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있는 사람 8: 의를 위해 박해받은 자

실제로 초대교회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부터 이중적인 박해를 받았습니다. 유대교인들로부터는 이단적인 신성모독자들로 몰려 박해를 받았고, 로마인들로부터는 야만적이고 황제숭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성만찬을 사람 고기와 피를 먹는 야만적 종교예식으로 오해했으며, 그리스도인의 황제 숭배 거부는 로마에 대한 정치적인 반항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대다수 일반 대중에게 그리스도인이 박해를 받은 이유는 다른 데 있었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4절에서 베드로 사도는 이런 말을 합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즉, 향락과 방탕의 세상 풍조에 순응하거나 타협하지 않았던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삶, 그 구별된 삶의 모습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두려움과 비방의 이유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베드로는 박해의 상황에 있던 소아시아 그리스도인들에게 권면합니다.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벧전3:14-17)

2세기 초반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글에서, 우리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삶을 조금은 엿볼 수 있습니다.

디오그네투스께,
그리스도인은 나라나, 언어나, 전통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게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만의 도시에 사는 것도 아니고,

이상한 언어를 쓰는 것도 아니며, 특유한 삶을 사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각자 주어진 삶에 따라 그리스나 다른 이방 도시들에 흩어져 살고,
도시의 관습에 따라 옷을 입고 음식을 먹으며 삶을 영위합니다.
그들은 자기 조국에 살면서도 마치 나그네와 같습니다.
시민으로 모든 의무를 수행하지만, 외국인과 같이 모든 것을 참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결혼하여 아이를 가지지만, 아이를 버리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식탁은 공유하지만, 아내를 공유하지 않습니다.
육신을 입고 있지만, 육신을 따라 살지는 않습니다.
지상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들은 주어진 법에 순종하지만, 그들의 삶은 그 법을 초월합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지만, 사람들에 의해 박해를 받습니다.
그들은 가난하지만,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합니다.
그들은 능욕을 받을 때 능욕하는 자를 축복하고,
멸시를 당할 때 멸시하는 자를 존중합니다.
그들은 착한 일을 하는데도 죄인들처럼 벌을 받고,
벌을 받을 때는 생명을 얻는 것 같이 기뻐합니다.
그들은 유대인에 의해 공격받고 헬라인들에 의해 핍박받지만,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은 왜 그들을 미워하는지 모른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상황 속에서 의를 위해 박해 받는 삶을 산다는 건 무슨 뜻일까? 우리가 신앙을 갖고 교회 가서 예배 드린다는 이유로 박해할 사람은 없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의를 온전히 좇지 못하게 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서 벗어나게 하는 요인들은 우리 안팎에 은밀히 존재할 수 있고, 어쩌면 지금도 우리는 그것에 의해 심각하게 영향받고 있는 중인지도 모릅니다.

트라피스트회 수도사이자 20세기의 탁월한 영성가였던 토마스 머튼은 우리가 성령의 통로가 되고자 한다면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두 가지 환상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는,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분리시키고 서로에게서 분리시키는 ‘거짓 자아’입니다. 여기서 ‘거짓 자아’란, 교만과 가식으로 가득찬 자아, 자기 이익을 위해 남을 조종하려는 자아, 그런 식으로 자기 삶에서 모호함과 고통을 제하려고만 하고, 자기 안에 모순을 무시하거나 부인하려고만 하는 자아입니다. 우리가 진정 살고자 한다면, 이 거짓 자아는 죽어야 한다고 그는 말합니다.

한편,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두 번째 환상은, 우리가 품고 있는 세상에 대한 거짓된 관념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저기 밖에’ 있는 실체로 생각하곤 하지만, 실제로 세상은 우리 각자의 마음 속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그는 상기시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저기 밖에 있는 세상’에 대한 환상을 깨지 않으려 하는데, 이는 그런 환상이 우리에게 일종의 면죄부를 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흔히 우리는 “세상이 나를 그렇게 하도록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내게 하나님의 뜻에 충분히 반응할 자유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세상이라는 외적인 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그리 됐다 믿는 게 마음 편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머튼은 세상이 우리 안에 있으므로 우리는 세상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와 관련해 그는 우리에게 마태복음 10장 39절의 예수님 말씀을 다시 들려줍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의를 위하여 사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이 온 세상 모든 생명을 품고 사랑하시는 분임을 그냥 머리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알게 된 사람이 아닐까? 그래서 이 땅의 작고 힘없는 생명들, 바닥에 사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그들을 아끼고 보듬고, 또 그들과 함께하려 애쓰는 사람이 아닐까? 그들을 외면하고는 결코 하나님의 의를 말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나의 편안함만 생각하지 않는 마음, 내 삶의 매끈함만 추구하지 않는 마음, 길 잃은 어린 양 한 마리를 차마 버리지 못하는 마음, 그래서 그 하나를 찾아 위험과 어둠을 마다않고 산길로 접어드는 마음, 그것이 예수님 마음이고, 그것이 의에 헌신된 사람의 마음이 아닐까?

내 마음이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한 사람에게 집중하려 하기보다, 저 멀리 어딘가에 있을 듯한 미지의 하나님 나라를 향해 달려가려 할 때마다, 제가 떠올리곤 하는 시편 말씀이 있습니다. 시편 131편입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내 안에 먼저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바로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나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지 못하는 한, 과연 우리는 다른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 나라를 한발짝이라도 진척시킬 수 있을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모든 관심이 ‘이해관계’에 집중되는 세상입니다. 평소에 의를 중히 여기던 사람도 일단 자기 이익과 부딪히게 되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또한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하는 세상이며 과정과 절차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세상 물정 모른 사람으로 취급받곤 합니다.

누구도 ‘힘이 곧 정의’라 말하진 않지만 누구도 그 말을 부정하지 않는 현실에서 힘없는 이들 편에 서서 말하는 사람은 위험한 사람으로 낙인찍히고, 그에게 예비된 것은 모욕과 비웃음, 손해와 박해인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속에서 다시 ‘의를 위해 박해 받는 삶’을 말합니다.
뭘 몰라 순진해서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진리는 변하지 않음을 믿기 때문이고, 십자가 뒤에 부활이 있다는 것과, 그 부활의 아침은 십자가의 밤을 지난 후 맞을 수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제, 오늘 말씀을 다시금 음미하며 설교를 마치려 합니다. 의를 위하여 살고자 하십니까?
그렇다면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계속 그렇게 살고자 하십니까?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것이 복된 삶의 길입니다. 앞서 살았던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다 그 길을 갔습니다. 우리 주님도 그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러니 살면서 그런 일을 겪게 된다면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오! 하나님의 나라가 당신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늘 함께하실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