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21년 7월 18일)
- 마태복음 5장 13-16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산 위에 있는 동네 - 마5,13-16.docx
<마태복음 5:13-16>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그분의 말씀을 듣고자 나아온 제자공동체에게 하신 말씀이고, 또한 오늘의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라 하십니다. 무슨 뜻일까요? 소금은 썩지 않게 하는 역할과 더불어 맛을 내는 역할을 합니다. 아무리 좋은 재료가 많이 들어갔어도 간이 맞지 않으면 음식이 맛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어도, 아무리 많은 것을 이루며 살아도, 정말 있어야 할 것 한 가지가 없어서 사는 맛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란 말씀은 세상에서 우리가 이 소금의 역할을 하면 좋겠다는 말씀일 것입니다. 소금과 같이 맛을 내는 존재, 더불어 사는 사람들에게 사는 맛을 느끼게 해주는 존재, 그들에게 하나님의 맛을 알게 하고, 하나님 나라 사는 맛을 알게 해주는 존재 말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그런 사람들이 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오늘의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될 수 있을까요?
삭개오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삭개오는 세리였고 부자였죠. 하지만 마음 속에 채워지지 않는 갈망, 빈 자리가 있었습니다. 사는 맛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죠.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궁금했어요. 보러 갔습니다. 사람이 많고 키가 작아 볼 수 없었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앞서 가서 나무에 올라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그곳이 이르신 예수님이 그를 쳐다 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리라”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했습니다. 사람들은 수군거렸습니다. “어떻게 저런 죄인의 집에 들어가실 수 있지?” 그 예수님과의 만남과 교제 속에서 삭개오는 변화되었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누가 시켜서 할 말이 아니라 스스로 한 말이었습니다. 괴로이 한 말이 아니라 즐거이 한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한 일은 그저 그의 집에 들어가신 것 뿐인데, 그 받아들여짐의 경험 속에서 삭개오 마음 속의 빈 자리가 채워졌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도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예수님도 기뻐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바로 그 일을 위해 그분은 이 땅에 오셨으니까요.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 된다는 것은 이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산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더불어 사는 사람들에게 참으로 사는 맛을 느끼게 해주고, 심령이 가난한 자들, 마음 속에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가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맛, 하나님 나라 사는 맛을 알게 해주는 삶 말입니다.
오늘의 우리는 이 세상의 소금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을까요? 우리에게 ‘짠 맛’, 삶에 풍미를 더하는 맛이 있습니까? 우리 속에 누군가를 위한 공간이 있습니까? 맛 잃은 소금의 운명에 대해 예수님은 미리 경고하셨습니다.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또한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의 빛이라’ 하십니다.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존재로 우리를 부르신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는 비결과 근거는 오직 하나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에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교회는 빛이신 예수님을 따를 때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 공동체인 교회는 ‘산 위에 있는 동네’와 같습니다. 숨겨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잘 하든 못 하든 그 모습이 사람들 눈에 띄기 마련이라는 뜻입니다. 이를 좀 어려운 말로 ‘교회의 공공성’이라 표현할 수도 있겠습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욕한다고 뭐라 할 일이 아닙니다. 잘 못하면 욕 먹어야 합니다. 교회는 결코 자기들만을 위한 사적인 집단이 될 수 없습니다. 또 그래서도 안 됩니다. 교회는 좋든 싫든 공적인(public) 성격을 띠고 이 땅에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이 산 위에 있는 동네와 같은 교회가 어떻게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될 수 있을까요? 삶입니다! 복음에 입각한 삶입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다스림을 받는 삶,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 말씀은 교회가 자기를 세상에 과시해야 한다는 뜻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알고 믿는 대로 행하며 살아라, 무늬만 그리스도인으로 살지 말아라, 이런 뜻으로 제게는 이해됩니다.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둔다는 것은 불을 켠 다음 그것을 큰 그릇으로 덮어둔다는 뜻입니다. 그럼 빛이 비칠 수 없겠죠. 우리가 믿는다 말하며 행하지 않을 때 나타나는 결과도 동일합니다. ‘그릇 아래 가려진 빛’이나 ‘맛 잃은 소금’이 의미하는 바는 같습니다. 삶으로 실천되지 않는 신앙, 세상과 다르지 않은 교회, 아무 빛도 발하지 못하는 적막한 산 위의 동네.
