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22년 1월 9일)
- 마가복음 1장 14-20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부르심을 따라 순종의 한 걸음을 - 막1,14-20.docx
<마가복음 1:14-20>
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16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19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새해 성도 여러분과 늘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은 지난 송구영신예배 때 전했던 말씀을 조금 보완해서 다시 한번 전합니다. 올해 우리 개인과 공동체를 향한 주님의 음성에 함께 귀기울이기 원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사람을 부르시는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부르시고, 모세를 부르시고, 또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자손을 자기 백성으로 부르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기드온을 부르시고, 사무엘을 부르시고, 다윗을 부르셨습니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많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이 부르심의 사건과 함께 시작됩니다.
신약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은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어부였던 시몬과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시고, 세관에 앉아 있던 레위, 즉 마태를 부르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나무 위에 올라가 있던 삭개오를 부르시고, 맹인 거지 바디매오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후에는, 예수 믿는 자들을 열심으로 박해하던 청년 사울을 불러 바울이 되게 하십니다.
아브람이 하란에 있을 때 하나님은 그를 부르셔서 거기를 떠나 후에 보여주실 땅으로 가라 하셨습니다. 아브람은 이 부르심에 순종하여 길을 떠났고,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그 땅과 자손에 대한 약속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는데, 이 약속은 그의 혈통적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 신앙적 후손인 오늘의 우리에게까지 미치는 영적 유산임을 생각할 때, 그날에 하나님이 아브람을 부르신 사건과, 아브람이 그 부르심에 순종한 사건이 갖는 의미와 무게는 실로 엄청난 것이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부르셔서 그분의 뜻을 이루시고, 동시에 그 사람을 그에 합당한 모습으로 빚어가십니다. 미디안 사람들이 두려워 몰래 포도주 틀에 숨어 밀을 타작하고 있던 기드온에게 여호와의 사자는 말합니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삿6:12,14) ‘큰 용사’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던 기드온을 그렇게 부르시며 사명을 맡기신 하나님은 이후 그를 실제 그런 모습으로 빚어가시며 그를 통해 그분의 구원을 나타내십니다.
시몬 베드로의 경우도 마찬가지죠. 어부 시몬을 제자로 부르실 때, 이미 예수님은 그에게서 ‘베드로’를 보셨습니다(요1:42). ‘베드로’는 바위, 반석이란 뜻이죠.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마16:18) 후에 그가 초기 교회사에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어떻게 쓰임받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의 우리도 부르실까요? 물론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는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은 ‘구원’과 거의 같은 의미를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사람을 그분에게로 부르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입니다. ‘교회’를 뜻하는 헬라어 ‘에클레시아’는 ‘불러 내어진’(called out) 사람들, 즉 하나님께 부름받은 하나님 백성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 가지 부르심이 나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라’는 부르심입니다. 본문 15절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또 하나는 ‘예수님을 따르라’는 부르심입니다. 본문 17절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이 두 부르심은 같은 것일까요, 다른 것일까요? 사람들 사이에 생각의 차이가 존재할 수 있지만,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예수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인식한 사람이 그 뒤에 가는 길은 예수님을 따르는 길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은 사람이 어찌 그분이 부르시는 길로 가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은 경외심을 불러일으키시는 분이요, 그분의 소환은 너무나 강력한 명령이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오직 한 가지 반응만이 합당하다, 그것은 순종이다!
