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19년 5월 26일)
- 창세기 22장 1-19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모든 것을 믿고 바라는 사랑 - 창22,1-14.docx
<창세기 22장 1-19절>
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4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5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7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9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결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15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16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19 이에 아브라함이 그의 종들에게로 돌아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주하였더라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성도 안에서 역사하는 사랑’에 대해
고린도전서 13장 7절에서 사도 바울은 또한 말합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이 내용을 둘로 나누어, 지난 번에 ‘모든 것을 참고 견디는 사랑’에 대해 설교했습니다.
오늘은 ‘모든 것을 믿고 바라는 사랑’에 대해 창세기 본문을 중심으로 말씀을 나눕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왜 부르셨다고 합니까?
“시험하시려고”
시험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유혹하여 넘어뜨릴 목적의 시험, 영어론 ‘temptation’이라 합니다.
사탄이 하는 시험, 혹은 우리가 자기 욕심에 미혹되어 받는 시험입니다.
다른 하나는, 확인하여 더 굳게 세울 목적의 시험, 영어론 ‘test’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택하신 사람들을 더 굳게 세우기 위해 시험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시험은 test를 말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하나의 명령이 주어집니다.
“네 아들… 이삭을 데리고… 가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무엇을(what) 드리라 합니까?
이삭…
그가 백 세에 낳은 ‘약속의 아들’을 드리라 합니다.
그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하나님이 모르셔서 하는 말씀일까요?
아닙니다… 아심에도, 아니 아시기에, 하시는 말씀입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가서… 그를… 드리라”
나도 안다… 그가 네 사랑하는 독자라는 거 나도 안다… 그러니 하는 말이다… 네가 가장 사랑하는 그것을 드리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how) 드리라 합니까?
번제로…
번제는 다 태워 드리는 제사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도록 흠없는 제물을 잡아 남김없이 태워 드리는 제사,
‘헌신’의 의미가 담긴 제사입니다.
어디서(where) 드리라 합니까?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가라는 것입니다.
지정하신 곳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거기까지 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험(test)은
이 순종하기 어려운 명령에
아브라함이 과연 순종하는가를 보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길 떠날 채비를 합니다.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주신 곳으로 갑니다.
여기서 두 가지가 특징적입니다.
아브라함의 침묵…
그리고 즉각적인 순종…
그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습니다.
또한 미적대지도 않습니다.
그 속을 알 수 없지만,
왠지모를 확고함이 느껴집니다.
떠난 지 사흘째 되는 날…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봅니다.
종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여기서 기다리라”
그리고 덧붙여 말하기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아브라함이 비로소 속을 내비칩니다.
두 단어가 중요하게 눈에 들어옵니다.
먼저, ‘예배’라는 단어.
그는 지금 무엇을 위해 가고 있는가?
예배하러 간다는 것입니다.
초점이 이삭에게 맞춰져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맞춰져 있습니다.
그의 여정은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리러 가는 여정이었던 것입니다.
다음, ‘우리’라는 단어.
그는 지금 무엇을 믿고 있는가?
예배 후 그가 혼자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
아들 이삭과 함께 돌아오리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어떻게 그리 될 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떻게든 그리 되리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히11:17-19)
하나님이 이삭을 통해 약속하신 것들을
아브라함이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아이를 하나님이 그냥 죽게 놔두실 리 없다는 것,
설사 그런 일이 생긴다 해도
그분이 능히 다시 살리실 수도 있다는 것을
아브라함이 믿고 행했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이제 두 부자만 그 곳을 향해 나아갑니다.
아들의 등에는 번제 나무가 지워져 있고,
아버지의 손에는 불과 칼이 들려 있습니다.
아들이 묻습니다.
“내 아버지여…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버지가 대답합니다.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아브라함은 아들에게 속여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향한 그의 신뢰와 소망을 표현합니다.
