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떡 예수

<요한복음 6:24-40>

24 무리가 거기에 예수도 안 계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25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2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28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30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31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34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36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빈들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무리가 다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다시 몰려온 이유를 간파하시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26)

그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예수님에게서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분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필요가 기적적으로 채워지는 것을 경험하고 또다시 그렇게 더더욱 채워질 것을 기대하고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란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진정 누구신지에는 관심이 없고 예수님에게서 얻어낼 것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 먹고나면 다시 배고파지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썩어 없어지는 양식을 위해서는 그렇게 열심히 찾아 다니면서도, 결코 썩어 없어지지 않을 양식, 하늘로부터 오는 참 생명의 양식을 위해서는 열심을 내지 않는 사람들.

그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27) 이것은 생계를 위한 일을 아예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음을 알고 그 일에 열심을 내라, 예수님께 나아오라고 도전하는 말씀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영생의 양식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하나님의 일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이 질문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29)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믿음이 우리가 열심을 내어 해야 할 일이라는 이 말씀이 여러분은 이해가 되십니까? 믿는 일은 나에게 이미 끝난 일이 아닌가, 나는 예수님을 믿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 없이 결코 우리는 내 노력만으로 믿음에 이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중 많은 사람이 그 믿어지는 은혜를 이미 경험한 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가만 생각해보면, 믿음에 이르는 것은 아무 노력 없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 믿음은 알아가는 일을 필요로 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도 하루 아침에 바로 쌓이지 않습니다. 부부간에 신뢰가 쌓이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함께 지내며 서로를 더 알아가는 일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에 대한 믿음도 그분이 참으로 누구신지 알아가는 일을 필요로 합니다.

이것은 이미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에게도 해당되는 얘깁니다. 예수님을 잘 아는 사람의 믿음과 예수님을 잘 모르는 사람의 믿음이 같을 수 없듯이, 예수님에 대해 조금 알았을 때의 믿음과 예수님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을 때의 믿음이 같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더 제대로 알면 알수록 그분에 대한 우리의 믿음도 더 온전해져 갑니다.

또한 믿는다는 것은 그저 지적인 동의를 넘어 순종의 의미를 내포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이에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믿는 이의 삶에 그 일이 없다면 그가 하는 ‘믿는다’는 말은 그저 속빈 강정에 불과할 것입니다.

참으로 믿는다면 그 믿음에 합당한 일을 할 것입니다. 믿으니까 순종한다는 말도 맞지만 순종함으로 더 온전히 믿게 된다는 말도 맞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은 우리가 열심을 다해 해야 할 일이며, 또한 우리가 평생에 걸쳐 걸어가야 할 여정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 말씀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가 바로 그들 앞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분을 통해 이루어진 하나님의 일을 그들이 직접 눈으로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분을 믿지 않고 다른 일에만 열중하는 그들의 무지함을 일깨워주시려는 뜻이었을 겁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목적을 가지고 그분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 아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이 세상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응당 물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 당신을 보내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을 통해 하시려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런데 그들은 이렇게 묻지 않고 다르게 묻습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메시야, 우리가 필요로 하는 구원자가 당신 맞습니까? 당신이 바로 그분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표적을 우리에게 좀 더 보여주십시오.” 그들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일이 이미 시작되어 그 예수님을 통해 진행되고 있는데, 그들은 계속 자기들의 그려놓은 구원의 그림 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정의하고 예수님을 이용할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예수님께 기대하는 바를 슬쩍 흘립니다: “전에 우리 조상들이 광야에 있을 때 모세가 그들에게 만나를 먹게 해주었던 것처럼 당신도 그와 같은 일을 우리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은 다음 세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첫째, 그날에 하늘로부터 떡을 내려준 것은 모세가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이셨다. 그분은 지금도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는 분이다.

둘째,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떡이 바로 지금 너희 앞에 있다. 내가 바로 그 생명의 떡이다. 나를 먹는 자는 살 것이다.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셋째,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않을 것이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라.  

예수님이 떡의 공급자가 되길 기대하던 무리에게 예수님은 그분 자신이 떡임을 말씀하십니다. 이전에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늘 양식 만나를 비같이 내려주셨던 하나님이 이제 다시 하늘로부터 그분의 아들을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한 생명의 양식으로 내려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라면 우리는 그분을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그분을 먹을 수 있죠? 이것은 비유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그분을 먹는다는 뜻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생명의 양식으로 내어주셨다는 뜻입니다. 십자가에서 찢기신 그분의 몸, 흘리신 그분의 피가 죄인인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음을 우리가 믿을 때, 그 예수님의 살과 피가 우리를 살리며 새롭게 하는 생명의 양식이 되리라는 뜻입니다.

