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19년 10월 13일)
- 시편 50:23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감사 - 시50,23.docx
<시편 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감사’는 하나님의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중요한 특징입니다.
성경 구약과 신약에 걸쳐 ‘감사’라는 단어가 빈번히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감사하는 사람, 감사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감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소나 염소와 같은 제물에 배고프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마음이 그분을 향하고 있는 사람을 찾으시고,
그가 믿음으로 드리는 감사의 예배를 기뻐 받으십니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시50:14-15)
‘감사’는 ‘언약’과 관계가 있습니다.
감사의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이 언약에 신실하신 분임을 믿는다는 뜻이며,
나 역시 언약에 신실하리라 결단한다는 뜻입니다.
이 언약관계의 확고함 속에서,
우리는 감사하기 어려운 상황 중에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시편에 등장하는 무수한 감사의 고백들이 바로 그런 가운데 터져나온 감사였습니다.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 (시30:4)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시118:28)
다니엘은 왕 외에 다른 신 섬기는 걸 금지하는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집에 돌아가 예루살렘을 향해 창문을 열고 늘 하던 대로 하루 세 번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단6:10)
이런 행동은 일시적으로 그의 삶을 위기에 빠뜨렸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구원과 영광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가실 때,
나병환자 열 명이 멀리 서서 치유를 바라며 소리쳤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제사장에게 보내셨고,
가는 길에 그들 모두가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 한 사람만이 발길을 돌려 예수님께 나아와 감사했습니다.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눅17:16)
열 명 중 하나… 어쩌면 지금도 감사할 줄 아는 이는 그 정도 비율일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그리고 그 사마리아인에게 말씀하시길,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여기서 ‘구원’은 그의 나병이 나은 일만을 의미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가 새롭게 되었음을 선언하고 계신 것입니다.
자기 살이 썩어들어가는 것만을 슬퍼하지,
자기 영혼이 썩어들어가는 것에는 슬퍼할 줄 모르는 사람들…
감사가 없다면 영혼의 살은 살아났다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의 믿음이 그의 감사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감사가 그의 구원을 위한 길을 닦았습니다.
감사는 ‘좋음’을 인식한 결과입니다.
그 상황 속에서 ‘좋음’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감사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 상황이 내 눈에 좋게 보일 때 감사하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을 때도 감사하는 일이 어렵고, 그리 하려면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 믿음의 감사는 상황 자체의 좋고 나쁨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에 근거합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그 상황에서 선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107:1)
지금 내 눈에 좋게 보인다고 그것을 ‘선’이라 단언할 수 없습니다.
또 지금 내 눈에 안 좋게 보인다고 그것이 ‘선’과 무관하다 단정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선하시며, 그분의 뜻만이 영원히 선합니다.
이에 근거해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8:28)
이것을 신뢰하며 우리는 어려운 상황에도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생각하며 감사할 수 있습니다.
좋았던 것을 망쳐버리는 쪽은 늘상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들입니다.
그러고나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마치 모든 게 끝난 것처럼 낙심하곤 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연약함과 어리석음, 자주 반복되는 실수와 잘못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와의 언약관계를 깨뜨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시며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이 ‘헤세드’의 사랑, 그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근거하여
우리는 어떤 상황에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선하고 인자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보존하신다는 사실,
또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많은 것들을 복으로 주신다는 사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측량할 수 없는 사랑,
온 세상 모든 죄인들을 위한 그 용서와 대속의 사랑,
자격이 없는 내게 베푸신 그 구원의 은혜를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5:8)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8:32,38,39)
여기에 우리의 확고부동한 감사의 이유가 있습니다.
이 근거 위에서 바울은 확신있게 권면한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5:18)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골3:17)
우리 삶의 매순간 내게 좋아 보이는 것이든 안 좋아 보이는 것이든,
축복처럼 여겨지는 상황이든 환난처럼 여겨지는 상황이든,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겪는 모든 일들은 결국 지나가버릴 것이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께 속한 것들만이 영원히 남을 것인데,
바로 우리가 이미 거기에 속해 있다는 사실,
이미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속에 들어와 오늘을 영원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우리가 감사할 이유는 충분합니다.
그 사랑을 받고 누리는 사람은 실로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더 가지려는 집착에서 자유하게 되고, 다 가진 사람처럼 감사할 수 있습니다.
반면 그 사랑을 받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실상 아무것도 갖지 못한 사람과 같습니다.
많이 가진 것 같으나 늘상 배고픈 사람, 그는 그 많음 속에서도 감사하지 못합니다.
감사하지 못하는 것…
사도 바울은 이런 모습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사람의 특징 중 하나로 묘사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롬1:21)
어떤 사람은 누군가에게 빚을 졌다는 느낌이 싫어 감사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는 타인의 호의에 대해 최소한의 정의를 행한 것에 불과하다 말할지 모릅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거죠.
하지만 감사의 빚은 정의의 빚과는 다릅니다.
만약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일주일 정도 우리 집에 쉬어 가도록 배려할 때,
우리가 그에게 기대하는 것은 렌트비가 아닙니다.
그저 작은 감사의 표시: 고맙다는 말 한 마디, 혹은 그릇 치우는 걸 거드는 일 정도겠죠.
그런데 만약 상대방이 나의 호의를 그냥 그렇게 호의로 받아들이지 않고,
당연히 누릴 권리로 생각하거나, 그대로 되갚아야 할 의무로 생각한다면,
내 마음은 불편해질 것입니다.