아들아, 걱정하지 말아라…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실 것이다…
이 아버지의 말이 아들에게 충분한 대답이 되었을까요?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그랬던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아들이 납득 못하고 저항했다면, 아마 이렇게 되긴 어려웠겠지요.
아이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아도, 부모의 신앙에 영향 받습니다.
신뢰는 또다른 신뢰를 낳고, 순종은 또다른 순종을 낳습니다.
신뢰하며 나아가는 아버지 옆에서 아들도 신뢰하며 따라갑니다.
마침내 그 곳에 이른 아브라함…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는 순간,
하늘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여호와의 사자가 다급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며 말합니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삭이 죽임 당하는 게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었음이 드러납니다.
그럼 무엇인가?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은 그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지
알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시험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명령을 따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그의 마음 전체를 다 올려 드렸습니다.
‘번제’의 의미가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도 바라셨던 바를 이루셨습니다.
내가 이제야… 아노라
아브라함이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한다는 걸 확인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보니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었습니다.
이전엔 보이지 않았던,
이제야 비로소 보이는,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그 제물로
아브라함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를 드립니다.
그리고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합니다.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는 뜻입니다.
이어 여호와의 사자가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부르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한다.
네가 이같이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겠다.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 같고 바다의 모래 같게 하겠다.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할 것이다.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다.
이 모든 일이 네가 나의 말에 순종했기에 일어날 것이다.
이것은 처음 주시는 약속이 아닙니다.
이전에 주셨던 약속을 확언하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이전의 약속을 확정짓고,
이후 펼쳐질 역사에 시작점이 된 것입니다.
이 오래된 성경 이야기는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믿음’과 ‘소망’ 또한 주요 테마임에 틀림 없지만,
그 저변에 흐르고 있는 것, 다른 모든 것들을 가능케 한 것,
그것은 분명 ‘사랑’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사랑하셔서 그를 시험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일은 더 많은 것들을 함께 해나갈 수 있는 토대가 됩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을 사랑하여 자기의 가장 귀한 것을 내어드린 것입니다.
자기 안에 타오르는 그 사랑 때문에 그처럼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을 믿고 바라는 사랑’이 한 사람 속에서 어떻게 역사하는지에 대해
오늘 본문이 말해주는 것을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합니다.
첫째로, 사랑은 보게 합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보았다”는 표현이 4절과 13절에 반복해 나옵니다.
‘눈을 들어 본다’(look up)는 건 무슨 뜻일까요?
아래로 향해 있던 시선을 위로 치켜 든다는 것,
눈 앞에 현실 그 너머를 바라본다는 걸 의미할 것입니다.
모리아 산을 앞에 두고 아브라함은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보았습니다.
자기 앞에 놓인 상황을 ‘육신의 눈’이 아닌 ‘믿음의 눈’으로,
‘현실의 눈’이 아닌 ‘소망의 눈’으로 바라보았음을 의미합니다.
아직 확실히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신뢰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그분을 믿으며 나아갑니다.
아직 확실히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소망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그분이 하실 일을 바라며 나아갑니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님을 압니다.
하나님은 더 깊이, 더 멀리, 더 온전히 보고 계실 것입니다.
마침내 시험의 의미를 깨닫게 된 아브라함,
그가 다시 ‘눈을 들어’ 주위를 살핍니다.
무엇을 위해서였을까요?
하나님께 뭔가를 드리고 싶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됐다, 그만하면 됐다, 하셨지만,
아브라함은 그분께 뭔가를 해드리고 싶어서,
그래서 드릴 것을 찾았던 것 아닐까요?
하나님을 향한 그의 사랑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가 거기서 발견한 것,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준비해 놓으신 숫양,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린 그 숫양은
후에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아 가시려는 폭군 하나님이 아니라,
우릴 위해 당신의 가장 소중한 아들을 기꺼이 내어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어쩌면 그날의 아브라함보다 오늘의 우리는 더 잘 알고 믿으며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은 ‘보게’ 합니다.
현실을 다른 눈으로 보게 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바라보게 합니다.