교회는 세상을 향해 날 좀 봐주십시오 간청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케팅 전략을 써서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모으려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이 세상의 눈에 너무나 이질적이고 독특한 것이어서, 우리가 그 복음을 따라 잘 살기만 하면 그 모습이 사람들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그런 모습 속에서 빛을 발견한 사람들은 그 빛을 향해 나아올 것입니다.
16절에서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복음을 전하는 사명과 관련해 예수님은 언제까지 몇 명을 전도하라는 식으로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시며 그분이 하신 말씀은 다만 이것이었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내 증인이 되어라!”(행1:8)
그러므로 그 교회가 진정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는가 판별하는 기준은 ‘그 안에 사람이 몇 명이 있는가’가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예수님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가’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교회가 수적으로 성장한다고 할 때 그 사실이 말해주는 것은 다만 이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그 교회가 제공하는 것에 끌리고 있다. 그들이 어떤 것에 끌리고 있는지, 그 교회가 실제 제공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 교회가 진정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잘 증거하는 교회이기에 사람들이 거기에 끌리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욕망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편안함을 느끼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이어서 사람들이 거기 많이 몰리는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교회가 참되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길은 간단합니다. 참으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의 사회적 삶이 어떤 모습인가를 나타내는 일종의 가시적 대안-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 무엇이며, 하나님이 초대하시는 곳이 어떤 곳인가를 빛으로 밝혀주는 산 위의 동네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을 위해 세상과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 그것이 교회가 참되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지난 주일에는 교회가 실천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경제’에 대해 조금 말씀드렸고, 오늘은 교회가 실천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정치’에 대해 또 조금 말씀드리려 합니다.
일반적으로 정치는 “사회구성원들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거나 통제하고 국가의 정책과 목적을 실현시키는 일”(국어사전)로 정의되는데, 사실 정치는 보다 광범위한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조직적으로 더불어 살아가느냐, 결정이 어떻게 내려지고 어떻게 실행되느냐, 일이 어떻게 조직되고 결과물이 어떻게 공유되느냐, 누가 공간과 땅을 통제하고 이동의 자유를 통제하느냐, 사람들의 위계가 어떻게 정해지느냐, 발생한 잘못이 어떻게 처리되느냐”(요더) 이 모든 것이 사실 정치적(political) 사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 역시 사람들이 조직적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이므로, 이런 의미의 정치에서 무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정치는 세상의 일이고 교회는 영적인 일에만 관여한다 말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정치’와 ‘정치 아닌 것’ 사이의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바른 정치’와 ‘바르지 않은 정치’ 사이의 선택의 문제입니다.
한동안 전 아무개 목사가 태극기부대를 앞세우고 한국 정치의 전면에 나섰습니다. 그는 신학자 본회퍼를 입에 올리며 기독교인들이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함을 역설했습니다.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정치와 무관하지 않음을 주장한 점에서는 그의 말이 옳다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문제는 정치를 실천하는 방식이 전혀 크리스찬답지 않았다는 점에 있었습니다. 그는 철저히 이 세상의 틀 속에서, 이 세상의 방식으로 움직였습니다.
교회는 세상이 아닙니다.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모습으로 존재하도록 부름받은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정치 활동은 이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 복음의 가치를 따라 실천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정치는 세상을 향한 복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정치는 포용과 화해의 정치입니다. 세례는 이 하나님 나라의 정치가 실천되는 방식 중 하나입니다. 한 사람이 세례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에 받아들여질 때, 그가 어느 나라 사람이고, 피부색이 어떻고, 성별이나 계층이 어떠한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과거에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바르고 진실한 신앙고백뿐입니다.
세례를 통해 사람들 사이를 가르던 이전의 모든 사회적 경계들과 차이들은 상대화됩니다. 부인되거나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화됩니다. 유대인은 여전히 유대인으로 있고, 헬라인은 여전히 헬라인으로 있지만, 이제 그런 인종적 차이가 그들의 관계성을 규정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지 못합니다.