이어지는 53절 이하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53,55)

성만찬 중에 우리가 받아 먹는 빵과 포도주가 우리 위해 찢기고 흘리신 예수님의 살과 피를 상징합니다. 이 의미를 알고 성만찬에 참여하는 신실한 신자들은 그들이 받아 먹은 빵과 포도주가 그들 몸 속에 들어가 흐르며 몸의 일부가 되는 것처럼, 우리 위해 내어주신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속에 들어와 우리를 살리는 구원의 능력이 됨을 경험합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56-57)

그 생명의 떡 예수를 먹는 사람이 얻을 유익을 예수님은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결코 주리지 아니함과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함, 다시 말해 이미 이 땅에서부터 다른 생명으로 살 수 있는 은혜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마지막 날 예수님에 의해 다시 살아나는 은혜입니다.

예수님께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고 그분을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으리라는 말씀 역시 비유입니다. 이것은 예수 믿는 자가 음식 안 먹어도 배 안 고프리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예수 믿는 자에게는 먹고살 음식이 넘치도록 주어지리라는 약속도 아닙니다. 생명의 떡 예수께 오는 자는 그분으로부터 오는 생명으로 인해 마음 속 깊은 허기와 갈증이 채워져서 다른 것들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비로소 충만한 삶을 살게 되리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것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실제 그의 삶 속에서 체험하는 진리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비로소 우리는 채워집니다. 다른 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던 우리 마음 속 허기와 갈증이 비로소 충만히 채워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것은 저 역시 경험한 바입니다. 이전에 저는 사람들의 인정에 고팠습니다. 그래서 높이 올라가려 했고, 더 많이 이루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성취에도 제 마음 속 허기와 갈증은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내 욕망과 목표를 예수님을 통해 이루려는 모습, 그렇게 나의 존재가치를 증명하려는 모습, 그게 바로 과거 저의 모습이었습니다. 이처럼 끊임없이 무언가에 미련을 갖고 집착한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 내가 채워지지 않은 상태에 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 사랑과 만나고 비로소 저는 채워졌습니다. 내가 어떤 대단한 성취를 이루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나를 있는 그대로 받으시며 귀히 여기신다는 사실이 마음 깊이 믿어졌을 때 비로소 저는 채워졌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시느냐가 제 자존감의 새로운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진리와 만나며 점점 더 저는 이전에 얽매여 있던 것들에서 자유케 되었습니다.

이미 더 좋은 것으로 채워진 사람은 그보다 못한 것들에 더이상 배고픔과 목마름을 느끼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은 이후에도 여전히 이전에 추구하던 것들에 허기와 갈증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지금 자신이 무엇으로 살고 있는지, 생명의 원천 예수님으로부터 어느덧 너무 멀어져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고 또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말씀합니다. 그러나 그 풍성한 생명의 삶을 모두가 누리며 사는 것은 아닙니다. 원인은 성부 하나님께도 성자 예수님께도 있지 않습니다. 그 사람 자신에게 있습니다.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36)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사람을 그분에게로 이끄시는 이는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44) 그렇다고 해서 성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차별하여 예수께 나아오려는 사람을 일부러 막으실 리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시는 분이 아니며(롬2:11), 또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딤전2:4).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45)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을 기회는 아마 모두에게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께 제대로 듣고 배운 사람만 예수께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허투로 듣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십시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하였습니다. 어떻게 듣느냐가 각 사람의 현재와 미래를 결정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그분 자신으로 만나야 합니다. 내가 바라는 모습의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으로 만나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주님의 말씀 앞에 더욱 겸손히 나아가야 합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오직 진리의 말씀만이 우리를 내가 갇혀 있는 좁은 틀에서 끌어내 새로운 생명,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오는 자를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37)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 중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 아버지의 뜻임을 알기에 예수님은 그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한다 하십니다(38-39)

이 긴 대화가 끝난 후 무리와 제자 중 다수가 말씀이 어렵다며 예수님 곁을 떠났습니다. 이 말씀이 그들에게 어렵게 느껴진 이유는 그들이 갇혀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어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68)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생명의 떡 예수, 영생의 말씀의 원천이 되시는 예수님께로 더욱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그 생명의 길에서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는 풍성한 삶의 복을 충만히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