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있는 사람 5: 긍휼히 여기는 자

한 사람 안에 어떤 좋은 변화를 가능케 하는 것은 무엇일까? 복음이 우리에게 말해주듯, 그것은 ‘그에게 값없이 주어진 사랑’일 것입니다. 적대감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고, 눈빛이 사납다고 느껴지는 사람을 다시금 내 눈빛을 부드럽게 하여 바라본다면, 그제야 우리는 그가 사랑에 목말라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지 모릅니다. 그에게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찬찬히 부어줄 수 있을 때, 어쩌면 그 사람 속에서 미처 피어보지 못한 채 안으로 움츠러 들었던 꽃봉오리가 다시 피어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마더 테레사는 캘커타 거리에서 죽어가는 환자를 데려다가 그가 평안히 임종하도록 돌보아주었던 경험을 전해줍니다. 세상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차 있던 그는 점차 표정이 풀렸고 결국에는 따스한 미소로 테레사를 바다보다가 눈을 감았다 합니다. 자기 삶과 화해를 이룬 것입니다. 테레사는 그의 미소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라 했습니다. 값없이 주어지는 사랑만이 사람 속에 잠들어 있는 아름다움의 꽃을 피워냅니다.

자비로운 자가 된다는 것은 또한 용서를 실천한다는 뜻입니다. 어느 날 베드로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줄까요? 일곱 번 정도면 됩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하여라” 이어서 한 이야기를 들려주시는데, 어떤 임금이 그 종들에게 와서 결산할 때였습니다. 만 달란트라는 큰 금액을 빚진 자가 갚을 능력이 없음을 호소하며 참아주길 간청하니, 주인이 그를 불쌍히 여겨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해 주었다고 합니다. 여기 “불쌍히 여겨”로 번역된 헬라어 역시 ‘스플랑크니조마이’입니다. 이어 그 종이 나가 자기에게 고작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납니다. 그를 붙들어 목을 잡고는 자기에게 진 빚을 얼른 다 갚으라 합니다. 그리고 그 동료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었다고 합니다. 다른 동료들이 이를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알리니, 주인이 그를 불러 말합니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빛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히 마땅하지 아니하냐” 이어 주인은 그 종이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겼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려주신 후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 18:35)

자비로운 자가 된다는 것은 또한 후히 주는 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 우리가 잘 아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이야기는 “누가 내 이웃입니까?” 질문한 사람에게 예수님이 들려주신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 강도를 만나 많이 맞고 거의 죽을 지경이 되어 버려졌다 합니다마침 한 제사장이 거길 지나가다 그를 보았지만 피하여 지나가고, 레위인 하나도 마찬가지로 보고도 그냥 지나갑니다. 그런데 한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줍니다. 여기 ‘불쌍히 여겨’로 번역된 단어 역시 ‘스플랑크니조마이’입니다. 그리고 이튿날 주막 주인에게 자기 돈까지 내어 주며 그 사람을 돌보아 달라 부탁하고, 혹시 비용이 더 들면 자기가 돌아와 갚겠다고 말합니다. 이야기 말미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십니다.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그가 대답합니다.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후히 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자기 영혼의 곳간이 이미 풍성히 채워진 사람이 후히 줄 수 있을 것입니다. 타인에게 인색한 사람은 아무리 돈이 많아도 빈궁한 사람입니다. 자기 속에 하나님 사랑이 가득하여 끝없이 후히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부요한 사람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경쟁적인 사회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 속에서 사람들은 끝없이 모으고, 채우고, 오르려 합니다. 또한 자기가 남과 다르고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 식으로 자기의 존재가치를 인정받으려는 몸부림일 것입니다.

긍휼도 우리 삶의 가장자리에만 머물러 있길 바라는 것이 어쩌면 우리의 솔직한 마음일 것입니다. 긍휼의 사람이 되려면 서로를 나누는 줄긋기를 포기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다가 혹 내 정체성과 존재감을 잃지나 않을까 염려합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이것입니다. 한 사람의 가치는 경쟁을 통해 긁어 모을 수 있는 것들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값없이 받은 사랑으로 평가된다는 것. 나의 정체성은 다른 사람과의 차이점에 달려 있지 않다는 사실, 나의 자존감은 내가 비상한 일을 해내 칭찬을 얻는 데서가 아니라, 훨씬 더 심오한 하나님 사랑에 기초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 우리는 우리의 독특한 재능을 다른 이들을 위한 선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의 말에 진정으로 관심을 쏟아 주고, 나의 갈등과 고통에 대해 진실로 보살피는 마음을 표현해 줄 때, 우리는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음을 느낍니다. 서서히 두려움이 녹아 없어지고, 긴장이 해소되며, 불안감이 사라지고, 우리가 서로 선물로 나눌 수 있는 무언가가 이미 우리 속에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영성학자 헨리 나우웬은 말합니다.
“우리 시대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들 중 하나는, 우리가 이전 어느 때보다도 세계의 고난과 고통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 있으나 그것에 반응하는 비율은 점점 더 낮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질문은, 어떻게 하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이 세상에 있는 고통을 보고 마음이 움직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긍휼의 사람은 더 큰 일, 더 많은 일을 생각하기보다, 내 앞에 있는 한 사람에게 집중하며 그에게 기꺼이 영향받고자 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조급함을 버리고 단 1분이라도 그와 진정으로 함께하는 시간을 갖고자 노력하는 사람, 내가 뭔가를 해야 한다는 부담감 대신 하나님께서 뭔가를 하시리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그 사람 옆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냥 잠시 함께 있어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예수님처럼 사람들 사이에서 사랑으로 꽃을 피우고 인내로 결실하는 긍휼의 사람이 아닐까요?

예수님은 이렇게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다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내가 다른 사람을 대하는 잣대로 하나님께서 나를 대하신다면 어쩌겠습니까? 아니, 긍정적인 어법으로 이야기합시다. 내가 내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한다면 나도 하나님께 용서를 받으리라 하십니다. 내가 주위 사람들에게 후히 베푼다면 하나님도 내게 후히 주시리라 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고통받는 이에게로 가서 그 고통을 함께 한다면, 하나님도 내가 고통받는 자리에 오셔서 그 고통을 함께 하시리라 하십니다.

성경을 일상의 언어로 표현한 메시지 성경은 오늘 본문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남을 돌보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렇게 정성 들여 돌보는 순간에 너희도 돌봄을 받는다”
자비한 눈으로 세상을 보고 긍휼의 마음으로 세상과 만나는 사람은 마침내 사람들 속에서 피어나는 꽃, 하나님께서 각 사람 안에서 신비롭게 피워내는 꽃을 보며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고통 속에 있는 내 이웃에게 다가가 그 옆에 함께 있어주는 사람은 그곳에 오셔서 붙드시고 일으키시며 새로운 삶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을 자기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 다른 이를 긍휼히 여기는 사람에게 당신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긍휼히 여기는 자에게 예비된 복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