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20년 9월 27일)
- 로마서 4장 13-17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세상의 상속자 - 롬4,13-17.docx
<로마서 4:13-17>
13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14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
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16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17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모두가 죄 아래에 있다.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자가 없다.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뛰어드시는 하나님의 의로운 행동이 나타났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모든 죄인을 대신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이것은 죄의 권세에서 우리를 속량하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이것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우리가 행한 일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통해 하신 일에 근거해서,
할례자든 무할례자든 모두가 예외 없이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이것은 율법과 무관하게 뜬금없이 하는 말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예를 생각해보자.
아브라함도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게 아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기진 바 되었다’고 성경은 말한다.
그가 하나님께 받은 칭의는 그가 하나님을 위해 수고한 일의 대가로 받은 게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하시려는 일에 그가 아멘 하며 뛰어든 결과로 주어진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믿음으로 반응하여 얻게 된 복이었다.
이 복이 할례자에게만 주어지는지 무할례자에게도 주어지는지 알려면,
아브라함이 믿어 의롭게 된 시점이 할례받기 전인지 후인지 살펴보면 된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칭의 사건이 할례 사건보다 앞서 일어났음을 안다.
무슨 뜻인가? 할례보다 믿음이 근본이라는 것이다.
할례는 칭의의 전제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다.
그는 믿어 의롭게 된 모든 이방인 신자들의 조상이며,
또한 그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모든 유대인 신자들의 조상이다.
이것이 지난 주일까지 살펴보았던 내용의 개요입니다.
핵심은, 우리가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얻는 길은 예수를 믿는 것이며,
그렇게 믿어 의롭게 된 자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다는 건 어떤 의미를 갖는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아브라함의 것을 물려받는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것들을 상속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이 상속에 관해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을 말합니다.
첫째, 누가 상속받는가? 율법에 속한 자가 아닌 믿어 의롭게 된 자들이!
둘째, 무엇을 상속받는가? 세상을!
셋째, 어떻게 상속받는가? 약속을 따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누가 상속자인가’에 대해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내용은 이렇습니다.
율법보다 먼저 믿음이 있었고, 그 믿음에 기반해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이렇게 먼저 주어진 약속을 후에 주어진 율법이 파기할 수 없습니다.
율법의 방정식에 집어넣으면 아무도 상속받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할 것입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우리가 범하기 때문에 우리는 진노를 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은혜로 약속된 것을 우리가 믿을 때 우리는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은혜에 믿음으로 반응하여 약속된 것을 받았던 것처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 믿음에 속한 자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약속된 유산을 상속받을 것입니다.
‘무엇을 상속받는가’에 대해서는 좀더 긴 설명이 필요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주리라 약속하신 것이 있었습니다.
일차적으로 그것은 ‘땅’이었습니다.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창13:15/15:18))
가나안 땅, 아브라함이 평생 나그네처럼 살았던 그곳을
그의 후손에게 유업으로 주리라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 약속을 근거로 계속해서 유대인들은 그 땅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또 있었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12:3/18:18)
아브라함과 그 후손이 이 세상 곳곳에서 축복의 통로가 될 것이란 약속이었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그들이 서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도를 따라 행함으로! (창18:19)
바울은 이 두 가지 약속을 모두 염두에 두고 ‘세상의 상속자’란 표현을 사용한 듯 합니다.
예수 복음 안에서 이제 아브라함의 후손은
율법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들이므로,
그들이 상속받을 것도 지리적 영토 개념의 가나안 땅이 아니라,
이 세상 그들이 살아가는 자리에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로 본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자신이 선 자리에서 하나님의 도를 따라 행할 때,
그곳에는 하나님의 복이 흐르고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되며,
그렇게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를 그들이 유업으로 받으리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먹고사는 문제로 염려하지 말아라! 하나님께서 다 아시고 돌보신다.’
‘다만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여라! 다른 것은 거기에 더하여지리라.’
‘너희 소유로 다른 이들을 섬겨라! 하늘 곳간에 너희 보물을 쌓아라.’
그리고 다음과 같은 약속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십니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죽고 나서야 들어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이미 이 땅에서부터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 누리며 사는 나라입니다.
내 마음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질 때,
내 삶의 자리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내 주위 사람들이 나를 통해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그 복이 흘러간 모든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됩니다.
