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19년 11월 10일)
- 요한복음 21장 15-22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요21,15-22.docx
<요한복음 21장 15-22절>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우리가 어디서 어떻게 사느냐는 무엇을 얼만큼 사랑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돈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돈을 좇고 돈에 매인 삶을 살 것입니다.
그 돈을 향한 사랑이 깊어지면 돈을 위해 목숨까지 걸 것입니다.
진리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진리를 좇고 진리에 매인 삶을 살 것입니다.
그 진리를 향한 사랑이 깊어지면 진리를 위해 목숨까지 걸 것입니다.
사람이 늘 처음 상태 그대로 있으리란 법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월이 흐르며 점점 더 좋아집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세월이 흐르며 점점 더 나빠집니다.
돈을 가장 사랑하며 좇던 사람이
언젠가부터 진리를 가장 사랑하며 좇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반대로 진리를 가장 사랑하며 좇던 사람이
언제부터인가 돈을 가장 사랑하며 좇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인생은 여정이라 합니다. 우리 모두는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습니까?
점점 더 좋아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점점 더 나빠지고 있습니까?
지금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은 다시 갈릴리 바닷가로 돌아간 시몬 베드로를
예수님이 찾아가셔서 다시 사명자로 세우시는 내용입니다.
시몬이 되돌아간 이유를 유추하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한 마당에 다시 그분 앞에 설 염치가 없었을 것입니다.
돌아가 다시 배에 올라 바다에 그물을 내립니다.
하지만 그 날 밤 그는 아무 것도 잡지 못합니다.
이 모습을 보며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는지 모릅니다.
실패한 인생이야… 그때 그렇게 따라나서지 말았어야 했어… 어부로 성공할 수도 있었는데… 젊은 시절의 객기였어.. 더 현실적이었어야 했는데…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시몬의 인생은 실패한 인생일까요?
예수님을 따라나섬으로써 그의 인생 여정은 더 나빠지게 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시작된 그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더 나빠지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더 좋아지고 있는 중인지 모릅니다.
잠시 후 그는 바다에 다시 그물을 내립니다.
그물을 들 수 없을 만큼 많은 고기가 잡힙니다.
하지만 또 잠시 후 그는 거침없이 바다로 뛰어듭니다.
그의 인생에 다시 주님이 개입하셨음을 인지했기 때문입니다.
그 잡힌 고기들은 더이상 그의 관심이 아닙니다.
함께 아침을 먹은 후, 주님은 그에게 비슷한 질문을 세 번 던지십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시몬은 그렇다고 대답하고,
이어 주님은 그에게 사명을 맡기십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여기서 내 양을 먹이라, 혹은 치라는 말씀은
주님의 백성들을 먹이고 돌보는 사명을 맡기신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어떤 중요한 일을 맡길 때는 그냥 맡기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그 일을 감당할 만한 자질이 있는지 확인하고 맡길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결정적인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확인하신 것은 단 한 가지였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누가 주님의 양들을 맡아 먹이고 돌볼 수 있는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주님의 백성 섬기는 일은 무엇으로 하는가?
주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다!
어느덧 시몬 베드로는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주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갈릴리 어부 시몬을 제자로 부르시며
예수님은 그에게 새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베드로… ‘반석’이란 뜻이죠.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그에게서 잠재된 무언가를 보신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함으로써, 그는 ‘베드로’가 되어가는 여정에 오른 셈입니다.
우리는 시몬의 인생에 드러난 외적 여정에만 집중하기 쉽습니다.
물고기 잡는 어부로 살던 그가 사람 낚는 어부로 살게 된 것에만,
다시 말해, 그가 사람들 사이에서 행한 일들에만 집중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는 또하나의 여정을 밟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그의 내면 깊은 곳의 갈망을 따라 나아가는 여정이었고,
진리를 향한 여정이었고, 또한 구원을 위한 여정이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진정한 자아’를 찾아 나아가는 여정이었고,
그 길에서 하나님을 더 가까이 만나고자 하는 여정이었습니다.
작가 엘리자베스 오코너는 그의 책 <Journey Inward, Journey Outward>에서
다음과 같은 통찰력 있는 말을 들려줍니다.
