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있는 사람 8: 의를 위해 박해받은 자

<마태복음 5장 10-12절>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오늘은 팔복 중 마지막 여덟번째, 의를 위해 박해 받은 자의 복에 대해 살펴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이 말씀은 세 가지 면에서 지금까지의 예수님 말씀 전체를 마무리짓는 성격을 갖습니다. 먼저 여기 약속된 복은 ‘천국’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에 대한 첫번째 복과 같습니다. 처음과 끝에 나오는 이 ‘천국’이란 단어가 팔복 전체를 괄호로 묶고 있습니다. 이로써 다른 여섯 가지 축복 선언도 모두 이 천국의 복에 포괄됩니다.

애통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위로, 온유한 자에게 주어지는 땅,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주어지는 배부름, 긍휼히 여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긍휼히 여겨짐,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을 보는 눈, 화평하게 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어짐, 이 모두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천국에 속한 복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없는 복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 속하여 보이는 것을 따라 사는 이들은 누릴 수 없는 복이란 뜻입니다. 이 세상에 이미 들어와 보이지 않게 현존하는 하나님 나라를 믿음으로 바라보며, 그 나라를 먼저 구하며 사는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고, 소망할 수 있고, 또한 누릴 수 있는 복이라는 뜻입니다.

다음으로, ‘의’라는 단어가 다시 언급되고 있습니다. 앞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 이어 다시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전의 설교에서, ‘의’는 ‘하나님이 옳다 하시는 바’, ‘하나님 보시기에 마땅히 그러해야 할 모습’을 의미한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정의’란, ‘그 의를 위해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하는 행동들’을 말한다 하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여기 다시 언급되는 ‘의’는 예수님이 이 앞에 말씀하신 모든 내용들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심령의 가난함 속에서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그리고 그 은혜로운 하나님의 사랑의 통치 아래서 비로소 세상의 슬픔에 눈뜨고 참된 울음을 울 수 있게 되는 것, 비로소 온유한 마음으로 다른 이들을 넉넉히 품을 수 있게 되고, 비로소 진정 욕망해야 할 것을 바라며 구할 수 있게 되는 것. 또한 그처럼 새로운 세계에 속하여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가며, 비로소 고통 중에 있는 이에게 다가가 거기 함께 있어줄 수 있게 되는 것, 비로소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대할 수 있게 되고, 비로소 하나님의 평화를 제 마음에 품고 화평케 하는 자로 살 수 있게 되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말과 삶을 통해 계시된 ‘새로운 하나님의 의’의 내용이자, 이 여덟번째 축복 선언에서 ‘의’라는 단어가 내포하는 의미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박해’라는 단어에 주목합니다. 그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사는 삶은 천국이 약속된 복된 삶이지만, 또한 박해를 예고하는 고난의 삶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의로 가득찬 곳이라면 의인이 고난받을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경험적으로 이 세상이 그런 곳이 아니라는 걸 압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그리고 화평케 하는 자로 산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때로 손해와 박해를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만일 이 세상이 고통으로 가득찬 곳이 아니라면, 십자가의 길은 병적인 길일 것입니다. 그러나 굶주리고, 거처할 곳이 없고, 희망이 없는 사람이 수억에 이르는 이 세상에서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산다면, 그것이 병적인 삶일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고통이 한 사람의 삶을 파서 통로를 만들고 그 통로를 통해 영적 치유의 물결이 치유가 필요한 세상으로 흘러가도록 허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복은 현실의 모순과 고난을 피해가는 길에서 주어지는 복이 아니라, 그 모순과 고난의 현실을 끌어안고 살아내는 가운데 주어지는 역설의 복이라는 뜻입니다.

오늘은 이 세번째 요점에 대해 좀 더 초점을 맞춰 생각해보려 합니다. ‘박해’는 그 자체로 무조건 좋은 것도 아니고 무조건 나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이 ‘무엇을 위한’ 박해, ‘무엇으로 인한’ 박해냐가 중요합니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 때문에 삶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거면서, 마치 억울하게 박해받고 있다는 듯 행세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도, 십자가의 길을 가장한 자기 학대의 모습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타당한 십자가’와 ‘무효한 십자가’를 구별해야 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박해는 ‘의를 위하여 받는 박해’, 즉 ‘하나님이 옳다 하시는 바’를 우직하게 행하다 겪는 박해를 말합니다. 만약 누군가 그러한 박해를 받게 되면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의가 지배하는 하나님 나라에 그가 속해 있다는 증거이며, 예로부터 세상은 그런 하나님의 사람들을 그렇게 대해 왔기 때문입니다.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북이스라엘 아합 왕 때 활동했던 선지자 엘리야는 당시 종교인들과 백성들 대부분이 바알과 아세라 우상에 미혹된 상황 속에서 홀로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팔백오십 명과 대결하였고, 결국 여호와 하나님이 참 신이라는 것을 이스라엘에 증거합니다. 하지만 이 일로 왕후 이세벨은 엘리야를 죽이려 달려들고, 엘리야는 도망칩니다. 그렇게 도망자 신세가 되고 나니, 엘리야의 마음은 심하게 위축됩니다. 갈멜산에서 그리 담대하던 선지자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이제 거기에는 심각한 영적침체에 빠진 한 나약한 신앙인이 서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어 그를 세심하게 돌보시고 이끄셔서, 마침내 세미한 음성 가운데 그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며 다시 사명을 맡기십니다. 결국 엘리야에게 그 박해의 상황은 하나님을 더 깊이 체험하는 계기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