예수님을 통해 내 마음에서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영토는
내 모든 삶의 자리, 예수님의 도를 행하는 내 모든 시간과 공간 속으로 확장되고,
내가 관계맺고 있는 각 사람의 마음과 삶 속으로도 확장되어,
마치 동심원이 퍼져나가듯 온 세상 속으로 확장되어 갈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의 회로 속에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는 약속은
오직 은혜와 믿음의 회로 속에서만 성취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인식하고 이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사람만이
그가 서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하시려는 일에 아멘 하며 뛰어드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일에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코로나 상황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구원은
이 상황이 얼른 종식되고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이겠지만,
믿음의 자녀들이 생각하고 바라는 구원은 그런 차원에서 더 나아갈 수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전엔 은폐되어 있던 세상의 많은 더러운 것들이
코로나 바이러스 여파로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우리의 마음과 삶이 그런 것들에서 온전히 벗어나는 것이 참다운 구원이라 본다면,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은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속에서 역사하며 드러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멈춰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멈춰 계시지 않음을 봅니다.
홍해를 앞에 두고 쫓기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뭔가를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은 나약하고 무책임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라면, 그것을 성실히 행하는 것이 옳습니다.
오늘의 상황 속에서 무엇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길인가를
우리는 끊임없이 숙고하며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때때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가만히 서서 하나님을 바라볼 것을 요구받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가만히 있는다는 것은 결코 무의미하거나 불합리한 일이 아닙니다.
믿음이 합리적인가의 문제는 믿는 대상이 믿을 만한가에 좌우됩니다.
믿을 수 있는 존재를 믿는 것은 언제나 합리적입니다.
아브라함이 알았듯이, 또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알고 있듯이,
하나님은 신뢰할 만한 분이며, 하나님보다 더 믿을 수 있는 분은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믿는 하나님이 전능하시며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17절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믿었던 하나님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죽는 것’과 ‘없는 것’보다 인간을 좌절시키는 것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 상태에 이르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를 씁니다.
죽음에 이를까 두려워 자기 너머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무(無)에 이를까 두려워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이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 한계에 갇히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당장 자기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행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통해 하시려는 일에 아멘 하며 뛰어들었습니다.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이’로 믿었기 때문이라 합니다.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또 아내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했다는 뜻입니다.
우리 역시 부활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부활을 믿는 사람이며,
참으로 부활을 믿는 사람은 죽음의 권세를 이깁니다.
그 무엇도 그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을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로 믿었기 때문이라 합니다.
당시 그에겐 자식이 하나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별처럼 많은 후손에 대한 약속을 믿었습니다.
우리 역시 창조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분임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것이 하나도 없을지라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온유함’은 단순히 ‘조용함’도 아니고 ‘나약함’도 아닙니다.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을 의뢰하며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물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며 모든 것을 그분께 맡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자리에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놓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참되게 믿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특성이 바로 이 ‘온유함’입니다.
온유한 자, 믿음의 사람은 자기 힘으로 모든 걸 다 해결하려 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그들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운전하시는 구원의 열차에 올라탑니다.
그것이 어디를 향해 가는지 다 알지 못하고, 그 가는 길에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그렇게 하고, 결국 하나님이 예비하신 곳에 이르게 됩니다.
바로 이 여정 속에서 온유한 자,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믿음의 삶으로 우리를 초청하는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예를 들어,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합시다.
보통은 나에게 지금 가진 것이 얼마고, 어떤 걸 준비할 때 드는 비용은 얼마고,
그렇게 했을 때 수익이 어느 정도 나는지를 주로 생각하며 준비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사람이 좀 더 기특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하고자 하시는 일은 뭘까?
내가 살아가는 곳에서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을 흘려보내는 길은 뭘까?
어떻게 하면 내 사업장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현장이 되게 할 수 있을까?
자, 이 관점에서 시작하면 사업을 준비하는 과정에 달라지는 게 있을까요 없을까요?
저는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림을 다시 그리게 되겠죠.
단순히 비용 줄이고 수익 늘리는 것만 생각하며 모든 걸 결정하진 않겠죠.
내 사업장에서 이루어지길 원하는 일이 실제 이루어지게 하는 방향으로
모든 게 세팅되고 진행될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아마 이 사람은 하나님을 더욱 의지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며 나아갈 때,
그의 삶은 하나님이 거기에 무엇을 더하시는지를 체험하는 삶,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누리는 삶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얻길 소망하십니까?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믿음의 삶은 약속이 있는 삶입니다.
예수님을 참되게 믿는 사람은 세상의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자기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될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에 믿음으로 뛰어들어 약속된 것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믿음의 자녀들이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는 약속의 말씀에 감사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