“거기에는 헬라인이냐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골1:11) 이 말이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고대 사회 속에서 얼마나 혁명적인 말이었을지 상상해보십시오. 당시 교회는 당시 세상 속에서 그야말로 혁명적인 정치가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포용과 화해의 정치로서의 세례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자명한 확신에 기초해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적대과 배제의 장벽을 허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 사역에 기초합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나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엡2:13-16)
따라서 세례를 통해 강조되는 것은 개인의 특권이나 권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나의 존재와 삶이 다른 사람들을 향해 열려 있게 하는 새로운 정체성을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이 세례를 통해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세계로 들어갑니다.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어느 교회에서 회의 중에 교회건물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그러자 한 사람이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휠체어를 타고 우리 교회 오는 사람이 없잖아요! 그런데 왜 우리가 이 문제를 논의해야 하죠?” 하지만 그 말이 그의 입에서 떨어지자마자 그 방에 있던 사람들에게 놀라운 깨달음이 임했습니다. “아마도 그게 이유겠군요”, 그 중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이제껏 그 교회는 휠체어를 탄 사람이 오기 힘든 교회였다는 것과, 그래서 그 교회에 휠체어를 탄 사람이 없는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그들은 깨달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 안에는 이처럼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기 원하는 사람들이 들어오는 걸 막는 방해요인이 있지 않은지요? 교회가 무엇보다 힘써야 할 일은 우리 공동체 안에, 그리고 우리 마음 안에 있는 그 방해요인들을 제거해나가며, 사람들이 이 교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참으로 맛볼 수 있도록 돕는 일일 것입니다.
우리 꼬빌리시교회가 다민족교회로 형성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이지 슈토렉 목사님이 내세웠던 구호 중 하나가 ‘문턱이 없는 교회’였다고 합니다. ‘문턱이 없는 교회’란 어떤 교회를 말하는 걸까요? 저는 이 말 속에 담긴 심오한 뜻을 최근에야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말이기도 해서, 좀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교회는 세상이 제시하는 틀 속에 자신을 위치짓고, 그 틀 속에서 자신을 형성하며, 그 틀 속에서 자신의 우월성과 유용성을 선전하고, 그 세상의 틀 속에 계속 있기 원하는 사람들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도록 부름받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틀 속에 자신을 위치짓고, 그 틀 속에서 자신을 형성하며, 그 틀 속에서 자신의 독특함과 온전함을 드러내고, 그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질서 안으로 들어오기 원하는 사람들이 방해받지 않고 들어올 수 있게 하는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한편으로 교회는 이 세상과 다른 하나님 나라의 속성을 인식하고 그 나라에 들어오기 원하는 마음을 품은 모든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문턱이 없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들이 세상의 기준에 의해 차별받거나 배척되거나 방해받지 않고 들어와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교회는 이 세상과 다른 하나님 나라의 속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저 세상의 틀 속에서 교회를 통한 수지타산만을 따지는 사람들에겐 ‘문턱이 높은 교회’로 존재해야 합니다. 그들이 세상의 기준을 따라 보았을 때 별로 매력이 없고, 득될 것도 없으며, 그저 불편해 보이기만 하는 교회라면 성공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문턱이 없는 교회’란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교회, 하지만 누구나 들어오고 싶지는 않은 교회라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예수님은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 하셨는데, 이는 부자라서 하나님 나라에 초청받지 못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하나님 나라, 문턱이 없는 하나님 나라, 이 세상의 질서를 뒤집어엎는 하나님 나라의 그 속성 자체가 이 세상에서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그것을 계속 유지하기 원하는 사람들에겐 매력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그럼 누가 교회 오려 하겠습니까?” 질문할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제자들도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그럼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눅18:27)
하나님의 나라는 심령이 가난한 자들의 것입니다. 물론 그 마음이 지금 다른 것들로 가득차 있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은 그분의 일을 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가 굳이 그들을 생각해서 쓸 데 없이 교회의 교회다움을 포기할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백성, 교회, 바로 우리들을 주님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도록 부르셨습니다. 교회는 산 위에 있는 동네입니다. 숨겨질 수 없습니다. 교회가 세상에 소금과 빛이 되는 길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의 사회적 삶이 어떤 모습인가를 나타내는 공동체, 삶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증거하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 사명을 함께 감당해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불러주시고 세상에서 소금과 빛이 되는 사명을 맡겨주심에 감사합니다. 산 위에 있는 동네처럼 숨겨질 수 없는 우리들이 예수님의 길을 따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 함께 잘 증거하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