한 인간이 자신의 목적지에서, 특별히 자신에게 꼭 맞는 자리에 이르느냐 이르지 못하느냐는 자기 내면에서 하나님 나라를 발견하느냐 발견하지 못하느냐에 달렸다. 또한 그 하나님 나라에서 온전하라는, 또는 거룩하라는 부르심을 듣느냐 듣지 못하느냐에 달렸다. 이러한 부르심을 듣는 자는 선택된 것이다. 그는 어느 자리에 이르려고 아등바등 댈 필요가 없다. 그는 자신의 자리가 있음을 알며, 그 자리를 자신에게 보여 주실 분 곁에 살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삶이 그의 소명(vocation)이 된다.
여러분은 자기 내면에서 하나님 나라를 발견하셨습니까?
오코너의 말을 좀더 따라가 보겠습니다.
삶을 소명으로 여긴다는 말은 넓은 길과 좁은 길이 있음을 안다는 뜻이다. 넓은 길은 생각이 없는 길, 좁은 길은 생각이 있는 길이라 불러도 좋다. 넓은 길은 군중의 길이다. 예수님은 넓은 길을 가는 사람들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자라고 묘사하신다. 이들은 잔치에 초대받고도 너무 바빠 참석하지 못한다. 이들은 아주 중요한 일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늘 논리정연하고 설득력 있게 참석하지 못하는 이유를 댄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럴듯하게 설명한다. 이미 자신에게 그럴듯하게 설명했으며, 내면의 모든 불평과 반대를 잠재웠기 때문이다. 이들은 두 길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이들은 외적인 부분에만 반응한다. 온통 외적인 부분에만 주목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많은 답변을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만 질문할 뿐, 같은 질문을 절대로 자신에게는 하지 않는다… 이들은 변하지 않는다. 이들은 이야기가 끝나는 시점에 이르러도 이야기가 시작될 때와 전혀 다르지 않다. 자신 속에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들에게 이런저런 일이 일어나지만 이들의 내면에는 결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시몬은 부르심을 들었고, 내면의 진실한 갈망을 따라 움직였습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났던 것처럼,
그도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이후 그의 인생 여정에는 자랑스런 순간도, 부끄러운 순간도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것들이 그의 내적 여정을 위한 자원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뛰어들었고, 관여했으며, 그리하여 그의 내면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다.
진정한 자아를 향한, 또 주님을 향한 그의 이 내적 여정 속에서
그는 점점 더 베드로, 즉 단단한 ‘반석’이 되어갔습니다.
이제 그는 자기 내면에서 하나님 나라를 발견했습니다.
그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주님이 계심을 확신했습니다.
그가 그토록 갈망하던 것들이 그분과 함께 거기 있었고,
바로 거기에 그의 자리, 그의 길이 놓여 있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걷는 우리의 내적 여정과 외적 여정은 서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외적 여정에서 마주치는 상황은 우리의 내적 여정을 위한 문이 되고,
우리의 내적 여정 속에서 맺게 되는 열매는 우리의 외적 여정을 위한 자원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의 중심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참된 삶’은 사랑에서 시작되어 사랑으로 마쳐집니다.
내 안에 들어찬 주님 사랑이 내 주위 사람 사랑하는 삶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게 된 사람은 어떤 것도 두려움이나 의무감으로 하지 않습니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르심을 듣고, 사랑 안에 거하게 되면, 불가능해 보였던 많은 것들이 가능해집니다.
부르심에 답하면서, 어떤 이는 생명까지 내려놓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구요? 자기 생명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속에 숨겨진 보화를 발견한 사람에게, 희생의 삶은 참으로 가치 있습니다.
그는 보화를 캐내려고 자기 소유를 다 팔아도 아깝지 않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내적 자유가 있어,
어떤 길을 따르는 데 수반되는 위험을 기꺼이 감내합니다.
그는 하루하루 ‘진정한 자아’에 더 가까이 다가서고, 그러면서 힘을 얻습니다.
그는 자기 자리에서 성공할 확률이 높지만, 그렇다고 성공에 목매지 않습니다.
