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하나님이 없을 때

<로마서 1장 26-32절>

26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빕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에 관한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바르게 대하지 않을 때, 하나님을 알면서도 우상을 숭배할 때 하나님은 분노하시며, 그 하나님의 진노는 ‘내버려두심’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오늘은, 그 결과로 생겨나는 인간의 불의에 관한 말씀을 살펴봅니다. 바울의 요점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대하지 않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바르게 대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경이 다른 사람에 대한 불의로 이어집니다.

오늘 본문에는 어려운 단어들이 많습니다. 다루기 까다로운 내용도 있습니다. 여러 세대가 함께 드리는 예배에서 모두 자세히 설명드리긴 어렵겠습니다. 부족한 부분은 성경공부를 통해 보충하도록 하고, 이 시간에는 중요한 몇 가지만 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대하지 않을 때 우리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오늘 본문은 크게 세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 욕심내지 말아야 할 것을 욕심내게 됩니다.

바울은 이것을 ‘부끄러운 욕심’이란 말로 표현합니다. 인간이 뭔가를 욕망한다는 것, 얻길 바란다는 것 자체는 나쁜 일이 아닙니다. 자연스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욕망하는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욕망의 방향입니다. 그 욕망이 어디로 향하느냐입니다. 하나님 알기를 거부하고 다른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은 욕망의 방향감각을 잃어버립니다. 저급한 것, 해로운 것을 욕망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시자, 그들은 “순리대로 쓸 것을 역리로 쓰게” 되었다 합니다. 말이 좀 어렵습니다만, 아마도 바울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하는 듯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의도하셨던 것이 있었는데, 그것을 거스르는 일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요점은 “저기에 그런 부끄러운 짓을 하는 일부 못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도에 어긋나는 일이 세상에 만연해 있다는 사실이 곧 인간 세계 전체가 고장 났음을 보여주는 싸인이라는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하나님 닮은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대하지 않을 때, 우리에게서 그 하나님의 형상은 희미해집니다. 우리의 욕망은 엉뚱한 곳을 향하고, 욕심내지 말아야 할 것을 욕심내게 됩니다. 그 결과 우리의 인간성은 손상됩니다. 인간다운 삶에 꼭 필요한 무언가를 잃어버립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바르게 대하지 않을 때 우리는, 해서는 안될 일들을 하게 됩니다.

28절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잊고 산다’는 의미만은 아닐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배척한다, 하나님이 내 마음의 중심에 계시는 것을 의도적으로 거부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내 삶에 필요없어!’ 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거부할 때 억지로 밀고 들어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내가 스스로 마음을 열 때까지 문밖에서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을 거부한 마음, 하나님 없는 마음을 바울은 ‘상실한 마음’이라 표현합니다. 우리 존재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마땅히 그 자리에 계셔야 할 그분을 잃어버린 마음이란 뜻일 겁니다.  

그 ‘상실한 마음’은 그렇게 계속 비어 있지 않습니다. 곧 다른 것들로 채워집니다.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하나님 없는 우리 마음, 하나님 없는 우리의 관계는 이처럼 더럽고 해로운 것들로 가득 채워집니다. 일상의 언어로 표현된 메시지 성경은 이 부분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그들이 하나님 인정하기를 귀찮아하자, 하나님도 그들에게 간섭하기를 그만두시고 제멋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러자, 그야말로 지옥 판이 벌어졌습니다. 악이 들끓고, 욕망의 아수라장이 벌어지고, 악독한 중상모략이 판을 쳤습니다. 시기와 무자비한 살인과 언쟁과 속임수로, 그들은 이 땅의 삶을 지옥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들을 보십시오. 비열한 정신에, 독기에, 일구이언하며, 하나님을 맹렬히 욕하는 자들입니다. 깡패요, 건달이요, 참을 수 없는 떠버리들입니다! 그들은 삶을 파멸로 이끄는 새로운 길을 끊임없이 만들어 냅니다. 그들은 자기 인생에 방해가 될 때는 부모조차도 저버립니다. 우둔하고, 비열하고, 잔인하고, 냉혹한 자들입니다.