그리스도인들 중 특별한 소수만이 ‘예수님을 따르라’는 명령을 듣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진지하게 듣고 반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분을 따르라는 부르심도 함께 듣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 기록된 초기 제자들의 이야기는 어떤 특별하고 예외적인 사건의 기록이라기보다는,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또한 앞으로도, 주님의 부르심을 듣는 사람들이 그분 앞에서 보이는 전형적인 반응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유대인들의 삶은 암울했습니다. 그들이 간절히 기대하던 것은 이방 민족들의 압제에서 해방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시대 사람들에게 진정 필요했던 것은 ‘가난한 마음’이었습니다. 정치력도 경제력도 군사력도 종교력도 아니라, 다만 가난한 마음,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통해 그들에게 주시려는 것을 사모하며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잘 듣고, 그 부르시는 길로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이 시대라고 다를까요? 2022년 올해는 우리가 이 코로나 상황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 있을까요?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그리 된다 한들 과연 우리 삶이 전보다 더 나아질 수 있을까요? 우리 인생에 결정적인 순간은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이 순간도, 코로나 위기가 끝나는 그 순간도 아닐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이 들려오는 순간, 그 부르심에 반응하며 따라나서는 순간, 그리하여 그분의 뜻이 성취되는 순간, 바로 그 순간들이 카이로스, 무르익은 하나님의 시간일 것입니다.
<소명(The Call)>이란 제목의 책에서 오스 기니스는 ‘소명’(calling), 즉 ‘부르심’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소명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그분께로 부르셨기에, 우리의 존재 전체, 우리의 행위 전체, 우리의 소유 전체가 특별한 헌신과 역동성으로 그분의 소환에 응답하여 그분을 섬기는 데 투자된다는 진리이다.” 풀어 말하자면, 우리의 존재와 행위와 소유 전체를 들여 따르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권위있는 진리로 다가오는 하나님의 부르심, 그것이 소명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갈릴리 해변을 지나시던 예수님이 어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그러자 그들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그들도 부르시니, 그들이 아버지를 배에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그분의 약속과 묶여 있습니다. 주님의 약속은 우리가 나아가야 할 목적지(goal)를 가리키고, 주님의 명령은 우리가 거기 이를 수 있게 하는 길(way)을 가리킵니다. 그 명령이 이끄는 길을 따라 움직여 마침내 그 약속이 성취되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 거기서 우리가 경험하게 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아브람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던 것처럼, 제자들도 그들의 미래를 다 알고 주님을 따랐던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명령을 따라 그들은 ‘따랐고’, 결국 그 약속을 따라 그들은 ‘되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 생업과 가족을 버려 두고 따랐다’는 얘기는 그리 좋게 보이지 않을 확률이 높습니다. 이단 사이비 종파에 빠진 사람들의 폐해를 떠올리기도 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부모에 대한 의무나 가족의 중요성을 하찮게 여기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할 일 했다고 부모에 대한 의무를 잘도 저버리는 사람들의 위선을 책망하시는 내용이 마가복음 7장에 나옵니다. 제자 시몬의 집에 가셔서 그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시는 내용이 오늘 본문 바로 뒷쪽에 나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누군가에게 단호한 결단과 순종을 요구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사람 속에 믿음을 불러일으키고자 하실 때입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그 사람을 제자로 부르실 때입니다. 누가복음 9장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61-62)
이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 사이의 긴밀한 연관성을 보여줄 뿐 아니라,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분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마음자세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가족중심주의, 가정우선주의의 틀 속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판단하려는 사람은 낭패를 볼 것입니다. 반면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그 즉시 지금 있는 자리에서 나와 예수님 안에서 더 큰 진리와 만난 사람은 내 가족과 내 주위 사람들을 더 온전히 사랑하며 섬길 수 있을 것입니다.
이단 사이비의 문제는 그들이 한 사람의 전체를 요구한다는 사실에 있지 않습니다. 그들의 요구가 진리로부터의 요구가 아니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진리, 우리 주님의 부르심은 분명 우리의 전체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수님이 우리의 전체를 요구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일부만이 아니라 우리의 전체를 온전케 하시기 위함입니다.
