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19년 12월 29일)
- 고린도전서 13:1-7, 16:14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 고전13,1-7+16,14.docx
<고린도전서 13:1-7>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린도전서 16:14>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어느덧 2019년의 마지막 주일을 맞았습니다.
지난 한 해 우리 공동체는 고린도전서 16장 14절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를 주제말씀으로 받고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사랑이 담기게 하는 삶을 함께 노력하였습니다.
먼저 일년 전 송구영신예배 때 나눴던 말씀을 잠시 되새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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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삶’을 실천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리스도인에게 그것은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남기신 ‘새 계명’이 바로 ‘사랑의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3장 34-35절에 말씀합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사랑’이라는 가치는 기존 율법 안에도 녹아흐르던 것인데,
왜 예수님은 이것을 ‘새 계명’이라 하신 걸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여기에 그 답이 있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참된 사랑의 실천을 소망하고 노력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각자의 자의적인 ‘사랑’의 개념에서 시작할 게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나타난 하나님 사랑을 제대로 배우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10절에 말씀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죄인들에게 나타내신 사랑,
‘그 사랑’이 우리가 행하려는 사랑의 근거이자 원천입니다.
여러분은 ‘그 사랑’을 얼마나 잘 알고 있습니까?
‘그 사랑’이 저와 여러분 속에서 얼마나 역사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생각 속에, 우리의 눈빛 속에, 우리의 말과 행동 속에…
우리의 관계 속에, 우리가 하는 일들 속에, 그리고 우리의 열망과 목표 속에…
그 사랑이 얼마나 녹아 흐르고 있습니까?
성경에서 우리는 이런 말씀을 듣게 됩니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일3:17-18)
입으로는 사랑을 말하면서도 행함에는 사랑이 없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얘기지요.
실제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 사랑은 온전한 사랑일 수 없다는 의미일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에서 또한 이런 말씀도 접합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전13:3)
우리의 대단한 이타적 행동 속에, 어이없게도 ‘사랑’이 빠질 수가 있다는 얘기지요.
겉으로 나타나는 행동이 다가 아니라, 사랑의 더 본질적인 차원이 있다는 뜻입니다.
사랑에 대해 나름 잘 아는 줄 알았는데,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져가는 느낌이지요?
어떤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순종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노력으로 하는 순종’, 다른 하나는 ‘죽음으로 하는 순종’.
노력으로 하는 순종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죽음으로 하는 순종은 한계를 초월한다.
죽어야 산다. 내가 죽어야 내 속에서 예수의 생명이 역사한다.
‘사랑’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자기를 북돋움에 의한 사랑’에는 한계가 있고,
‘자기를 부인함에 의한 사랑’은 한계를 초월할 것입니다.
예수님 닮은 사랑의 삶이란, 결코 내 힘만으로 가능한 삶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이게 어떻게 내 노력과 능력만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자기중심적이고 자기주도적인 사랑의 노력만으론 결코 이룰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죽고, 예수님께서 나를 온전히 주관하실 때,
내 안에 자아의 강둑이 무너지고 비로소 예수의 생명이 내 속에서 흘러나올 때,
하나님 사랑의 능력이 예수님 안에서처럼 내 안에서도 역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말이지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발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통해 내 마음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와, 내게 이르러 나를 적시고,
또 넘쳐서 다른 이에게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신비’이고 ‘기적’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구요? 그에게 나를 내어준다구요?
그렇다면 그건 당연한 일이 아니라 기적같은 일입니다!
마치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바뀐 것과 같은 기적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 ‘사랑의 기적’이 우리 삶 속에도 일어날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입니다. 저와 여러분 속에 이 사랑에 대한 간절한 사모함이 있습니까?
그 사랑이 발현되는 통로로 나를 하나님께 온전히 내어드리려는 열망이 있습니까?
