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20년 1월 26일)
- 창세기 4장 1-17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가인의 인생 - 창4,1-17.docx
<창세기 4:1-17>
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0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1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짐을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16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17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세기는 세계와 인류의 시작에 관한 이야기들을 다루지만, 단순한 역사의 기록이 아닙니다. 그 모든 일들을 상세하고 정확하게 기술하는 게 주목적이 아닙니다.
창세기는 신앙의 책입니다. 신앙의 눈으로 본 창조, 신앙의 눈으로 본 타락, 신앙의 눈으로 본 구속. 이 속엔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톡특한 시각이 있고, 메시지가 있습니다.
성경 속 한 사람의 인생을 살펴보는 일은 유익합니다. 그의 삶과 죽음을 들여다보면서 나의 삶과 죽음을 생각해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가인이라는 한 사람의 생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 사이에서 나온 첫 아들이었습니다.
가인이란 이름의 뜻은 ‘얻음’입니다. 첫 아들에게 이 이름을 지어주면서 아담과 하와는 그 아이가 여호와께로부터 왔음을 고백합니다.
가인에게 동생이 생깁니다. 이름이 아벨입니다. 이후 아벨은 양 치는 자, 가인은 농사하는 자가 됩니다.
세월이 지나 가인과 아벨은 각자 수고해 얻은 것으로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벨이 드린 것은 받으시고 가인이 드린 것은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왜 그러셨을까? 당연히 떠오르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농산물보다 축산물을 더 좋아하시기 때문일까? 그럴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드리는 이의 마음을 보시는 분임을 우리는 압니다. 본문 4절과 5절은 이 사실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신 것은 아벨의 제물만이 아닙니다. ‘아벨과 그의 제물’이라 합니다.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 것은 가인의 제물만이 아닙니다. ‘가인과 그의 제물’이라 합니다. 하나님은 그 제물 속에 담긴 드린 이의 마음을 보시고 그를 받거나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물을 드린다는 것은 곧 그 예물과 함께 자신을 드린다는 뜻임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드렸다’고 합니다. 여기서 어떤 특별함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반면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다’ 합니다. 이것은 특별한 것입니다. 기르던 양이 나은 첫 새끼,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겠습니까? 그걸 하나님께 드린 아벨의 마음이 어떤 것이었을지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가인은 분노합니다.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였다 합니다. 왜 분노할까요? ‘분노’는 상대방이 옳지 않다는 자기 판단에 근거한 정서입니다. 가인이 볼 때, 자기 예물은 거절하고 동생의 예물만 받으신 하나님은 옳지 않습니다.
이 가인의 분노는 선악과를 따먹은 후 인간에게 생겨난 변화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이제 인간은 옳고 그름을 스스로 결정하는 주체가 되려 합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선악의 개념은 갖게 되었지만 ‘선’을 판단하고 실행하는 일에 한계가 있습니다.
분노하는 가인에게 7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나님은 가인이 ‘선을 행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선’은 오직 하나님의 관점에서 정의됩니다. 많은 경우 우리의 분노는 정당하지 못한 분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한 번의 예배 실패로 모든 게 끝장이라 하지 않으십니다. 그로 인해 가인에게 바로 형벌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경고하십니다. 그 한 번의 악이 또 다른 악으로 이어지기 쉬우니 조심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우리도 예배에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마음이 담기지 않은 형식적인 예배를 드릴 때가 있습니다. 또한 선행의 길에서 미끄러질 때가 있습니다. 잘 가다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 한 번의 실패로 내 삶이 바로 끝장 나는 것은 아닐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한 번의 미끄러짐으로 인해 우리는 ‘죄’에 취약한 상태가 됩니다. 죄에 이끌리기 쉬워집니다.
우려했던 일이 결국 일어나고 맙니다. 가인은 아벨을 들로 데리고 나가 쳐 죽입니다. 마음 속 분노를 자기 동생에게 쏟아붓습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이 그렇게 일어납니다.
아마도 그것은 우리가 ‘죽음’이라고 부르는 사건이 처음 일어난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 전까지 누구도 경험하거나 목격하지 못했던 일, 그 허무하고 되돌릴 수 없는 상황 앞에서 가인은 당황했을 것입니다.
아벨이란 이름의 뜻은 ‘허무’입니다. 그의 죽음은 너무나 허무했습니다. 이 아벨의 죽음은 우리에게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죽음은 인간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일까요? 그렇다면 왜 가인이 죽지 않고 아벨이 죽은 것입니까?
선악과를 금하시며 하나님은 아담에게 경고하셨습니다.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지만 그들이 먹었을 때 그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바로 죽었나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저 겁주려고 그 말을 하셨던 걸까요? 그럴 것 같지는 않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지 ‘즉시 죽으리라’ 하시진 않았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해석을 가능케 합니다.
