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21년 11월 14일)
- 열왕기상 17장 1-16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 왕상17,1-16.docx
<열왕기상 17:1-16>
1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2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3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4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5 그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매
6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그가 시냇물을 마셨으나
7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니라
8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9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10 그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 곳에서 나뭇가지를 줍는지라 이에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내가 마시게 하라
11 그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그를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12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13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14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5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16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11-12월에는 주위에 어려운 이웃을 돕는 행사들이 많이 예정돼 있습니다. 오늘 예배 후에는 공정무역장터가 있고, 다음 주간부터는 보흐니체 환우들을 위한 음식바자회가 진행됩니다. 그런데 올해는 코로나 판데믹의 장기화로 생계에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많아, 이런 일들에 동참하는 것도, 또 이를 권면하는 것도, 다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는 상황 같습니다.
이런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해주고자 하실까 기도하며 생각하는 중에 오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본문을 따라가면서 하나님의 음성에 함께 귀기울여보면 좋겠습니다.
북이스라엘 아합 왕 때에 팔레스틴 지역에 큰 가뭄이 있었습니다. 삼 년 육 개월간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의 고통이 극심했을 것입니다. 이 일이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본문 1절은 그 재앙이 발생한 이유라기보다는 그 재앙이 시작된 시점을 말해줍니다.
요단 동편 길르앗에 살던 한 사람이 강 건너 사마리아 왕궁의 아합 왕을 찾아와 한마디 던지고 가버립니다: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내가 다시 입을 열기 전까지 앞으로 몇 년간 이 땅에는 비는 물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을 것이오!” 그는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였습니다.
하나님은 왜 그 땅에 가뭄을 내리기로 작정하셨을까? 왜 그 땅 백성들이 고통을 겪게 하셨을까? 아합 왕 시대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는 극에 달했습니다. 아합의 아내 이세벨은 열렬한 바알 숭배자였습니다. 그들은 수도 사마리아에 바알 신전을 만들고 아세라 상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백성들 보는 앞에서 바알에게 제사하며 바알숭배를 장려했습니다. 후에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맞붙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수는 도합 850명, 이 1 : 850 이라는 숫자의 대비가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상을 여실히 드러냅니다.
당시에 바알은 땅에 비를 내리는 등 생산력을 주관하는 신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아세라는 풍요와 다산의 신으로 여겨졌습니다. 가나안 농경사회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생업과 생계를 위해 여호와 하나님만으로는 부족하고, 그 일에 실권을 쥐고 있는 그 지역 신들을 섬겨야 한다는 생각에 빠져들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돈을 숭배하거나, 하나님을 부자되게 해주는 신으로 둔갑시키는 현상과 흡사합니다.
바로 이 배경 속에서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나 여호와 하나님이 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않겠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에 대한 심판예언이며, 이스라엘의 바알숭배에 대한 정면도전입니다. “바알에게 빌어서 어디 해볼테면 해봐라! 비 내릴 수 있으면 내려봐라!”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상황은 하나님의 사람에게도 고난을 초래합니다. 가뭄의 고통을 엘리야도 함께 겪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요단 동편 그릿 시냇가로 보내십니다. 거기 숨어 있으라 하신 것은 이세벨 왕후가 그를 찾아 죽이려 하는 상황임을 암시합니다. 그 고립된 곳에서 혼자 여러 날을 어떻게 버틸 수 있을까요? 마실 물은 그 시냇물로 해결한다 치고, 매일의 양식은 어떻게 하지요? 하나님께서 먹이십니다! 아침 저녁으로 까마귀들이 떡과 고기를 물어다 주었다 합니다.
본래 까마귀는 매우 게걸스런 날짐승으로, 시체와 썩을 것들을 즐겨 먹어치우는 새입니다. 그래서인지 모세의 율법은 까마귀를 부정한 짐승으로 분류합니다. 그런데 그런 까마귀가 엘리야에게 음식을 고스란히 날라다 주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기적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나? 4절에 하나님께서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셨다는 표현이 인상적입니다.
땅에 비가 내리지 않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얼마 후 시내가 마릅니다. 이제 어떡하죠?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엘리야에게 임합니다.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시돈 땅에 가서 머물라 하신 것이 그 하나이고, 그곳 과부를 통해 먹이시겠다 한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가라 하신 사르밧은 이스라엘 땅이 아닙니다. 그곳은 이세벨 왕후의 아버지 시돈 왕 엣바알이 다스리는 지역입니다. 이세벨이 이스라엘 땅에서 여호와 섬기는 자들을 탄압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엘리야를 그 타락의 진원지, 이세벨의 고향 시돈으로 보내 살게 하시는 셈입니다. 엘리야 입장에서는 당황스럽고 겁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순종하여 나아갑니다.
전에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엘리야를 먹이셨던 하나님이 이번엔 사르밧 과부에게 명령하여 먹이시겠다 하십니다. 둘 다 무언가를 얻어 먹기에 가장 부적합해 보이는 존재들입니다. 고대 가부장적 사회에서 ‘과부’는 남편이 없으므로 인해 사회경제적 지위가 형편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의 손으로 동일하게 어려운 처지에 있는 당신의 종을 먹이고자 하셨습니다.
