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있는 사람 5: 긍휼히 여기는 자

복음서에는 예수님이나 하나님 아버지와 관련해서만 딱 열두 번 언급되는 아름다운 표현이 나오는데요, 바로 ‘긍휼로 마음이 움직여서’라는 표현입니다. 이 때 사용된 헬라어 동사 ‘스플랑크니조마이’는 ‘몸의 내장’을 뜻하는 ‘스플랑크나’라는 명사에서 왔습니다. 사람의 ‘뱃속’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 이 곳은 강렬한 사랑과 강렬한 미움이 커가는 중심 장소입니다.

우리말 성경은 이 단어를 그저 “불쌍히 여기사” 정도로 표현하고 있지만, 원어의 뉘앙스를 살리자면 “뱃속 내장이 흔들릴 만큼 긍휼로 마음이 움직여서’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그분께 고침을 받고자 사방에서 몰려온 장애인들을 보시고, 당신의 뱃속 내장이 흔들릴 만큼 긍휼로 마음이 움직여서 그들을 고쳐주시고 먹여주십니다. (마 14:14) 어느 날인가는, 외아들을 잃고 울며 장례행렬을 따르던 한 여인을 보시고, 역시 뱃속 내장이 흔들릴 만큼 긍휼로 마음이 움직여서 그 죽은 자를 살려내기도 하십니다. (눅 7:13) 또한, 지난 목요일 성경공부 시간에 다루었던 본문 마가복음 1장 40절 이하에서도 바로 이 단어를 발견하게 됩니다.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합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레위기 13장에 보면,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나병환자는 병이 나을 때까지 동네 밖에 격리되어 있어야 했고, 사람들 앞에 나서는 일이 없어야 했습니다. 만약 실수로라도 사람을 마주치게 되면, 그 환자는 즉시 자기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 외치면서, 자신이 부정한 자이니 조심하시오, 상대방에게 알려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나병환자는 그 규정을 어기면서 예수님께 나아와 꿇어 엎드린 것입니다. 그만큼 낫고자 하는 열망이 간절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능히 자기를 치유할 수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즉, 예수님의 ‘치유 능력’에 대해서는 추호도 의심이 없었습니다. 다만, 그가 확신할 수 없었던 게 있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치유 의향’이었습니다.
“저분이 나같은 사람에게도 은혜를 베풀기 원하실까?”
여기 그가 사용한 ‘원하시면…’ 이란 표현 속에는 그의 이 위축된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이어지는 41절에,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여기 “불쌍히 여기사”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가 ‘스플랑크니조마이’, 뱃속 내장이 흔들릴 만큼 긍휼로 움직여진 예수님 마음은 이어서 아무도 예상치 못한 파격적인 행동을 낳습니다. 그 나병환자의 몸에 그분의 손을 대신 것입니다. 부정한 자와의 접촉은 율법이 금하는 바요, 부정이 그에게도 전염됨을 의미했습니다. 병의 치유만을 생각한다면 굳이 그러실 필요까진 없으셨겠지요. 예수님이 말씀만으로 병을 고치신 일이 어디 한두 번입니까? 그런데 왜? 그 순간 예수님은 그 나병환자 속 슬픔의 깊이를 헤아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상실한 마음을 어떻게든 어루만져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그분은, 정말 자기도 모르게 그처럼 손을 뻗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원한다, 네가 깨끗해지기를 내가 진정으로 원한다!”

그 즉시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이후 그는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말라는 예수님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기쁨에 차서 그 일을 널리 전파합니다.병이 나았다는 기쁨보다, 이제 가족과 이웃에게로 돌아갈 수 있다는 기쁨보다, 자칫 이러다 내가 사회에서 다시 왕따가 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보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가와 마음을 함께해 주셨다는 감격이 그에게는 더 컸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처럼 진정으로 좋은 소식은 하나님이 멀리 떨어져 계신 하나님, 두려워 피하게 되는 하나님, 복수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고통에 마음이 움직이시는 하나님, 인간의 어려움에 충만히 동참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당신의 말과 삶으로 우리에게 전해주신 복음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긍휼의 삶을 가능케 하는 것은 이 하나님의 긍휼에 대한 체험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그 하나님 마음을 전해준 다른 누군가로부터 경험한 것을 실천하고, 그를 통해 우리가 받은 것을 다시 다른 누군가에게 나눌 수 있을 뿐입니다.

누가복음 6장 36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긍휼에 동참하라는 초청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가까워지신 만큼 우리도 서로 가까워지라는 권면입니다.

그렇다면, 자비로운 자,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된다는 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 ‘자비로운 자가 되라’는 이 예수님 말씀에 이어지는 두 구절을 참고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누가복음 6장 37-38절을 찾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눅6:37-38)

우선, 자비로운 자가 된다는 것은 비판하거나 정죄하는 일을 삼간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불의에 침묵하거나 동조하라는 뜻이 아니라, 사람을 무엇보다 ‘사랑을 기다리는 존재’로 바라보라는 뜻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