첫째, 그 불순종의 범죄로 인해 인간은 언젠가는 죽게 되었다, 그 육신의 삶이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게 되었다는 해석입니다. 실제로 아담은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습니다. 우리들 역시 때가 되면 죽습니다.
또 하나의 해석은 그 범죄의 결과로 그들 속에 있는, 또 그들 사이에 있는 무언가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죽음이란 단순히 우리 육신의 삶을 지속시켜주는 생물학적 생명의 상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보다 근본적으로 그것은, 우리가 바른 인식과 관계 속에서 참으로 인간답게 사는 것을 가능케하는 영적인 생명의 상실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2장 7절에 말씀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고 합니다. 19절에 보면 각종 들짐승과 새들도 하나님은 흙으로 지으셨습니다. 재료가 같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것이 있습니다. 다른 동물들은 그렇게 흙으로 지어진 후에 바로 ‘생물’, 즉 ‘살아있는 존재’로 지칭됩니다. 하지만 사람은 다릅니다. 그렇게 흙으로 지으시고 이어 하나님이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즉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비로소 사람이 ‘생령’ 혹은 ‘생물’이 되었다, 즉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다른 동물들은 창조되어 숨 쉬고 사는 것만으로도 ‘살아있다’ 말할 수 있지만,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숨’을 들이마시며 살지 않으면 참으로 ‘살아있다’ 말할 수 없다… 그 하나님의 숨결 속에서 사는 존재, 그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범죄 이후 바로 죽진 않았지만, 그들의 인식과 관계에 몇 가지 변화가 생겨납니다. 그 즉시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부끄러워 나뭇잎으로 제 몸을 가립니다. 또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는 두려워 그분의 낯을 피해 나무 사이에 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추궁하시자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립니다. 그리고 급기야, 그들이 낳은 아들이 자기 동생을 죽이는 일까지 발생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의 우리들 속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일들입니다. 아담과 하와, 가인과 아벨은 우리에게 원죄의 천형을 씌워놓은 야속한 옛날 사람들이 아니라, 지나온 인류 역사 속에서, 또한 오늘의 우리 현실 속에서 반복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생명 잃은 인간’의 전형이라 할 것입니다.
그 끔찍한 일이 있은 후 하나님은 가인에게 물으십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아담이 범죄하여 숨었을 때에도 하나님은 물으셨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왜 이것을 물으실까요?
하나님의 임재 속에 있던 사람이 더이상 거기에 없음을 인지하셨기 때문이 아닐까요? 하나님을 호흡하며 살던 사람이 더이상 그 숨을 쉬고 있지 않음을 느끼셨기 때문이 아닐까요?
또한 범죄한 가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함이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가인은 오히려 퉁명스럽게 발뺌합니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그 일로 인해 가인에게는 저주가 내려집니다. 그가 아무리 애써 땅을 갈아도 땅이 더이상 소출을 내지 않을 것이라 합니다. 이에 그는 땅에서 피하여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합니다.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리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죽은 아벨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가인이 하나님께 하소연합니다. “벌이 너무 무거워서 저로서는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오늘 이 땅에서 저를 아주 쫓아내시니, 저는 이제 하나님의 얼굴을 뵙지 못하고 세상을 떠돌아다니게 되었습니다.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숨결에서 멀어진 사람을 종내 사로잡는 것은 죽음의 공포입니다. 이제 그는 죽음이 두려워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은 아이러니입니다. 자기가 저지른 살인을 통해 죽음이 뭔지를 알게 된 가인은 이제 자기도 그렇게 될까봐 두려워하며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쫓아내시면서도 그들에게 가죽 옷을 입혀 주셨던 자비의 하나님은 이번에도 범죄한 가인을 쫓아내시면서도 그에게 자비를 베푸십니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일곱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가인은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게 됩니다. ‘놋’이란 지명은 ‘방황’ 혹은 방랑’(wandering)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에서 멀어진 사람은 떠돌이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가 있는 곳이 어디든 거기에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하고 유리된 삶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많은 곳을 돌아다니며 사는 삶이라 해서 ‘떠돌이 인생’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그가 있는 곳이 어디든 거기서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삽니다. 비록 짧은 기간 거기 머물지라도 그곳을 누리며 복되게 하는 삶을 삽니다.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께 그의 존재의 닻을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그가 있는 곳이 어디든 거기에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존재합니다. 혹여 긴 시간 한 곳에 머물지라도 그곳과 유리된 삶을 삽니다. 그들 속에는 불안과 공허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그들은 있어야 할 자리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신학자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해서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 평안하지 않습니다”
그 놋 땅에서 에녹은 성을 쌓습니다. 성을 쌓는 이유는 두렵기 때문입니다. 안전 보장을 위해서입니다. 두려운 사람은 자기만의 성을 쌓습니다.
