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마태복음 10:34-39>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선뜻 이해되지 않는 당혹스런 말씀입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예수님은 세상의 구원을 위해 오신 분 아닌가요? 슬픔 많은 세상에 기쁨을 주고, 싸움 많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오신 분 아닌가요? 그런데 왜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하십니까?

예수님이 선포하신 팔복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 어떤 사람이 세상에서 피스메이커의 삶을 살고 있을 때, 그 모습을 보며 사람들이 말할 거라는 거죠. “야, 저 사람은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구나!”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었죠.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헐어 화평을 이루셨습니다. 그런데도 왜 예수님은 세상에 화평이 아닌 검을 주러 왔다 하시는 걸까요?

‘평화’에 대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품고 있는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 주시려는 것입니다. 너희는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글쎄,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식의 ‘화평’이라면 아닌데! 오히려 나는 그런 화평을 깨러 왔어! 그 가짜 화평이 판치는 세상에 검을 던지러 왔다 말하는 편이 옳을 거야.

분쟁이 없이 안정되고 평온한 상태를 사람들은 보통 “평화”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상태가 깨지면 “평화”가 깨졌다 말합니다. 그런데 과연 이게 맞는 말일까요? 어떤 나라에 불의한 독재자가 있다 칩시다. 그는 권력을 이용해 온갖 불의와 부정을 저지릅니다. 그리고 가짜 뉴스로 국민들을 속이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 반대의 목소리를 잠재웁니다. 그 결과 나라 안에는 분쟁이 없고 평온한 분위가 유지되는 듯 합니다. 그럼 이 나라에 평화가 있는 건가요?

그런데 이 와중에 한 사람이 용감히 일어나 진실을 폭로하고 독재자의 불의에 저항합니다. 그로 인해 사회는 시끄러워지고 안정은 깨질 것입니다. 점차 그에게 동조하는 사람들이 생겨날지 모릅니다. 그러면 그들에 대한 탄압이 가해지겠죠. 대립과 충돌이 발생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는 사람도 생겨날지 모릅니다. 자 이 경우, 그 용감히 일어났던 사람은 평화를 깨뜨리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평화를 세워가는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가 세상에 있음으로 인해, 잔잔하던 세상의 호수에 큰 파문이 일어납니다.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헤롯 왕은 그 때부터 그 아기를 어떻게 없앨까 궁리합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는 모습을 본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저 예수를 죽일까 의논합니다.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일로 인해 믿는 이가 많아지자,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은 자칫 민중소요가 일어나 로마군대가 개입해 들어올까 염려하여,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합니다. 이 사례들 속에서 예수님은 “평화”를 깨는 자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그렇게 인식한 존재가 또 있었죠. 마귀 사탄입니다. 예수님이 귀신들린 사람에게 다가갈 때마다, 그 사람 속에 있던 마귀가 소리칩니다.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왜 이런 말을 할까요? 자신이 지배하던 “평화로운” 세계에 그 “평화”와 “안정”을 깨는 귀찮은 존재가 등장했기 때문이죠.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저항할 수 없는 권위로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존재는 그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 즉 예수님의 제자들이 살아가는 세계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예수 믿는 자들에 대한 박해가 심하던 시절, 가족 중에 혼자 믿는 사람이 그 가정에서 겪어야 했던 상황이 어땠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미리 예고하십니다.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10:21) 그리고 말씀하시죠.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22)

예수님 때문에 미움을 받을 것이다, 예수님 때문에 박해를 받을 것이다, 예수님 때문에 가정에 불화가 발생할 것이다, 이런 말씀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하신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도 이런 상황을 실제 경험해보신 분이 있을 것입니다. 저희 어머님도 믿지 않는 집안에 시집오셔서 눈물 많이 흘리며 신앙생활 하셨습니다. 일터에서나 사회에서 불의한 일을 보았을 때, 그걸 그냥 넘어가지 않고 문제제기 하는 신앙인은 아마 많은 사람의 미움과 따돌림을 받을 것입니다. 조직의 ‘평화’를 깨는 사람이라는 모함과 함께 말이죠.

자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말씀을 왜 하시는가? 예수님의 길을 따라 살다가 그런 화평이 깨지는 상황을 만날 때, 그거 이상한 일로 생각하지 말고 계속 그 길을 가라는 뜻일 겁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사셨으니 우리도 그렇게 살라구요. 그리고 또 하나! 그런 ‘가짜 평화’에 집착하지 말고 ‘진짜 평화’를 이루는 삶을 살라는 뜻일 겁니다.

예수님은 분명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평화가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공동번역):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라”

지금 한 강대국의 수장이 군대를 동원해 그보다 약한 이웃나라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명분이 필요하니까, 그 이웃나라 안에 있는 자국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평화유지군을 파견하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예전에 히틀러가 체코 수데텐 지역을 손에 넣을 때 내세웠던 명분과 유사합니다.