알지… 사랑이 중요하다는 거 누가 모르나…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
한두 해 살아봤나… 올해라고 뭐 별 수 있겠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 수도 있겠는데요,
기적에만 집착하며 사는 것도 문제지만,
기적을 믿지 않고 사는 것도 문제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는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기적은 필요없지만,
사랑할 수 없는 우리가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기적은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께서 정말 우리에게 바라시는 일이라면,
우리가 그것을 구하며 노력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담긴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궁금하지 않습니까? 기대되지 않습니까?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이 말씀을 따라, 올 한해 ‘사랑의 삶’을 함께 이루어가면 어떨까요?
그 거룩한 기적을 사모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은혜 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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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 말씀과 함께 시작하여 지나온 일년이었습니다.
열심히 달려온 여러분의 지난 일년은 어떤 모습이었나요?
별 문제 없이 지나왔다 해서 잘 살았다 말할 수 없고,
어렵고 힘들었다 해서 못 살았다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니까요.
우리는 사랑 안에서 전에 안 하던 어떤 것을 하게 되기도 하지만,
또한 사랑 안에서 전에 하던 어떤 것을 하지 않게 되기도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의 내용을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사랑의 삶은 후자와 더 관계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만약 한해 동안 우리가 전보다 더 사랑으로 행했다면,
우리는 전보다 더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전보다 더 무례히 행하지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전보다 더 성내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 특징을 나타냈을 것이고,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전보다 더 튀지 않는 모습,
실상 무언가를 하고 있었지만 마치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을 수 있습니다.
적게 사랑하는 사람이 많이 사랑하는 사람의 삶을 다 이해하긴 어렵겠지만,
결국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은 정말 오묘한 것이어서,
나누어 줄수록 배부름을 느끼고,
움켜쥐고 있으면 배고픔을 느낍니다.
우리 중에 사랑이 필요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사랑을 주고받지 않고 행복할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을 하늘에서 지켜보고 계신다 할 때,
그분이 가장 관심 갖고 보실 것은 무엇일까요?
다음 두 가지가 아닐까 합니다.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전해지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전해지는 것.
제가 너무 단순하게 얘기하고 있는 걸까요?
한 인간에게 이보다 더 중요한 거, 제게 말해줄 수 있는 분 계십니까?
내 꿈, 내 개성, 내 일, 내 가족 … 이런 것들은 어떻게 되냐구요?
하나님 사랑을 경험하지 않고 ‘참된 나’를 발견하며 꽃피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 사랑을 경험하지 않고 다른 누군가를 참으로 사랑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하나님 사랑으로 채워지지 않은 영혼은 맹목적인 자기-사랑에 몰두하게 되고,
자기 인생의 대부분을 다른 이의 인정과 사랑을 갈구하는 데 허비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존재 자체로 사랑하셔서 예수님 안에서 있는 그대로 받으셨다는 사실이
내게 참으로 믿어질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 안에서 걸어갈 참된 나의 길이 열립니다.
또한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 아무리 위대하다 하지만,
그 사랑이 왜곡될 수 있고 파괴적인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걸 우리는 모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한다고 하는 어떤 일이 실은 나를 위해 하는 일인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어떤 사랑은 받는 이를 자유케 하지만, 어떤 사랑은 받는 이를 속박합니다.
어렵고 힘든 길보다는 쉽고 편한 길을 좇는 것이 사람들의 일반적인 경향이지만,
무엇이 진정 나 자신을 위하고, 내 주위 사람들을 위하는 길인지 깨닫게 되면,
힘들고 어려워도 제대로 된 길을 가려는 사람은 늘 나오기 마련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마7:13-14)
사랑의 삶, 그것이 바로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입니다!
힘들어도 제대로 가야 합니다.
갈 길이 멀어도 바른 방향으로 가야 결과가 좋습니다.
힘들다고, 계속 본질을 비껴 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내게 주어질 시간이 얼마나 될 지 모릅니다.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 말하면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비로소 ‘사랑’을 알게 되었다 말합니다. (요일4:7-8, 3:16)
이것이 우리에게 전해진 참 사랑이며, 우리를 통해 전해져야 할 참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어떻게 나에게 전해질 수 있었을까?