모험의 가치는 목적지에 이르는 데 있지 않고 여정 자체에, 곧 ‘지금’의 삶에 있습니다.
미국 세이비어교회 고든 코스비 목사님은 말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보냄을 받은 목적은 사람들을 선하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각자 의무를 다하도록 독려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들을 위하신다는 것과 그들이 그 무엇이 될 수 있음을 알려 줘야 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마음 깊이 알고 있으며,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은사를 활용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지금 하는 일을 아주 즐겁게 하고 있다면, 다른 사람의 깊은 것을 끌어낼 방법을 가진 셈입니다. 이런 사람이 좋은 소식(Good News)입니다. 그는 좋은 소식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 사람 자체가 좋은 소식입니다. 그는 새 사람이 누리는 자유를 만끽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은사를 자유롭게 활용하는 사람은 성령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하시게 할 수 있습니다.
18절에서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것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예수 복음 전하는 삶을 살다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말씀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내가 원하지 않는 어떤 것을 해야만 하는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내가 원치 않는 어떤 것을 억지로 시키시는 분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우리 내면의 진실한 갈망에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합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세상의 소리과 자극에 무력하게 휩쓸리며,
그저 타인의 욕망을 모방하며 살면서도,
마치 그것이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라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보다 깊은 의미에서 보면,
내가 진정 갈망하는 것과 하나님이 내게 주시려는 것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사실 내가 진정 갈망하는 것, 내게 진정 필요한 것은
하나님 안에 있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군중의 길에서 발을 빼도록 도모하십니다.
어떤 사건이나, 번뜩이는 통찰이나, 큰 아픔이 일어납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군중 속에 있으나 군중에 속하지 않게 됩니다.
이 순간을 이용해, 하나님은 우리 마음과 입에 이런 질문을 두십니다.
다른 길이 있는가?
그제야 우리는 예수님 말씀하신 ‘좁고 험한 길’,
하지만 ‘생명으로 인도하는’ 그 길에 대해 관심을 두게 되고,
새로운 차원의 인생 여정을 비로소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젊어서의 베드로와 늙어서의 베드로의 차이는
행복과 불행, 옳고 그름의 차이가 아닙니다.
단지 무르익음의 차이, 사랑함의 차이, 자유함의 차이일 뿐입니다.
이미 자기 내면에서 하나님 나라를 발견한 사람,
이미 자기 속에 사랑하는 주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의 자리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제 마음대로 어딘가로 데려간다 해서,
우리 속에 임한 하나님 나라, 거기 예비된 우리 자리를 빼앗아갈 수는 없습니다.
“내 주 예수 모신 곳은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의 나라입니다.
우리 속에 그 나라가 있다면, 사랑이 우리 삶 속에 역사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평화의 나라입니다.
우리 속에 그 나라가 있다면, 평화가 우리 삶 속에 역사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기쁨의 나라입니다.
우리 속에 그 나라가 있다면, 기쁨이 우리 삶 속에 역사할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자기 내면에서 그 하나님 나라를 발견하고 있습니까?
문득 베드로는 자기 동료 요한이 앞으로 어떤 길을 걸을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어떻게 되겠느냐고 주님께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대답하십니다: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다른 사람의 삶에 관심을 두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각자에게는 자신이 걸어가야 할 자신만의 길이 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남들이 나보다 더 쉬운 길을 걷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주님을 따르는 길’ 중에 ‘쉬운 길’은 없을 것입니다.
다만, ‘좁고 험한 그 길’을 사랑 안에서 기쁨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을 뿐입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멈추지 말고 계속해서 따르라고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아직 여정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더 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디를 향해 가고 계십니까?
무엇을 위해 열심을 내고 있습니까?
결정적인 질문은 이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외부로만 향해 있던 시선을 거두어
자기 내면을 향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듣기 바랍니다.
진실한 기도를 드리고,
사랑으로 채워져서,
주님의 길 잘 따르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우리 마음을 당신의 사랑으로 채워 주옵소서.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더 온전히 빚어 주옵소서. 날마다 더욱 주님 사랑하며 주님의 길 따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