이것은 누구에 대한 얘기일까요? 신학자 톰 라이트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제시하는 인간의 결점 목록을 번역하다보니 이상한 깨달음이 왔다. ‘내가 그런 사람들을 알고, 신문에서 그 사람들 이야기를 읽고, 때로는 거리에서 만나며, 이제 막 그런 사람에게서 이메일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걱정스러운 사실이 있었다. 정말로 놀라운 사실은, 내가 그런 사람을 길거리에서가 아니라 거울 속에서 발견하곤 한다는 것이다. 선악을 나누는 선은 ‘우리’와 ‘남’ 사이가 아니라 우리 각 사람의 중심을 관통한다.”

그렇습니다. 여기 언급된 각종 악행들 중에 단 하나도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특별히, 우리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을 때, 우리는 나쁜 마음을 먹고 나쁜 짓을 하기 더욱 쉬워집니다. 다른 사람을 나쁘게 대하고, 나쁜 일에 열심을 내며, 날이 갈수록 더 나빠질 확률이 높습니다.

31절을 이렇게 다시 풀어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질 때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지혜로움을 잃어버립니다(senseless). 신실함을 잃어버립니다(faithless). 따뜻함을 잃어버립니다(heartless). 자비로움을 잃어버립니다(ruthless).” 한 마디로, ‘하나님 닮은 모습’을 잃어버립니다!

적잖은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확보하려고 하나님을 거부합니다. 참 어리석습니다. 하나님만이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실 수 있는데, 자유를 위해 그분을 밖으로 내몰다니요!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을 거부하면서 그들은 자유에서 멀어집니다. 평생 자유의 껍데기만 붙들고 살아가겠죠.

세상은 ‘더 가지면 더 자유로우리라’ 말하지만, 성경은 ‘진리가 자유롭게 한다’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더 자유로워지기를 바라며 부자가 되려 하고 주인이 되려 합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살지 않는 사람, 그렇게 살 필요가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미 자유로운 사람… 복음의 진리 안에서 이미 자유롭게 된 사람은 기꺼이 종의 모습으로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습니다.

이기심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기꺼이 사랑할 수 있는 자유… 이게 진짜 자유죠!

구원은 이처럼 복음 안에서 새로운 차원, 새로운 지평, 새로운 세계로 옮겨지는 일입니다. 이전 세계에서는 모순되던 것들이 여기서는 조화를 이루고, 전에는 불가능하던 일들이 이제는 가능해지죠. 참된 자유도 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선물로 주어집니다.

뭐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은 아마 많은 날들을 자유롭지 못한 기분으로 살 것입니다. 반면, 하나님과 한 마음 한 뜻으로 살길 추구하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유를 누릴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대하지 않을 때, 우리는 해서는 안될 일들을 다른 사람에게 서슴없이 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 있을 때, 우리는 참으로 자유롭게 주위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며 살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바르게 대하지 않을 때 우리는, 옳지 않은 것을 옳다 하게 됩니다.

잘못을 저지른 후 뉘우치는 사람은 그래도 희망이 있는 사람입니다. 최소한 그 다음에 가야할 길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잘못을 저지르고도 잘못이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심지어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잘 했다며 두둔하고 칭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세상에서 얼마든 벌어질 수 있는 일들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뭘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고 합니다. 이런 일들을 하나님이 심각한 죄로 여기신다는 걸 ‘알고도’, 이를 무시하며 그리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자기가 하나님인 듯 행세하는 것입니다.

옳지 않은 걸 옳다고 우기는 건 무모한 일입니다. 우리는 옳은 것을 붙들어야 합니다.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은 없습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한다’는 말이 딱 이에 해당할 것입니다.

뒤에서 바울은, 그처럼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오래 참으심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있을 것이라 말합니다. 그들은 다가올 하나님의 진노를 자기 머리 위에 쌓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복음을 듣고 다시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기를 하나님은 바라십니다. 그 구원의 은혜에 이르기 위해 오늘의 우리는 진리 앞에 겸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이 계십니까? 마음에 하나님이 없을 때, 인간은 욕심내지 말아야 할 것을 욕심내게 되고, 해서는 안될 일을 서슴없이 하게 되며, 옳지 않은 것을 옳다고 두둔하기에 이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대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을 바르게 대할 수는 없습니다. 복음의 은혜 안에서 우리 마음 중심에 하나님을 모실 때, 우리 욕망은 바른 곳을 향하고, 우리 행동은 자유함 속에 선을 좇으며, 우리 양심은 진리 앞에 겸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의 삶 속에 늘 역사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다시 우리 마음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기 원합니다. 우리를 다스리시며, 우리 속에 당신의 빛을 비춰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당신을 나타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