바로 이것이, ‘버려 두고 간 그물’, ‘버려 두고 간 아버지’가 본문에 언급되고 있는 이유일 것입니다. 그냥 “따르니라” 해도 될 것을, 본 사건을 기록한 복음서 기자들은 왜 모두, 그 어부들이 그 순간 거기 “버려 두고” 간 것을 굳이 언급하려 한 것일까? 그것이 ‘제자도’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부르심에 대한 합당한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참된 신앙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나를 따르라>는 제목의 책에서 ‘따르라’와 ‘따르다’의 관계를 천착합니다. ‘부르심’과 ‘순종’의 관계라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에 따르면 이 둘은 그 사이에 아무것도 개입될 수 없는 직접 관계입니다. 부름받은 자는 따르는데, 이는 부르신 이가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간다 함은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딘 것을 뜻하고, 이 한 발자국은 예견과 예측이 가능한 현상태에서 떠나 전혀 헤아릴 수 없는 미지의 땅으로 옮겨가는 것을 뜻하는데, 이 첫 발걸음이 그 따르는 자에게 믿게 하는 환경과 자세를 선사한다고 그는 말합니다. 따라오라는 부름을 받은 요한이 그럼에도 계속 그 배에 앉아 아버지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면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믿기 위해 그에게는 먼저 순종의 첫걸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불순종을 고집하고 제일보를 보류하는 한, 신앙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믿는가? 그러면 대담하게 한걸음 내디뎌라! 예수 그리스도가 너를 반드시 인도할 것이다. 믿지 않는가? 그래도 한걸음 떼어놓아라! 이것은 명령이다.” 믿게 하는 상태는 이미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만들어야 비로소 있을 것이란 얘깁니다. 첫 발걸음을 떼는 순간에 모든 것은 제자리를 잡는다, 그러므로 도피처에서, 스스로 구축한 은신처에서 나와야 한다, 밖으로 나와야 비로소 편견 없이 보고 듣고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우리를 새로운 땅, 하나님이 예비하신 더 나은 곳으로 인도합니다. 아니, 주님의 부르심만이 우리를 거기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믿음은 고양되고, 그 길의 끝, 마침내 그분의 약속이 성취되는 지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르심과 순종을 따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순종은 주님의 부르심에 대한 순종이어야 합니다. 순종이 중요하지만, 그것이 주님의 부르심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면, 그 순종은 잘못된 방향으로 전개되기 쉽습니다. 순종 이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의 부르심을 바르게 듣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의 부르심을 듣는 일이 중요하지만, 그 들음이 순종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우리 삶 속에서 믿음의 능력, 하나님의 역사는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들은 자는 그 즉시 순종의 첫걸음을 떼어야 합니다.
2022년 새해는 우리 모두가 주님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며 따라가는 한 해가 되면 좋겠습니다. “부르심을 따라 순종의 한 걸음을!” 이것을 올해 우리 공동체 표어로 제시합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말씀의 시냇가에 서는 삶’을 계속 노력하면서, 그 말씀이 우리의 신앙과 삶에 실제적으로 영향을 미치도록 함께 힘쓰는 한 해가 되길 바랍니다.
소명, 즉 부르심은 우리 인생의 목적과 관련되는 문제이며, 우리의 정체성, 재능, 믿음, 책임, 비전 등과도 복합적으로 연관되는 문제입니다. 올해 우리는 부르심에 관한 이런 여러 이슈들을 다각도로 살펴보는 기회를 가질 것입니다.
실로 그리스도인의 인생은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가는 여정이며, 이미 도달한 자로서가 아니라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는 자로서,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여정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시작되고 또한 하나님에게서 마무리될 것입니다.
에베소서에서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1:17-19)
그리고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5:24)
2022년 새해,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순종의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기 원하는 모든 주의 백성들, 그리고 올해 교회봉사자로 임명받은 모든 주의 종들에게, 미쁘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은혜로 늘 함께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우리에게 새해, 새 시간, 새 기회를 주심에 감사합니다. 올 한 해 우리 삶의 모든 걸음을 주님께 의탁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귀기울이며 순종의 첫걸음을 떼는 우리 삶의 순간순간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