말하자면, 감사의 빚은 인정의 빚입니다.
호의가 호의로 인정된다면, 빚은 이미 다 갚아진 셈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호의를 베푼 이에게 이 빚을 느낍니다.
그는 그 호의가 공짜라는 사실과, 그걸 그대로 되갚을 의무가 없음을 인식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어떤 무게를 느낍니다.
그것은 자신이 그 호의를 베푼 이에게 의존해 있다고 느끼는 일종의 연결 의식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그 의존성의 무게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기쁘게, 그 빚진 상태 속에 거하고자 하지,
그것을 엄격한 개념으로 되갚아버리려 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빚진 자의 마음으로 다른 누군가에게 마찬가지로 호의를 베풀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로 반응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반면, 타인의 호의에 빚진 상태를 자기 존엄성을 약화시키는 부끄러운 일로 여기는 태도,
그래서 그 호의에 감사하기보다, 얼른 그것을 되갚아버리려는 충동의 이면에는,
경쟁적이며 엘리트주의적인 이상, 남보다 높은 곳에 위치하려는 욕망이 숨어 있습니다.
기독교적 의미의 감사를 방해하는 장애물은
이처럼 하나님에 대한 의존성, 또 서로에 대한 의존성을 인정하는 것에 대한 저항입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인간은 창조와 보존, 생명과 축복에 대해 하나님께 의존해 있고,
또한 우리끼리도 서로 의존하여 살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우리의 존엄성은 나 혼자서 충분하다는 인식에서 기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감사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우리의 존엄성을 표현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사실,
우리가 지존하신 그분의 은혜의 수혜자라는 사실,
이 진리를 깨닫고 감사하며 하나님께 엎드려 절하게 된 사람은
또한 동시에 하나님에 의해 높이 들려올려짐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한 바리새인은 성전에 올라가
자기 옆에 서 있는 세리를 의식하며 다음과 같은 ‘감사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이것은 바른 감사 기도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타인과의 비교우위에 의한 감사가 아닙니다.
내가 ‘그들과 같지 않다’는 사실로 인한 감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내가 ‘그들과 같다’는 사실로 인한 감사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 중에 있다는 사실로 인한 감사,
자격이 없는 내가 하나님의 존귀한 백성들 중에 있다는 사실로 인한 감사입니다.
남들도 누리는 것인데, 그게 어떻게 감사의 조건이 되냐구요?
감사하지 못함은 아직 그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함을 의미합니다.
선물에 감사하는 마음은 그 선물의 가치를 아는 정도에 비례할 것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다르게 보는 사람입니다.
옛날 랍비의 이야기 중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스승이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언제 날이 밝은 것을 아는가?”
한 제자가 대답합니다: “흰색 실을 검은색 실과 구분할 수 있을 때입니다”
스승은 아니라고 합니다.
다른 제자가 대답합니다: “지평선을 배경으로 나무의 윤곽이 드러날 때입니다”
역시 스승은 아니라 하고, 마침내 답을 말해 줍니다.
“너희가 한 이방인의 눈을 들여다보고 거기서 형제와 자매를 볼 수 있을 때다. 그때 날은 밝을 것이며, 그때까지는 여전히 밤일 것이다”
감사하는 사람은 주어진 많은 것들을 하나님의 선물로 인식합니다.
흔히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걸 듣게 됩니다.
목사라면, 장로라면, 집사라면, 교사라면… 당연히 어떠어떠해야 한다…
또 남편이라면, 아내라면, 부모라면, 자녀라면, 동료라면… 당연히 어때야 한다…
그런데 과연 그렇습니까? 당연히 그렇던가요? 당연히 그렇게 되던가요?
우리 중 누가 하나님의 은혜 없이 그 위치에 걸맞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당연한 건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것으로 우리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는 것입니다.
감사합시다! 우리에게 모든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께.
그리고 그분이 우리 옆에 두신 존귀한 사람들로 인해.
지난 토요일과 주일에 우리는 연합예배 20주년을 기념했습니다.
오늘의 우리를 돌아볼 때 여전히 부족한 모습이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먼저 감사하기 원합니다.
지난 20년간 이 다민족 공동체와 함께하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았다면, 시작될 수도 없었고, 지속될 수도 없었던 일입니다.
그 20년의 여정 속에서 좋았던 때도 있었고 안 좋았던 때도 있었을 겁니다.
축복처럼 여겨지는 상황도 있었고 환난처럼 여겨지는 상황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각각의 의미를 지금 다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을 통해 결국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길 기도할 뿐입니다.
그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모든 것들에 감사하며,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 옆에 두신 사람들, 여기 내 형제자매들에 감사하며,
다시 하나님께 우리의 앞길을 의탁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가정과 개인의 삶에도 감사가 회복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무리 삶이 고되고 암울해 보여도, 우리에겐 감사할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어쩌면 그 감사의 한 걸음이 우리의 영혼에 새 살이 돋게 하고,
우리 삶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끄는 구원의 여명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하나님의 구원을 볼 수 있는 올바른 우리의 행위는 무엇일까?
그것은 각자의 상황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겠지만,
그 시작은, 감사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일 것입니다.
감사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지금까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당신의 은혜 위에 굳게 세워 주시고, 감사하며 살게 도와 주시옵소서. 삶의 매순간을 감사의 예배로 드리며,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길을 닦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