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이 있음을 믿는다면

<고린도전서 15:16-20>

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은 부활절이 시작되는 부활주일입니다. 아시다시피, 부활절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을 기념하고 경축하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이천 년 전 팔레스틴에서 시작된 기독교 운동이 이토록 오랫동안 광범위하게 뻗어나갈 순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주일’이란 개념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이 아닌 그 다음날, 즉 ‘안식 후 첫날’에 모여 예배하고 교제하게 된 것은 그 날에 있었던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고 경축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주일은 ‘작은 부활절’이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목격한 증인들을 통해 전파되었습니다. 소위 ‘부활장’이라 불리는 고린도전서 15장을 바울은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1-8)

바울은 그가 전해 받은 ‘복음’의 핵심 중 하나로 예수 ‘부활’을 말합니다. ‘성경대로’라는 말이 두 번 나오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도, 또한 그분의 부활도, 구약성경의 예언을 따라 일어난 일이란 뜻입니다. 또한 ‘보이셨다’는 말이 네 번 나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 그 부활체를 직접 본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가 쓰여진 AD 55년경, 그 증인들 중 일부는 ‘잠들었다’, 즉 죽었지만, 아직 그들 중 대다수가 살아 있었다 합니다.

이후 AD 64~70년경에 쓰여진 마가복음을 시작으로 예수님의 생애를 다룬 복음서들이 하나 둘 쓰여지면서, 사람들은 그 첫 부활의 날에 있었던 일을 보다 생생히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네 명의 복음서 저자 모두가 그 부활의 첫 증인들이 여인들이었음을 말합니다. 그 여인들이 정확히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는 복음서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이는 각 저자들이 확보한 당대의 자료와 전승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라 하고, 마가복음에서는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라 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이 중 ‘살로메’ 대신 ‘요안나’라는 이름이 등장하고, 요한복음에서는 오직 ‘막달라 마리아’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 오늘날로 치면 주일 아침에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갑니다. 마가와 누가는 그들이 거기 간 목적을 밝힙니다. 예수님의 시체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가면서도 그들은 그것이 헛걸음이 될 수도 있음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장사된 무덤은 바위에 판 굴무덤이었는데, 그 무덤 입구가 큰 돌로 막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이 말을 주고받으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들은 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 무덤 앞에는 시체 도난을 막기 위해 세워둔 경비병들도 있었다고 마태는 기록합니다.

그런데 여인들이 막상 도착해보니 문제는 그 돌이 아니었습니다. 돌은 이미 굴려져 있었습니다. 네 명의 복음서 저자가 공통되게 이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그 거대한 돌을 굴렸는가? 이에 대해서는 오직 마태만이 자세한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하늘로부터 내려온 천사가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여인들이 무덤 안에 들어가 볼 수 있도록 그처럼 모든 방해요인들을 제거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이후 여인들은 무덤 안에 예수님의 시체가 없음을 확인합니다. 이 사실을 확인하고 그 의미를 깨닫게 되는 과정을 묘사하는 데 있어 복음서들간에 차이가 존재합니다. 마태는 그녀들이 무덤에 들어가기 전에 천사의 말을 통해 그 사실과 의미를 듣는 것으로 보고합니다.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마28:5-6)

마가는 그녀들이 무덤에 들어갔을 때 거기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앉아 있었고, 천사로 추정되는 그 청년을 통해 모든 걸 듣고 보고 알게 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막16:6)

누가의 기록은 또 조금 다른데, 돌이 옮겨진 것을 보고 무덤 안에 들어간 여인들은 거기 예수님의 시체가 없는 것을 보고 당황합니다. 그때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말합니다.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눅24:5-7)

요한의 기록은 독특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바로 시체 도난을 의심하며 베드로와 요한에게로 달려갑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바로 무덤으로 달려가 보니, 예수님의 시신이 뉘어 있던 곳에 시체는 없고 세마포, 즉 수의만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특유의 탐정다운 명민함으로 거기서 사소해 보이지만 중요한 단서 하나를 포착합니다.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는 것을 봅니다. 이로써 그는 예수님의 무덤은 도굴된 게 아니라는 것을 추론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시체를 훔치는 자들이 수건을 일부러 풀었을 리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결론엔 이르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갑니다.

한편 막달라 마리아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다가, 무덤 안 예수님의 시체 뉘었던 자리에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얼핏 누군지 모를 남자 하나를 보지만 필시 동산지기일 거라 짐작합니다. 하지만 그는 동산지기가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이었습니다. “마리아야!” 그분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그녀는 그분이 예수님인 것을 알아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녀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요20:17) 그 말을 들은 마리아는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주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전합니다.