엘리야가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 곳에서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습니다. 정중히 말을 건넵니다. “목이 마른데 물 한 그릇 떠다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이 귀한 상황에서 낯선 나그네의 물 부탁은 부담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을 뜨러 갑니다. 그 모습을 본 엘리야는 다시 그녀를 불러 좀 더 당돌한 부탁을 합니다. “기왕이면 당신 수중에 떡도 한 조각 가져다 주시오.”
그러자 여인이 말합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몇 방울뿐입니다. 사실 저는 이 땔감을 주워다가 그 마지막 남은 것으로 아들과 함께 음식 해먹고 죽기를 기다릴 작정이었습니다.” 엘리야가 요청한 ‘떡 한 조각’은 그냥 떡 한 조각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녀에게 그것은 자기의 전부를 요구하는 말로 들렸을 것입니다.
여인의 입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란 말이 언급된 것은 그녀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기에게 물과 떡을 요청하는 그 나그네가 자기와 다른 신을 섬기는 타국인임을 그녀가 모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누군가에게 이것은 충분한 거절의 사유가 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러자 엘리야가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당신 말대로 음식을 준비하되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가져오고 그 후에 당신과 당신 아들을 위하여 만들어 드시오.” 그리고 덧붙여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땅에 다시 비를 내릴 때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습니다.”
여인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이 낯선 나그네를 자기와 상관없는 존재로 여기며 거절하고 돌아설 것인가, 이 타국인 나그네가 전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약속을 믿고 따를 것인가?
여인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다 합니다. 그 마지막 남은 가루와 기름으로 작은 떡 한 조각을 만들어 먼저 엘리야에게 가져왔다는 뜻이겠죠. 그 다음 날부터 일어난 일이 15-16절에 나옵니다: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표현이 절묘합니다. ‘여러 날 먹었으나…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매일 먹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요? 계속 있었으니까! 분명 그날 다 먹었는데, 다음 날 보면 또 있었던 것입니다. 엄청난 양의 식재료가 그 집 곳간에 한번에 다 쌓이는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날의 양식이 날마다 끊이지 않고 주어지는 기적이었습니다.
그 긴 고난의 시절에 이 기적의 양식을 먹고 산 사람은 그 여인과 아들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종 엘리야도 여러 날 그 집에서 그 기적의 양식을 먹고 살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사르밧 과부를 통해 엘리야를 먹이시고, 또한 엘리야를 통해 과부의 가족을 먹이셨습니다.
가난한 과부에게 그녀의 전부와도 같은 떡 한 조각을 요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고, 자기도 죽을 판에 낯선 나그네의 말을 듣고 먼저 그를 대접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한 결과였습니다.
이 일을 통해 그 사르밧 과부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섬기게 되었을 것입니다. 후에 예수님은 그분을 배척하는 고향 나사렛 사람들을 향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눅4:24-26)
소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배척하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그들이 알지 못하는 곳에서 그분을 믿고 따르는 소수의 사람들을 통해 묵묵히 그분의 일을 하십니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주기에 가장 부적합해 보이는 존재들을 통해 일하시고, 많이 가진 자의 누리고 남은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적게 가진 자의 마지막 것, 없는 중에 떼어 먼저 내놓은 작은 것을 통해 일하십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오병이어의 기적은 떼어줌의 기적이었습니다. 빈 들에 모인 무리를 먹이기 원하셨던 예수님은 거기 무엇이 있는지 알아보라 하셨습니다. 한 아이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놓았을 때, 예수님은 그것을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기도 하신 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눠주게 하셨습니다. 오천 명 이상이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습니다.
어떻게 그 일이 가능했는지 설명할 길은 없습니다. 그래서 기적입니다. 하지만 그 기적의 비결은 너무도 확실하고 단순합니다. ‘떼어줌’입니다. 부풀림이 아니라 떼어줌입니다. 쪼개어 나누는 것입니다. 떼어주고 떼어주고 또 떼어주어도 계속해서 나누어줄 것이 있었습니다.
이 기적을 두 번이나 체험하고도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떡이 없음으로 염려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열둘이니이다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일곱이니이다 이르시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막8:19-21)
사르밧 과부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을 때 그분의 돌보시는 기적을 체험했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 때 떼어 나누는 삶을 실천할 수 있고 하나님의 돌보시는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31-33절에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또한 히브리서 13장 5절에 말씀합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예수님의 삶이 그랬던 것처럼 오늘 우리의 삶도 ‘떼어줌’의 삶이 되면 좋겠습니다. 떼어줌이 모두의 배부름이 될 수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채우심 때문일 것입니다. 부풀려진 곳은 하나님으로 채워질 수 없습니다. 쪼개어 비어진 곳에서 하나님은 역사하시고, 그 은혜로 우리 모두가 더불어 살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모든 좋은 것들에 감사드립니다.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며 없는 중에도 떼어 나누는 손길에 은혜를 베푸시고, 돌보시며 채우시는 하나님의 기적, 천국의 기쁨과 평화를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