 예수님에게로 옮겨가는 모습을 보며 그는 말합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요3:29-30)
메시야 예수님의 오심을 인식하고 그는 자신의 작아짐을 받아들이되,
‘체념’ 속에서가 아니라 ‘기쁨’ 속에서 그리 합니다.
어떻게 그 상황에서 기뻐할 수 있었을까?
그의 주된 관심이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
오실 메시야와 그의 나라를 증거하는 데 맞춰져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아는 사람, 자신이 물러날 때를 아는 사람,
참으로 바람직한 것을 열망하며 달려갈 수 있는 사람,
참으로 좋은 것을 알아보고 만족하며 기뻐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의 주된 관심은 무엇입니까?
또 우리는 무엇에 기뻐하는 사람들입니까?
우리가 잘 아는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
이것은 천국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 말씀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비밀을 담고 있는 말씀이란 뜻입니다.
여기서 오늘은 ‘사명과 기쁨’의 관계에 관해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먼 길을 떠나면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겼습니다.
각각 그 재능대로, 즉 각자의 능력에 따라,
세 종에게 각각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씩 맡기고 떠났습니다.
시간이 흘러 주인이 돌아와 종들과 결산을 합니다.
먼저 다섯 달란트 받았던 종이 나와 말합니다.
주인님, 당신이 제게 다섯 달란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다섯 달란트를 더 남겼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하는 말이 21절에 나오는데, 함께 읽겠습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이어 두 달란트 받았던 종도 그걸로 장사하여 다시 두 달란트를 더 남겼다 말하자,
주인은 앞에서와 같은 말로 그를 칭찬하며 보상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이 나와 말합니다.
당신에게 받은 한 달란트 여기 있습니다. 제가 땅에 묻어 두었다가 되돌려드립니다.
그리고 뭔가 해명이 필요하다 느꼈는지 덧붙여 말하길,
주인이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사람이라 생각해서 그랬다 합니다.
그 주인이 ‘투자는 안 하고 이득만 바라는 사람’이라 생각해 두려워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주인의 얼굴이 어두워집니다. 이어 그를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 부르며,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이미 열 달란트 가진 종에게 주라 명하고,
그 ‘무익한 종’은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합니다.
이 예수님의 비유 말씀은 크게 보아 ‘청지기의식’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청지기’란 자기 것이 아닌 주인의 것에 대해 책임을 맡고 관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따라서 ‘좋은 청지기’는 주인이 맡긴 것 주인 뜻대로 관리하고 운용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우리의 재능, 은사, 직분, 자녀 등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좋은 청지기가 된다는 뜻은
이 맡겨진 것들을 주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사용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따라서 관건은 세상적 관점의 탁월함과 효율성을 좇는 것이 아니라
청지기가 주님의 마음과 뜻 안에서 행하는 데 있다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앞에 두 종은 좋은 청지기였지만, 세 번째 종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주인은 그 종들이 각자 받은 것으로 뭔가를 행하길 바랬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그분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 바로 이어서, 그 인간에게 다른 피조물들을 다스리란 명령이 주어집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청지기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맡아 하나님의 뜻대로 관리하고 회복시키는 사명을 부여받은 존재.
또한 누가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은 복이 있으리로다” (눅12:42-43)
즉,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주님의 집 청지기가 되어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그 집 종들에게 양식 나눠주는 일을 성실히 감당한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달란트 비유 속 주인은 자기 종들에게 그의 것을 맡길 때 그들의 능력을 고려합니다.
다섯 달란드, 두 달란트, 한 달란트… 각각 다르게 맡깁니다.
하지만 후에 다섯 달란트 남긴 종과 두 달란트 남긴 종이 받은 칭찬은 같았습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주인을 위해 일했고, 주인은 그것을 알아주었다는 점,
주인 눈에 중요한 것은, 그들이 주인을 위해 얼마나 많은 걸 행하고 남겼느냐가 아니라,
그들이 어떤 마음과 정신으로 그 일을 행했느냐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어떤 마음과 정신, 여기에 청지기의식의 핵심,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있습니다.
주인이 그 두 “착하고 충성된 종”에게 내린 보상은 이것이었습니다.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이에 어떤 종은 이렇게 반응할 지 모르겠습니다.
