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있는 사람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성경적 관점에서 하나님은 ‘체데크’, 즉 ‘의’의 근원이 되십니다. 그분은 사람과 세상이 마땅히 되어야 할 모습이 무엇인지를 제시하십니다. 그들의 행동이나 상태가 현재 어떠한가를 달아볼 수 있는 기준과 규범을 제시하십니다. 신학적 용어로 이것을 ‘하나님의 의’라고 부릅니다. 이 ‘하나님의 의’가 오래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시된 것이 ‘율법’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율법의 요구을 따라 살 때,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이웃과의 바른 관계 속에 있게 되고, 이로부터 의롭다 인정함을 받는 것입니다. 신명기 6장 25절에서 모세는 말합니다.

“우리가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

그러나 이후 이스라엘은 이 율법에 계시된 하나님의 의에 따라 충실히 살지 못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그 타락한 세상과 인간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그 속에 다시 올바른 질서를 확립하며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시고자, 죄인인 우리 편에서 ‘미슈파트’, 즉 ‘정의’를 행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정의’는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행동 속에서 나타납니다. 그는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죄인을 대신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렇게 우리 죄값을 대신 치르시고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시며, 우리가 다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구원의 새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새로운 하나님의 의’가 계시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서서 올바른 일을 행하신 예수님의 인격과 행동 속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의’입니다. 로마서 3장 21-24절에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이 ‘새로운 하나님의 의’는 율법을 통해 계시된 ‘이전의 하나님의 의’와 그 내용상으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이전에 율법이 알려주던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행동,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관계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속에서 온전히 구현됩니다. 다만, 이 둘 사이에 다른 점은 이것입니다. 이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율법에 대해 온전한 순종으로 반응할 때 그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었다면, 이제 예수님 이후에 사람들은 그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에 믿음으로 반응함으로써 모두가 값없이, 차별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즉, 이전에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해야 할 옳은 일이 율법이 옳다 하는 바를 충실히 따르는 일이었다면, 이제 예수님 이후에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해야 할 옳은 일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옳은 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란 뜻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행하신 옳은 일은 하나님께서 옳다 하시는 바를 따라 살고자 하는 사람이 스스로 하고자 하나 온전히 할 수 없는 그 일을 예수님께서 그를 위해 앞서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그 새로운 하나님의 의에 믿음과 감사로 반응할 뿐 아니라, 그 새로운 하나님의 의(체데크)를 따라 살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30절에 말씀합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이런 맥락에서 다시 생각해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자기 안에 결핍을 알고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옳음의 기준에 한참 못 미친다는 걸 알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하나님과 사람에게 올바른 행동을 하지 못하고, 올바른 관계 속에 있지 못함을 인식할 때마다… 내 안에 교만과 욕심이 들어차고, 내 안에 폭력성과 속물스러움이 고개를 들 때마다… “남들도 다 그러잖아!” 쉽게 털어버리듯 말하지 않고, “그래도 나는 저 사람보다 낫잖아!” 상대적인 ‘자기 의’를 주장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어찌해야 합니까’ 슬퍼할 줄 아는 사람, 자신의 그 모습 그대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타는 목마름으로 설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이며, 그는 결국 배부를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위한 빵과 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6장 35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갑니다. 하나는 바리새인이고 다른 하나는 세리입니다. 바리새인은 서로 따로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내가 저 세리 같은 사람이 아닌 것에 감사합니다. 저런 사람들처럼 남의 것을 빼앗거나 불의하고 음란한 짓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감사합니다. 내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치는 거 알고 계시지요?”

한편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려주신 후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세리가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다”

또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이 세상 안에 결핍을 알고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입니다.이 세상이 하나님의 옳음의 기준에 한참 못 미친다는 걸 알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의 불의와 거짓과 폭력에 치이고 아파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세상은 원래 다 그러니까!” 마치 주문을 외워 귀신을 쫓듯 말하지 않고,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겸손을 가장한 무책임으로 반응하지 않고, “나도 저 사람 못지 않게 힘들어!” 자기 연민에 빠져들지 않고, 너의 불행이 나의 불행과 무관하지 않으며, 너의 슬픔과 나의 슬픔이 서로 얽혀 있음을 알고, 하나님 앞에 그 현실을 끌어안고 타는 목마름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며, 그는 결국 배부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하늘의 양식, 예수님이 이 땅에서 누리셨던 신비한 양식을 먹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수가성 여인과의 대화 이후 예수님은 배가 고프지 않으셨습니다. 마을을 다녀온 제자들이 음식을 갖다 드리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요한 4:32,3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이 우리에게 참된 배부름, 영원한 만족을 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하십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라 하십니다. 하나님과 같은 곳을 바라보고 같은 것을 소망하며 세상에서 정의를 행하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계시된 ‘새로운 하나님의 의’ 예수님과 온전히 연합하여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평생에 맛볼 최고의 음식이요 최고의 음료입니다.

그 하나님께 입맛 당기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주시는 양식을 먹고, 그 세상이 알지 못하는 양식으로 배부를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