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있는 사람 7: 화평하게 하는 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처럼 ‘화평케 하는 자’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첫째로, 가짜 평화를 분별하고 거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10장 34절 이하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다소 당황스럽고 선뜻 이해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오신 게 아니란 말인가? 예수님이 가족간에 불화를 일으키러 오셨단 말인가? 언뜻 보면, 오늘 본문 말씀과도 모순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예수님이 부정적으로 보시는 ‘화평’은 우리가 ‘참된 평화’의 길로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는 ‘가짜 평화’를 말합니다. 그저 충돌이나 다툼이 없는 상태, 속에서는 곪고 있어도 겉으론 괜찮다 하며 덮어만 두는 상태, 기존의 질서와 안정을 깨뜨리지 않는 걸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는 태도… 예수님은 그런 의미의 화평을 주러 오신 게 아니란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검을 주러 왔다고 하십니다. 어떤 역본에는, 세상에 검을 ‘던지러’ 왔다고 되어 있습니다. ‘검’은 살상용 무기로 사용되어 생명을 파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또한 ‘검’은 수술용 도구로 쓰여 생명을 살릴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분이 오신 목적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10:10)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은 그 말씀의 검으로 우리를 수술하여 살리고자 하십니다. 히브리서 4장 12-13절에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활자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예리한 수술도와 같아서, 우리 내면 깊은 곳을 파고들어 그 속에 숨은 동기와 내밀한 욕망을 건드리고, 거기 암덩이처럼 붙어 있는 추악한 것들을 빛 가운데로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그 ‘살리는 검’과 같은 하나님 말씀을 경험한 사람들은 이제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그럼에도, 이전과 똑같은 틀 안에서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어울리고, 적당히 문제 일으키지 않는 선에서, 하나님 말씀도 적당히 참고만 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향해 온전히 돌아서서 그 말씀을 따라 살 것인가?

후자를 선택한다는 건 자기 삶의 질서와 방향을 완전히 바꾼다는 뜻이며, 이는 이제껏 속해 있던 세계와의 충돌과 갈등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불의가 일상이 된 한 집단 안에서 소신껏 정의롭게 행하려는 신앙인은 다른 동료들과의 관계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동료들 입장에서는 그의 신앙적 행동이 그룹의 평화를 깨뜨리는 일로 인식될 것입니다. 또한 믿지 않는 가정에서 처음 예수님을 믿게 된 분들은 그 가족들과의 관계에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가족들 입장에서는 그의 신앙생활이 가정의 평화를 깨뜨리는 일로 인식될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이 모든 상황의 핵심은 ‘평화냐 불화냐’가 아닙니다. 그 구성원 모두에게 정말 필요한 평화가 ‘어떤 평화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적 의미의 평화, 즉 ‘샬롬’은 단순히 충돌이나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과 다른 모든 피조물, 그 상호간의 관계가 온전해짐으로 말미암아 함께 평화와 번영, 기쁨과 조화를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나와 내 가족만이 아니라, 나와 내 회사, 내 교회, 내 민족만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님 말씀 안에서 관계의 온전성을 회복하고 다함께 하나님 주시는 복을 누리는 것,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이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소망하며 추구하는 평화입니다. 예수님은 이 참된 평화를 이루기 위해 저 가짜 평화를 분별하고 거부하신 것이고, 우리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평화의 길도 바로 이 길입니다.

옛날 이스라엘이 미디안에 의해 압제받던 시절, 어느날 하나님은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을 부르며 말씀하십니다.

“너는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내노라” (삿6:14)

그리고 하나님은 그날 밤 기드온에게 매우 곤혹스런 일 하나를 시키십니다. 그의 아버지 소유의 바알의 제단을 헐고 그 곁의 아세라 상을 찍으라 하십니다. 기드온은 이 말씀에 순종하지만 두려워서 감히 낮에는 못하고 밤에 몰래 행합니다. 아침이 되니 마을이 시끄러워지고 기드온은 사람들의 추궁을 받습니다.
“바알과 아세라에게 이런 몹쓸 짓을 했으니 이제 어떻게 할거냐,
너를 죽여 신들의 노여움을 풀어야 우리 모두가 살겠다.”
하지만 그때 요아스가 나서서 아들을 변호합니다.
“바알이 과연 신이라면 그의 제단을 파괴했으니 그가 자신을 위해 다툴 것이다”
그 일로 인해 기드온에겐 별명 하나가 생깁니다. ‘여룹바알’ – ‘바알이 그와 더불어 다툴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기드온은 자의반 타의반 하나님의 편에 분명히 서는 사람이 되고, 마침내 그는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는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받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함으로 처음에 그는 마을의 평화를 깨뜨리는 자로 인식되었지만, 그의 그 믿음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이스라엘은 기존의 ‘가짜 평화’에서 벗어나 살아 계신 하나님 안에서 ‘참된 평화’를 맛볼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화평케 하는 자로 살기 우리에게 가장 먼저 요청되는 일은 현실의 가짜 평화를 분별하며 거부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실 땅으로 나아갔던 아브람처럼, 화평케 하는 자의 길은 하나님 말씀을 따라 그 가짜 평화의 보호권 밖으로 나가는 일에서 시작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