뭐라고요? 더 많은 것을 맡기신다고요? 주인님 그걸 보상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제가 그 말 듣고 기뻐할 줄 아셨어요? 저는 휴가가 필요하다고요!
예, 우리에겐 휴식이 필요하지요. 주님은 우리에게 휴식도 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일하는 중에 얻는 기쁨도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순 없을 것입니다.
가정에서 어머니가 요리를 할 때 그 요리의 기쁨이
그 일 자체보다 그 음식을 먹을 사랑하는 사람들 안에 있듯이,
주님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누리는 일의 기쁨 역시
그 일 자체보다 그가 사랑하는 주님 안에 있을 것입니다.
좋은 청지기는 주인과 같은 관심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
주어진 상황을 주인의 눈과 마음으로 바라보고 이해하려 애쓰는 사람,
그래서 주인과 같은 정서의 자기장 속에서 반응하고 행동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 두 선한 청지기는 아마 그 전까지도 주인이 맡긴 일을 하는 가운데
이미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그저 억지로, 마지못해, 늘 일그러진 얼굴로, 끝날 날만 기다리며,
마치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을 한다는 듯, 그렇게 일하지 않고,
옥에 갇히고 채찍에 맞으면서도 ‘기쁨으로’ 복음을 전했던 사도들처럼
사랑 안에서, 넉넉하게, 주님과 함께하는 기쁨을 누리며, 그렇게 일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인이 이제 더 많은 것을 맡기겠다 말할 때,
그것을 부담으로 여기기보다 진정 보상으로 여기며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 주인의 일을 맡아 하며 그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것,
그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보람된 일인지, 이미 그들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 그 세 번째 종도 이런 마음으로 행했다면 결과는 어땠을까요?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그 받은 한 달란트로 그는 고구마 농사를 시작해 열심히 일합니다.
처음엔 모든 게 물흐르듯 잘 진행되었죠. 수익도 올립니다.
그러다 어느 해, 기상이변이 일어나 고구마 농사에 실패하고, 그는 모든 걸 잃게 됩니다.
주인이 돌아와 결산을 합니다. 그는 주인 앞에 빈 손으로 나아갑니다.
그 주인이 예수님이었다면, 절대 이런 식으로 말하진 않았을 겁니다.
이 악하고 무익한 종아. 내 돈을 다 잃었느냐? 은행에라도 맡겨 뒀으면 본전이라도 지켰지. 에이, 이 모자란 녀석, 지옥에나 가거라!
절대로… 예수님은 절대 그리 말하셨을 리 없습니다. 아마 이렇게 말하셨겠죠.
잘 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 마음이 나와 함께 있었음을 안다. 네가 초반에 성공하며 기뻐할 때에도, 또 나중에 실패하여 슬퍼할 때에도, 너는 내 것을 네 것처럼 여기며 기뻐하고 슬퍼했었지. 네가 적은 일에 충성했으니 나는 네가 계속해서 나의 일을 맡아주면 좋겠구나. 여봐라, 다섯 달란트 가진 종이 낸 수익 중 한 달란트를 이 종에게 주어 그가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하여라. 너도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일은 주님의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아니, 그것만이 진정 ‘주님의 일’이라 할 것입니다.
사명은 주님 주시는 힘으로, 주님과 함께 하는 기쁨으로 감당하는 것입니다.
사명의 길에는 분명 때를 따라 주시는 주님의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고 새 생명을 주셨다는 사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가 기뻐할 이유는 충분합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4:4)
그리고 여기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예비된 또 하나의 기쁨이 있습니다.
주님과 같은 관심 속에서 주님이 맡기신 일 주님의 마음과 뜻을 따라 행하려 애쓰는
착하고 충성된 청지기들이 누리는 신비한 하늘의 기쁨이 그것입니다.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이 청지기의 기쁨을 누리며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이 세상 사는 동안 주님과 같은 관심, 같은 마음을 품고, 주님과 함께 기뻐하며 살길 원합니다. 청지기의 기쁨을 누리며 살길 원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주님을 향하게 하시고, 주님께서 맡겨주신 것 감사히 여기며, 때를 따라 주시는 은혜 안에서 충성되이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