유럽에서 사역하는 저희 교단 선교사들이 지난 몇 주간 우크라이나를 위해 함께 기도했습니다. 우크라이나에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도록, 전쟁의 참화가 발생하지 않도록, 그곳의 생명들이 희생되지 않도록… 그런데 전쟁은 일어났죠.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을까요? 아직 우리는 정확히 알기 어렵습니다. 다만, 이기심과 자만심에 물든 인간의 생각이 성공하지 못하기를, 세상의 거짓된 안정과 거짓된 화평이 깨진 그 자리에 하나님의 참된 평화가 움돋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평화는 저항과 충돌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거짓과 불의 속에서의 안정과 평온의 상태가 아닙니다. 평화는 진리와 사랑의 열매이며, 참된 평화는 언제나 정의로운 평화입니다. 평화는 힘으로 상대방을 나의 동심원 안에 포섭시키려는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평화는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경계선과 장벽을 넘어 흐를 때, 그곳에 평화의 공동체가 창조됩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군사적 정복자로 이 땅에 오셨다는 뜻도 아니요, 예수님이 세상의 평화에 관심이 없는 분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우리에게 세상의 가짜 평화에 집착하지 말고 참된 하나님의 평화를 이루는 삶을 살라고 도전하는 말씀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다음 몇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첫째, 부모나 자식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라! 둘째,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라! 셋째, 예수님을 위해 자기 생명을 걸어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예수님이 부모 섬기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시거나 아이들을 하찮게 여기셔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마 여러분도 잘 알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렇게까지 요구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와 내 가족, 내 나라, 내가 속한 집단에 대한 이기적인 사랑 속에서 사람들간에 평화가 깨지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 이기적 사랑이 과연 내 자식, 내 부모를 진정 위하는 일인지도 사실 불분명합니다. 부모가 자식에 대한 이기적 사랑에서 벗어날 때,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내 자식에 대한 사랑을 능가하게 될 때, 그것이 우리 자녀들에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에 반대하는 시위들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제 한 사진을 보았는데, 두 사람이 서로 끌어안고 우는 모습의 사진이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의 손에 이런 문구가 쓰인 종이가 들려 있었습니다. “I am Russian. Sorry for that.”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인종이나 국적에 의해 나뉘어지는 건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 아닌가 싶습니다. 공동의 가치는 인종이나 국적의 경계를 넘어 사람들을 하나로 묶습니다.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보다, 또한 자기 아들이나 딸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것이 제자의 길이라는 주님의 말씀은 자기 부모나 자식을 사랑하지 말하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이 가족이나 인종이나 국적의 경계를 넘어 편견없이 모든 사람에게 뻗어가야 함을 말씀하시는 뜻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거기에 평화의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아왔을 때,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함께 있던 제자들을 가리키며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여기)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마12:46-50)

또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여기서 ‘자기 십자가’란 예수님의 길을 따르면서 겪게 되는 모든 고난과 어려움, 감당해야 할 사명을 의미할 것입니다. 평화는 거저 주어지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헐어 하나님과 사람 사이, 또 사람과 사람 사이에 화평을 이루셨듯, 우리도 세상에서 화평케 하는 자의 삶을 살기 위해 각자 짊어지고 감당해야 할 십자가가 있을 것입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사람들이 그렇게 평화를 말하고 또 평화를 원하는 이유가 뭘까 생각해보면, 결국 자기 목숨 잃을까 두려워서인 것 같습니다. 그게 두려워 세상이 약속하는 가짜 평화에 그렇게 집착하는 것이죠. 하지만 예수님은 반대로 말씀하십니다. 자기 목숨 얻으려 하는 자는 잃을 것이라 합니다. 반면 예수님을 위해 생명을 거는 자는 생명을 얻으리라 합니다. 결국 생명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평화의 길이 생명의 길입니다. 사랑의 길이 생명의 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생명의 길입니다.

평화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처음부터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 참된 하나님의 평화는 우리 안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과 삶을 하나님께서 온전히 다스리실 때 내 안에 하나님의 평화가 이루어지고, 그 평화는 내가 관계맺고 있는 사람들에게로 흘러갈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의 관계와 삶을 하나님께서 온전히 다스리실 때 우리 안에 하나님의 평화가 이루어지고, 그 평화는 우리가 관계맺고 있는 사람들에게로 흘러갈 것입니다.   

예수님의 겨자씨 비유를 떠올려보면 좋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 처음 심길 때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지만, 후에는 자라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어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내 안에 받아들이고, 그리하여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때 이루어지는 일들이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예수님은 세상의 가짜 화평을 거부하는 길, 참된 하나님의 평화를 이루는 삶의 길로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자기 몸을 헐어 평화를 이루는 십자가의 길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얼핏 보면 죽는 길 같은 그 길이 실은 사는 길, 우리 모두가 사는 길이라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평화의 주님, 우리 안에 당신의 사랑, 당신의 평화를 내려주셔서, 우리가 세상의 가짜 평화에 집착하지 않고 참된 하나님의 평화 이루는 삶으로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