그 성에 자기 아들의 이름을 붙여 ‘에녹 성’이라 부릅니다. 그 성을 자기 아들에게 물려주고자 한 것입니다. 자기는 방랑하며 불안하게 살았지만 자기 자손들은 그 안에서 안전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의 후손 중에 라멕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지어 부른 시가 23-24절에 나옵니다.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누군가 자기에게 해를 입혔기에 보복성 살인을 저질렀다는 얘깁니다. 가인의 바람과 달리 에녹 성은 결코 안전하고 평안한 세계가 아니었습니다.
이어지는 시의 내용은 더 가관입니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가인을 죽이는 사람은 벌을 일곱 배나 받으리라 한 것처럼, 자기를 죽이는 사람은 벌을 일흔일곱 배나 받을 테니 각오하라는 허세요 협박입니다. 살인을 저질러 놓고는 보복 당하지 않으려고 으름장을 놓는 모습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일, 내 속에 두려움 때문에 남에게 두려움을 유발하는 일, 그것이 하나님 앞을 떠난 사람들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란 뜻입니다.
많은 것이 불확실한 우리 인생 속에서 가장 확실한 것 하나가 있다면, 우리 모두는 결국 죽는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우리가 삶 속에서 느끼는 모든 두려움의 근저에는 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에서 멀어질수록 이 두려움이 더욱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됩니다.
여기까지만 얘기하고 설교를 마치면 너무 우울하고 절망적일 것입니다. 이어지는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들 중에 딱 두 사람을 언급하고자 합니다. 한 사람은 ‘에노스’, 또 한 사람은 ‘에녹’입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 사이에 세 번째 아들을 주십니다.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합니다. ‘두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혹은 다른 씨를 이 땅에 두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이 ‘셋’의 후예를 통해 장차 그분의 구원 역사를 이루어가시게 됩니다.
이 셋이 또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다 합니다. 그리고 25절 하반절에 보면, 이 말 뒤에 의미심장한 말이 붙어 있습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세기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말은 ‘하나님을 예배했다’는 뜻입니다. 이 에노스의 때에 비로소 사람들이 다시 하나님을 예배하게 되었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에노스’라는 이름 속에는 단순히 ‘사람’이란 뜻도 있고, ‘연약한 자’, 혹은 ‘죽을 수밖에 없는 자’란 뜻도 있습니다. 자기 아들에게 이 이름을 붙여주면서 아버지 셋이 생각하고 염원하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아이야, 우리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아니다. 우리는 ‘연약한 자’다.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자’다. 이것이 우리다. 이것을 기억하고 살아라… 이런 속마음이 아니었을까요?
우리가 ‘사람’이고,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생각할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근원이요 생명되신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을 예배하게 됩니다. 그리고 깨닫게 됩니다. 그분 앞에서 살아갈 때 우리는 참으로 ‘살아있는’ 존재가 되고, 참으로 ‘사람답게’ 살게 된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죽음’은 그저 두려운 것이며, 이를 피하려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더욱 멀어지는 요인이 됩니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 ‘죽음’은 그로 인해 자기가 어떤 존재임을 깨닫고 생명되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계기가 됩니다.
한편, 이 셋의 후손 중에 에녹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앞에 가인의 아들 에녹과 동명이인입니다. 이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라는 아들을 낳고, 이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다 하는데, 특이한 점은 그가 ‘죽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이유가 7장 24절에 나오는데요,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이 ‘죽음’을 건너뛴 에녹의 인생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 주시려는 것은 무엇일까요?
육신의 삶이 끝나는 일로서의 죽음은 사실 ‘진짜 죽음’이 아니라는 것. 진짜 죽음은 하나님의 임재에서 멀어지는 일, 하나님의 생명을 숨쉬지 못하는 상태라는 것.
죽음은 확실히 인간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일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죽음은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지시해주는 너무도 확실한 싸인입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끝까지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돌아갈 곳은 그저 흙이겠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속에서 진리의 빛을 찾은 사람은 그 전에 먼저 하나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돌아갈 것이고, 이후 맞게될 죽음의 순간이 결코 그를 하나님의 생명에서 떼어놓지 못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인의 인생을 반면교사로 삼아 에녹같은 삶으로 나아갑시다!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숨을 받아 사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가인의 인생을 통해 우리의 예배, 우리의 행동, 우리의 관계, 우리의 삶과 죽음을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보게 하시고, 우리를 생명의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