사랑이 없이는 볼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9절에,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말씀합니다.
성령은 우리 마음에 하나님 사랑을 충만히 부어주시고(롬5:5),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깨닫게 하십니다(고전2:12).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 안에서 기도하며 하나님 사랑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 사랑이 역사할 때,
즉, 나와 하나님 사이에 사랑이 흐르고 있을 때,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의 눈, 소망의 눈을 들 수 있습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도 바라고 믿으며 나아갈 수 있습니다.
둘째로, 사랑은 가게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라’ 하셨습니다.
장소를 특정하시고 거기로 움직여 가게 하셨습니다.
모리아 땅에 그 산이 어느 산을 말하는지 우린 확실히 알지 못합니다.
그곳이 어디냐보다 그리로 가야 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왜 하나님은 가라 하셨을까?
그 길에서 아브라함을 빚으시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순종의 여정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지는 여정입니다.
사흘길을 갔다 합니다.
사흘, 그것은 ‘출애굽’을 위한 시간이요, ‘부활’을 위한 시간입니다.
내려놓음이 요구되는 시간, 힘들어도 가야 할 시간입니다.
아브라함은 지체없이 떠났습니다.
그의 여정은 하나님을 예배하러 가는 여정이었습니다.
그의 순종의 여정이 곧 사랑의 예배였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일러 주신 그 곳에 이르렀습니다.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거기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해 놓으신 것이 있었습니다.
이삭을 대신해 번제로 드릴 숫양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 잘 준비된 아브라함 자신이 거기 서 있었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가게’ 합니다.
다 이해되지 않아도 사랑이 있으면 갈 수 있습니다.
가면서 우리는 준비됩니다.
정화되고 강건해집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오늘의 우리도 시험하실까요?
물론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더 굳건히 세우시기 위해
그분은 오늘도 우리에게 명령하시고, 또한 가라 하십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가라 하시면 가십시오.
힘들어도 끝까지 가십시오.
하나님을 예배하는 마음으로 가십시오.
마침내 모순이 역설에 삼켜지는 날,
그 여호와의 산에서,
우리는 더 큰 사랑 가운데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셋째로, 사랑은 심게 합니다.
17절과 18절에 ‘씨’라는 단어가 반복해 등장합니다.
자손, 혹은 후손을 의미하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 결과로
그의 씨가 크게 번성할 것이고,
그의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하십니다.
지금 여기서 우리가 사랑으로 행하는 일은
지금 여기에서의 일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우리가 사랑으로 행하는 일은
다가올 세대를 위해 씨앗을 심는 일이 될 것입니다.
역사의 새 지평을 여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제 아들과 후손 잘 되는 일을 최우선으로 여겼다면
그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수 없었을 것이고,
여기 약속된 복도 그와는 관계없는 것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 약속된 복에 욕심이 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다른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비전을 자기 비전으로 삼았던 것이고,
다만 그것이 성취되도록 자신을 내어드렸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은 심게 합니다.
하나님과 같은 꿈을 꾸게 하고,
소망 중에 내 삶을 씨앗으로 심을 수 있게 합니다.
요한복음 12장 24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사도 바울도 부활의 소망 가운데 말합니다.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을 충실히 살되, 오늘만을 위해 살지는 마십시오.
나와 내 가족을 소중히 여기되, 우리만을 위해 살지는 마십시오.
모리아 산을 내려온 아브라함이 다시 브엘세바로 돌아가 살았던 것처럼,
오늘의 우리도 이 세상 속 어느 삶의 자리, 여러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 사랑을 전하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살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은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란다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그분의 사랑을 충만히 부어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에 부어지는 그 하나님 사랑 안에서
보아야 할 것을 보고, 가야 할 길을 가고, 심어야 할 것을 심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우리 마음에 당신의 사랑을 부어 주옵소서. 우리가 늘 당신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있도록, 우리를 당신께로 가까이 이끌어 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는 늘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소망하며 살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