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믿음으로 서로 격려를

<로마서 1:7-12>

7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8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9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10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얻기를 구하노라

11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12 이는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에 보낸 편지의 서두 부분입니다.

편지를 시작하며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과, 그가 전하는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임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복음이 유대인을 넘어 이방인들에게까지 전파되었고, 그 열매 중에 하나가 이 편지의 수신자들인 로마 교회 성도들임을 말합니다.

‘성도’란 말은 거룩한 무리, 거룩한 백성이란 뜻입니다. ‘거룩’은 다른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하나님만이 거룩하시며,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하신 것들만이 거룩합니다.

바울이 로마의 신자들을 성도, 즉 거룩한 백성이라 부르는 이유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어 순종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5-6)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어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 로마의 성도들에게 바울은 다음과 같은 축복의 말로 인사를 건넵니다.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7)

은혜와 평강,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받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의 성도들에게 전한 이 축복의 인사를 우리 프라하 꼬빌리시교회 성도님들에게도 전하고 싶습니다.

프라하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합니다!

로마 교회는 바울이 전도하여 개척한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루트를 통해 로마에도 복음이 전해졌고, 그곳에 믿는 자들의 공동체가 생겨났다는 것을 바울은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자신과 직접 관계된 집단이 아닐 때 사람들은 그 낯선 집단에 대해 경계심이나 적대감을 갖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로마의 신자들에 대해 바울이 제일 먼저 나타낸 반응은 ‘감사’였습니다.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세상에 전파됨이로다”(8)

로마에 예수 믿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그리고 그들의 믿음에 대한 좋은 소문에 대해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한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이의 존재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 사람이 거기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 정말 감사하다 느끼신 적이 있습니까?

내 자녀가 너무 이쁘면 그 아이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 감사하게 되지요. 내가 그 아이를 그 모습으로 존재하게 만들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건 하나님이 하신 일이죠. 그래서 그의 존재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 같은 신앙 안에서 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어떻게 여러분 같은 분들이 지금의 모습으로 여기 제 옆에 있을 수 있을까요? 제가 여러분을 여기 존재하게 만든 것이 아니죠. 또한 여러분이 저를 여기 존재하게 만든 것도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지금까지 제가 걸어온 길이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여러분 각자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있습니다. 그 각각의 길은 비슷하면서도 또 조금씩 다를 것입니다. 우리 교회 다민족 교우들을 생각할 때 그 다양성의 범위는 훨씬 더 넓어집니다. 그런 우리가 여기, 이 교회 안에 함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요.

그 생각을 하면 우리는 서로를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여기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이 여기 내 옆에 존재하게 하신 사람들이니까요. 비록 우리 각자에겐 여전히 부족한 모습들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서로를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나에게 행하신 일들에 대해 감사할 뿐 아니라,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내 형제자매에게 행하신 일들에 대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복음으로 만나고 이후 어느 시점부터 제 마음의 소원은 예수님을 통해 내 안에서 일어난 좋은 일들이 다른 사람들 속에서도 일어나면 좋겠다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제 마음의 가장 큰 소원이고, 그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볼 때 저는 가장 감격스럽습니다. 제가 그렇게 감성적인 사람은 아닌데, 제가 가끔씩 울컥하게 되는 상황은 제 주위에서 그런 일이 하나님에 의해 일어나는 것을 볼 때입니다.

바울의 마음이 바로 그 마음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가 로마의 성도들을 떠올리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소망이 어느덧 그의 소망이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가 마음으로 간절히 소망하는 일이 그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저 로마에서 벌써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목회의 경험이 쌓이면서 깨닫게 되는 사실 하나는 아무리 내가 누군가에 대해 좋은 계획과 소망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내가 그 일을 이루어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지극히 무력합니다. 하나님만이 소망입니다. 만일 우리 각자에게 어떤 좋은 변화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한 사람이 참되게 예수님을 믿게 되는 일, 결코 그 일은 나의 인풋에 의한 당연한 아웃풋으로 나오는 결과가 아닙니다. 나는 다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그 사람 옆에 함께 존재할 수 있을 뿐입니다. 좀 더 예수님을 닮은 모습이라면 좀 더 좋을 것입니다. 나를 통해 하나님이 일하시기에 좀 더 편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내 형제자매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요,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나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내 믿음의 길을 가고, 여러분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각자의 믿음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여정 속에서 때로 우리는 만나고 서로 좋은 도전과 격려를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그의 존재 자체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말입니다.