마태복음 역시 여인들이 다른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가는 길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마28:8-10)

이후 예수님은 제자들이 모인 곳에 나타나셔서 부활하신 그분의 몸을 직접 보여주십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그날 제자들은 두려움 가운데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아 걸고 있었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런 물리적 장벽에 아무 구애받지 않으시고 그들 가운데로 오셨습니다(요20:19). 누가는 그 모습을 본 제자들이 놀람과 무서움 속에 그 보는 것을 유령으로 생각했다고 기록합니다(눅24:37). 그러자 예수님은 못 자국과 창 자국이 있는 그분의 손과 발과 옆구리를 보여주시고, 심지어 구운 생선 한 토막을 그들 앞에서 잡수시며, 그분이 살과 뼈가 없는 유령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가 새 몸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이심을 나타내십니다.

이처럼 제자들은 처음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또 그분의 깨닫게 하심을 통해 비로소 눈이 열리면서, 이후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능력있는 증인들로 변모합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담대히 설교합니다: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내 말을 들으시오.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분명히 보여주시려고 여러분이 보는 앞에서 그분을 통하여 여러가지 기적과 놀라운 일과 표징을 나타내셨습니다. 이 사실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뜻과 계획에 따라 여러분의 손에 넘어간 이 예수를 여러분은 악인들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되살리시고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죽음의 세력에 사로잡혀 계실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온 백성은 분명히 알아두시오.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이 예수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주님이 되게 하셨고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행2:22-24,36)

예수님의 부활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분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인이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그 아래  있던 로마 백부장은 고백합니다: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눅23:47) 바울은 로마서 1장 4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예수님의 부활은 그를 믿는 자들의 삶을 새롭게 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3절 이하에 말씀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1:3-5)

또한 예수님의 부활은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의 미래를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 16절에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 그러니 죽은 자의 부활은 있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은 있다. 그러니 그리스도께서도 부활하신 것이다”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예수님의 부활은 오직 그분에게만 단 한번 일어나고 끝날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후에 일어날 다른 부활, 즉 우리들의 부활을 예고하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 몸에 그리스도의 흔적을 지니고 있는 다른 모든 의인들의 부활, 그것이 반드시 있을 것임을 보증하듯 예고하는 첫 부활 사건이 바로 예수 부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본문 20절에서 더 명료하게 진술합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치고 잠자다가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에 새 몸을 입고 부활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이 이전에 지니고 있던 몸과 연속성과 비연속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던 것처럼, 우리가 후에 입을 부활체도 지금의 몸과 연속성과 비연속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을 것입니다. 그 새 몸은 이전의 몸과 분명 다를 것이나, 이 땅에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라 살았던 흔적들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영광스런 새 몸일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5절 이하에서 바울은 그날에 우리가 어떤 새 몸을 입게 될지 지금 여기서 다 알 수는 없으나, 모두가 같은 몸을 입지는 않을 것이고, 각 몸의 영광이 다를 것이라 말합니다.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고전15:35-37)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삶은 마치 믿음으로 씨앗을 심는 일과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씨앗을 심을 때, 심을 당시는 그저 작은 알갱이를 심을 뿐입니다. 그것만 봐서는 후에 그 씨앗이 어떤 형체, 어떤 몸을 입을지 알 수 없습니다. 그 심긴 씨앗이 어떤 씨앗이었는지는 그것이 땅 속에서 죽고 후에 다른 몸으로 모습을 드러낼 때에야 비로소 분명해집니다. 우리의 옛 몸과 새 몸의 관계도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이 몸으로 심은 씨앗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에 걸맞는 새 몸, 새 형체를 그날에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시리라는 것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전15:42-44,54)

우리가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빛 속에서 볼 때, 우리를 최종적인 승리와 영광으로 이끌어줄 삶의 길은 십자가를 지나 부활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따라 십자가의 길을 가는 사람만큼 불쌍한 사람이 또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 즉 그리스도를 믿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은 망한 인생일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기초하며,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생명과 능력도 이 부활의 복음에 기초합니다.

히브리서 11장 3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우리 앞에 살다간 수많은 무명의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서 부활신앙이 얼마나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일 것입니다.

이 부활신앙에 기초해 골로새서에서 바울은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3:1-4)

여기 ‘위의 것을 찾으라’는 말을 NIV 영어성경은 ‘set your minds on things above’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땅의 것들에 마음 두지 말고 위의 것, 곧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속한 생명과 영광에 마음을 고정하고 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중요치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 눈에 숨겨진 것들이 보이는 형체로 다 드러날 그 날, 그 나라에 마음을 고정하고 오늘을 살아야만, 우리에게 허락된 이 땅에서의 삶을 후회없이 복되게 살 수 있으리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부활에 관한 긴 장을 마무리하며 성도들에게 권면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15:57-5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분이 또한 우리 위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 복음을 오늘 다시 여러분에게 전합니다.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듯 우리도 부활할 것입니다. 이 믿음, 이 소망이 우리의 구원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위의 것에 마음을 고정하고 사십시오! 이 땅에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라 행하는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흔들림없이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부활신앙 안에서 담대히 주님의 길을 따르며 영광스런 부활에 이르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