우리의 경험이 그 답을 말해 줍니다.
내 주위에 있었던 다른 누군가로부터!
나에게 그 ‘참 사랑’을 나타내준 어떤 사람, 혹은 어떤 사람들…
그들 덕분에 우리가 그 사랑을 알게 되었고, 지금 이 자리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게 사랑을 전해준 그 사람은 어떻게 그 사랑을 알게 되었는가?
이전에 그 사람 주위에 있었던 또 다른 누군가로부터!
그러면 그 사람은 또 어떻게…
이렇게 본류를 찾아 타고 타고 올라가다보면 결국 어디에 이르게 될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
거기로부터 발원한 사랑이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사람을 통해 나에게까지 온 것입니다.
그 사랑이 가짜라면 이렇게 될 수 없었겠지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고후5:14)
그 사랑은 전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랑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8:35,37)
그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기게 하는 사랑입니다!
우리에게 전해진 그 사랑은 수없이 많은 좁고 협착한 길을 지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이겨내며, 끝내 나를 찾아온 사랑입니다.
어쩌면 그 사랑의 흐름이 내게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끊길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사랑의 흐름 자체가 끊기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다른 누군가를 통해 다른 길로 또 다른 누군가에게로 흘러가겠죠.
‘진리’란 그런 것이니까요.
하지만 우리 안에 들어온 것이 진짜라면,
언젠가 그것은 자아의 강둑을 무너뜨리며
거침없이 밖으로 흘러나갈 줄 믿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사랑은 분명 어려운 것입니다.
사랑의 본질은 포용과 희생, 자기를 내어줌입니다.
본성상 우리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 대신에 자꾸 다른 것에 열을 냅니다.
이거 안 해도 다른 거 열심히 하면 하나님도 이해하시겠지 생각하는 걸까요?
하지만 사랑 없이 다른 거 열심히 하면 결과가 좋지 않습니다.
예수님 시대 바리새인들의 열심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랑 없는 열심’이 오히려 그들을 구원의 길에서 멀어지게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아무리 대단한 것을 가진 사람이라 해도
사랑이 없으면 Nothing, 아무 것도 아니요,
아무리 훌륭한 일을 많이 행한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
먼저 사랑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 나의 가난함을 겸손히 고백하며
그분의 사랑으로 채워지기를 갈망하십시다.
인생은 고해다… 그러나 이 평범한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삶은 더이상 고해가 아니다.
정신의학자 스캇 펙이 <아직도 가야할 길>이란 책에서 했던 이 통찰력 있는 말은
‘사랑’의 실천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을 듯합니다.
사랑은 분명 어려운 것이지만,
이 사실을 진정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사랑은 더이상 어렵지 않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자기 안에서 억지로 퍼내려 하니 어렵지,
사랑의 원천에 잇대어 있다면 그냥 흐르는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은 단순히 어떤 인간적인 감정 혹은 인간적인 행동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과 잇닿아 있는 사람에게서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속성,
예수님 닮은 삶의 방식,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 세상을 이기는 삶의 능력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그분이 먼저 가신 길, 그 사랑의 삶으로 부르십니다.
이것은 한 해 노력하고 끝낼 일이 아니겠죠.
우리 삶이 끝나는 그 날까지 우리가 가야 할 길,
결코 후회하지 않을 생명의 길일 것입니다.
혹시 사랑의 삶을 노력하다 낙심하셨습니까?
그렇다면, 다시 힘을 냅시다! 다시 주의 은혜를 구합시다!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사랑의 원천이신 하나님께 잇대어 살아가며
내 삶의 모든 자리를 사랑으로 채워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우리에게 베푸신 참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우리도 그 사랑의 길로 이끌어 주옵소서. 우리를 당신의 사랑의 샘으로 이끄시고, 거기서 우리가 마시고 또 흘려보내며 살게 하옵소서.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