그 로마 교회에 대한 소식을 들으며 바울은 그곳에 가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몇 차례 방문 계획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번번이 길이 막혔습니다. 13절에서 그는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여러 너희에게 가고자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만나고 싶지만 그처럼 만날 수 없는 상황에서 바울이 한 일은 무엇일까요? 기도입니다. 바울은 한번도 보지 못한 그 로마의 성도들을 위해 계속 기도해왔다고 말합니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9)

바울은 로마 교회에 관한 소식을 계속 듣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처해 있던 매우 실제적인 상황과 문제들을 위해 계속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로마서는 그 계속적인 기도의 결실일 것입니다. 기도 중에 그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들려주고자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였을 것이고, 그 내용들을 글로 기록하여 편지로 써 보낸 것입니다.

로마서의 전반부에서 바울은 기독교 복음의 교리를 매우 체계적이고 심층적으로 가르칩니다. 그들이 바울을 통해 직접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아니어서 신학적 기초가 약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고려한 듯합니다. 그리고 후반부에서는 그 공동체 구성원들간에 갈등의 요인이 되고 있던 문제에 대해 실질적인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비록 그 자리에 그들과 함께 있을 순 없었지만 기도 중에 성령 안에서 항상 그들과 함께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아침에 하루 일과를 시작할 때, 그리고 저녁에 가정예배를 드릴 때마다 교우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여러분이 살아가는 모든 곳에 제가 늘 함께 있을 수 없고, 여러분을 힘겹게 만드는 문제들을 제가 다 해결해드릴 수는 없지만, 기도 중에 여러분을 기억하며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하시며 도와주시길 간구합니다.  

제가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듯 여러분도 저를 위해 기도해주시길 요청합니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이렇게 성도들이 서로를 위해 기도할 것을 권면합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그리고 덧붙이길,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것이니(6:18-19)

이 로마의 성도들을 위한 기도와 더불어 바울이 기도 중에 하나님께 구한 것이 또 있었습니다. 로마에 갈 수 있는 좋은 길이 열리게 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10절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얻기를 구하노라(10)

이제껏 길이 막힌 것에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겠지만, 언젠가 하나님이 허락하신다면 로마에 갈 수 있는 ‘좋은 길’이 열리길 바울은 고대하며 기도합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가능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일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좋은 길인지 아닌지 우리는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기도입니다!

어떤 분들은 반문할지 모릅니다. 어차피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진다면 우리가 기도할 이유가 무엇인가? 어차피 그분의 뜻대로 이루어질 텐데…

그런데 이것은 기도의 초점을 내가 바라는 일이 이루어지는 데 두기 때문에 발생하는 오해입니다. 기도의 초점을 하나님이 뜻하시는 가장 좋은 길로 나아가는 것에로 옮겨보십시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시험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공부하여 시험을 쳤습니다. 결과를 기다리며 기도합니다. “주님, 가능하다면 이번에 꼭 합격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할 수 있죠. 그 힘든 시험 준비 또 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되도록이면 이번에 끝낼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간절히 기도하게 되지요.

그런데 결과는 불합격이었습니다. 자, 그러면 그 사람이 구한 것을 하나님이 들어 주시지 않은 셈입니다. 이에 누군가는 말할지 모릅니다. “기도해봐야 소용없네!” 기도의 초점을 내가 바라는 바를 이루는 데 두고 있다면 이 경우 기도는 의미를 상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을 알고 기도의 초점을 하나님이 뜻하시는 가장 좋은 길로 나아가는 데 두고 있는 사람은 그 같은 결과에 대해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내가 합격이라는 결과를 기대하며 노력하고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들어주지 않으신 것을 보니 그보다 더 나은 결과로 인도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겠구나. 힘들지만 좀 더 공부하기를 하나님이 원하시는가보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았다면 그런 분별은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겁니다. 기도와 관련없이 이루어지는 일들은 우연히 일어난 일로 치부되거나 내 힘으로 이룬 일로 착각되기 쉽습니다. 반대로, 내가 어떤 좋은 뜻을 가지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며 기도했는데 그 바라는 대로 되지 않았다? … 그렇다면 그것은 매우 특별한 상황입니다. 내 생각보다 더 나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 하나님이 예비하신 더 ‘좋은 길’로 그분이 나를 초청하시는 상황입니다. 모호하게 존재하던 하나님의 뜻이 보다 분명히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며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길 바라시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내가 바라는 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게 하신다면 거기엔 내 생각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보다 나은 뜻이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만이 내 삶의 모든 것을 하나님과 연결지을 수 있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으며, 그 뜻을 따라 가장 좋은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의 성도들에게 나아갈 좋은 길이 열리길 구했듯, 저 역시 교우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나아갈 좋은 길이 열리길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 꼬빌리시교회의 다민족 교우들이 그들 사이에 놓인 거리를 극복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그리고 먼저 복음을 듣고 믿은 우리가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함께 기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바울이 로마로 가는 길이 열리길 바랬던 이유가 11 이하에 언급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11)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사를 통해 보다 견고히 서길 바라는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 일에 자신이 도구로 사용되길 바라는 소원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 속에서 우리는 바울이 그 로마 성도들과의 만남을 통해 소망하는 바가 그처럼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는 일이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는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12) 여기 피차 안위함을 얻는다는 말이 좀 어렵습니다. NIV영어성경에는 “mutually encouraged by each other’s faith”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새번역 성경이 보다 명쾌합니다. 여러분과 내가 서로의 믿음으로 서로 격려를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서로의 믿음으로 서로 격려를!’ 저는 이 말이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한 가지 중요한 일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공동체 안에서 우리 중 누구도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지 않습니다.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주고받습니다. 서로의 믿음으로 서로 격려를 주고받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각기 부르심을 따라 믿음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러다 주일에 혹은 간혹 만나 교제를 나눕니다. 그리고 또 잠시 헤어져서 다시 각자의 일상을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좋은 길’은 쉽고 편한 길이 아닙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고 험한 길이며, 그래서 찾는 이가 적은 길입니다. 그러므로 그 길을 가는 중에 우리에게는 위로와 격려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그 위로와 격려는 어디서 올까요? 물론 기도와 말씀을 통해 위로부터 주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또 하나 중요한 소스와 루트를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바로, 같은 주님을 믿는 다른 형제자매들로부터입니다!

