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있는 사람 6: 마음이 청결한 자

반면, 어떤 이는 내 안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것이 드러났을 때, 그것이 악하다는 걸 인정하지 않고 이를 감추거나 변명하기에 급급합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고 심해지면 이제 악을 악으로 인식하지도 못하고, 심지어 악을 선으로 둔갑시키기까지 합니다. 그러니 그의 삶은 달라지지 않고 양심은 더욱 무디어지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삶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비참한 지경에 이르고 맙니다. 이런 마음 자세로 사는 이가 바로, 마음이 구부러진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도, 하나님께도, 그리고 타인에게도 정직하게 서지 못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손 씻는 시늉을 하지 않고는 절대 식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날 그들이 예수님께 따지고 듭니다. “어째서 당신의 제자들은 규정을 우습게 알고, 손도 씻지 않고 식탁에 앉는 겁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너희 같은 사기꾼들에 대해 선지자 이사야가 정곡을 찔러 말했다.
이 사람들은 거창하게 말은 바로 하지만 그 속에 마음이 담겨 있지 않다.
그들은 나를 예배하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다.
무엇이든 자기네 구미에 맞는 가르침을 위해 내 이름을 팔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계명은 버린 채 최신 유행을 좇기에 바쁘다.” (막 7:6-8)
진심이 담겨 있지 않은 거창한 말, 진심에서 우러나지 않은 종교행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하는 왜곡된 가르침, 하나님의 계명을 자기 구미에 맞게 변형시켜 행하는 것… 모두 자기를 높이며 앞세우는 구부러진 마음에서 비롯된 사기꾼 짓이라 하십니다. 그 온유하신 예수님이 이 구부러진 마음에 대해서는 호되게 질책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마 23:25)

그들은 예수님에게 관심이 있었지만, 늘 예수님 주변을 궁시렁대며 서성거렸을 뿐, 그분에게서 하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정직한 모습으로 그분 앞에 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비교될 만한 내용이 요한복음 1장 후반부에 나옵니다. 어느날 예수님은 그분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한 사람을 보시며 말씀하십니다.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요 1:47) 그의 이름은 나다나엘, 친구 빌립의 권유를 받아 예수님을 보러 오는 길이었습니다.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 In whom there is nothing false” 이것은 그가 오류나 실수를 범하지 않는 사람이라든가, 마음 속에 악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 ‘간사한 것’으로 번역된 헬라어 dolos는 ‘사기, 교활, 허위’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말씀은, 이 나다나엘이 정직한 사람이라는 얘깁니다. 그의 마음에 구부러짐이 없다는 것, 그의 행위 이면에 내적인 동기가 순수하다는 것, 그 마음이 올곧게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빌립에게서 예수님 얘기를 듣고 나다나엘이 보인 첫 반응은 이것이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그가 그려왔던 메시야 그림에 나사렛 예수는 잘 들어맞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빌립을 따라 그 시골 청년 예수에게로 나아갑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그의 동기가 순수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옳음을 입증하는 것보다, 이전에 갖고 있던 틀을 지켜내는 것보다, 혹은 메시야를 통해 어떤 개인적 이득을 얻는 일보다, 구원의 하나님과의 만남 자체가 그에게는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메시야의 탄생지에 관한 그 선입견 쯤은 잠시 저만치 밀어둘 수 있을 만큼, 하나님을 향한 그의 마음의 길이 구부러짐 없이 똑바로 뻗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예수님은 이미 그 만남이 있기 전부터 이 진실한 청년에게 주목하고 계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고전8:3)
마음이 올곧게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통하는 게 있는 걸까요? 나다나엘은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님께 고백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임금이십니다!”
마침내 그는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우리의 젊은 자녀들이 하나님에 대해 의심을 표현하거나 곤혹스런 질문을 던질 때, 어른들 중에는 이를 심각하게 우려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물론 때로는 사실 별 관심도 없으면서 괜히 그런 식으로 반항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 의심이나 질문이 솔직하고 진지한 것이라면, 이는 그 젊은이 안에 하나님을 향한 관심이 있다는 뜻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그의 마음이 올곧게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습니다. “믿음은 의심을 포함한다” 신학자 폴 틸리히의 이 말을 저는 참 좋아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당신 자신을 보여 주시는가?

마태복음 11장에 기록된 예수님 말씀이 그 답을 암시합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마11:25-26)

구부러지지 않은 마음을 가진 사람, 하나님과 사람 앞에 솔직하고 정직하게 서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그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