얼마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목사이고 교회에 사니까 당연히 주일에 교회에 있지만, 다른 교우들은 어떻게 그렇게 매주일 예배 드리러 교회에 오는 걸까? 우리 교우들 중에는 심지어 프라하 외곽에서부터 몇 시간 걸려 오시는 분들도 계시지 않습니까? 도대체 어떻게 그러시는 거죠?

물론 주일에 교회 와서 예배 드리는 게 다가 아니고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지만, 주일에 교회 나와 예배 드리는 일 자체도 결코 당연하게 이루어지는 일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분명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표현일 것입니다.

믿음 자체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믿음의 진실성은 사랑의 행동을 통해 표현되고 입증된다고 여러 차례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하는 봉사,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에 대한 섬김, 손해와 희생을 감수하며 행하는 의로운 일들, 주의 이름으로 타인에게 행하는 환대와 용납과 용서… 이 모든 것들이 각자의 삶 속에서 믿음이 표현되는 방식들이고, 내 형제자매들에게서 그런 모습들을 접할 때마다 우리는 도전과 격려를 받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늘 좋은 모습으로 잘 살 수는 없을 겁니다. 지칠 때도 있고 넘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서로의 믿음으로 서로 격려를 받을 수 있습니다. 내 형제자매가 믿음의 길을 잘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다시 힘을 얻어 그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있습니다.

서로의 믿음으로 서로 격려를저는 이 ‘서로’라는 말이 참 좋습니다. 우리를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내가 있고, 그 다음에 남이 있는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남이 없으면 나는 없습니다. 부모님이 없는 나를 상상할 수 있나요? 하나님이 없는 나를 생각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 또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를 바라보지 않는 한, 우리는 나 자신에 대한 온전한 이해에 결코 이를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서로’(Mutuality)의 관점을 가질 때 우리는 자기만의 좁은 틀 속에 함몰되거나 은밀한 교만에 빠지는 일을 조금은 피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신앙의 성숙은 이 ‘서로’의 관점을 내면화하는 일이라 할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7:1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6:2)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4-25) 이 모든 성경 말씀들이 이 상호성의 관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로마 성도들과의 만남 속에서 서로의 믿음으로 서로 격려를 주고받는 일을 희망했던 것처럼, 다민족, 다세대가 함께 모인 우리 꼬빌리시교회 안에서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나길 소망하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체코 교우들의 삶 속에서 표현되는 믿음을 통해 때때로 저는 도전 받고 격려 받습니다. 우리 교회 정원에서 아이들이 편안히 놀 수 있도록 풀이 깎여 있는 것은 풀이 스스로 성장을 멈추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누군가 때가 되면 와서 풀을 깎기 때문입니다. 얼마전 고장나 있던 정원의 그네 하나가 어느 순간 보니 말씀하게 고쳐져 있었습니다. 또 누군가의 손이 닿은 것입니다.

그분들의 삶 속에 녹아 있는 그분들의 신앙에 제가 도전과 격려를 받듯, 그분들과 한 교회 안에 존재하는 한국 교우들의 삶 속에 녹아 있는 믿음에 그분들 또한 도전과 격려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혼자 가는 길이 아닙니다. 주님과 함께 가는 길이며, 또한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가는 길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서로의 믿음으로 서로 격려를 주고받는 공동체, 그것이 교회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바울과 로마 성도들의 관계처럼,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 중에 아직 가까워질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이 우리 각자에게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대하기를 주님은 원하실까요?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믿음의 형제자매들임을 기억하며 먼저 그들의 존재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내 마음을 좀더 넓혀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간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열어 주실 때, 서로의 믿음으로 서로 격려를 주고받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