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지 말라

<야고보서 1:12-18>

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16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18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살면서 우리는 시련을 겪습니다.

삶에 시련이 찾아오면 우리는 생각하게 됩니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을까?

이유가 바로 드러나는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때도 많습니다.

아니, 그런 때가 더 많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으면 시련을 겪지 않을까?

내심 기대할 수도 있지만, 사실 그렇진 않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어도 시련을 겪습니다.

아니 오히려, 하나님을 잘 믿어서 시련을 더 겪게 되기도 합니다.

우리 인생에 닥치는 시련은 어떤 의미에서 ‘무차별적’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냐를 가리지 않고 강타합니다.

마치 강도와 같이, 시련은 누구에게나 아무때라도 닥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이것은 마찬가지지만,

그들이 다른 이들과 다를 수 있는 부분은 다만 이것입니다.

그들은 시련을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다르게 반응할 수 있고,

그리하여 다른 결말에 이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시련을 면제해 주시진 않지만,

그들이 그 시련을 참고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그리하여 결국 그 시련이 유익한 것이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극심한 시련을 겪으셨다는 사실,

그리고 그 시련이 시련 그 자체로 끝나지 않고,

그 아들과 더불어 우리 모두를 살리는 하나님의 구원으로 이어졌다는 사실,

이것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자녀들은 시련 속에서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시련을 겪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 말하지만,

성경은 ‘시련을 견디어 내는 자’가 복이 있다 말합니다.

본문 12절에,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여기 ‘시험’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페이라스모스’(peirasmos),

이 단어는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모든 시험과 시련을 가리킵니다.

‘시험을 참는 자’가 왜 복이 있는가?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합니다.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있어야 할 자리에 잘 서 있는 사람,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가야할 할 길을 잘 가는 사람,

그들에게는 ‘가장 좋은 것’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면류관은 승리의 상징입니다.

이기는 사람이 받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잘 견디면 이기는 것입니다.

그 승리의 대가는 ‘생명’(zoe)입니다.

하늘에 속한 생명,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이 ‘생명’이 어떤 것인지는 경험해본 사람 외에는 알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미 이 땅에서부터 그 생명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가 참고 견딜 수 있는가?

사랑하는 자, 주님을 사랑하는 자!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딘다’ 하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사랑하는 것으로 삽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속에 임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삽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는 인내할 수 있고, 또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험을 참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이어지는 13절에도 ‘시험’이란 단어가 등장합니다.

12절에 나온 단어와 연관된 동사 ‘페이라조’(peirazo)가 사용되고 있지만,

그 뉘앙스는 앞에서의 ‘시험’과 좀 다르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NIV 영어성경이나 공동번역 한글성경에서는 의미상의 혼동을 막기 위해

12절의 ‘시험’은 trial, ‘시련’이란 말로, 13절의 시험은 temptation, ‘유혹’이란 말로

아예 대체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똑같은 시련의 상황이 거기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한편으로는 앞으로 나아갈 기회요 복이 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론 퇴보하게 하는 시험이나 유혹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라 합니다.

그 시련과 그로 인한 결과를 다 하나님 탓으로 돌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 시련에 의해 우리가 넘어지길 의도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신다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험 혹은 시련이 닥치는 것을 허락하시지만,

그 목적은 우리가 그 시험을 잘 통과하여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라 합니다.

그 사람 속에 있던 욕심이 악의 유혹에 걸려드는 것이란 뜻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 합니다.

같은 상황에서 사랑이 인내를 낳고, 인내가 생명을 낳는 것과 정반대 경로라 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금지된 과일을 따먹고 비극적 결과를 맞게 된 것은

하나님이 그 나무를 동산 중앙에 두시어 그들을 유혹한 결과일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하나님이 의도하신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된 결과였습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로 감사 대신 불평을,

하나님 말씀 대신 자기 욕망을 좇은 결과였습니다.

하나님이 그 나무를 동산 중앙에 두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그 나무를 볼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올리고,

그리하여 늘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길 바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행복은 그분 자신을 배제한 행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것은 결코 행복에 이르는 길이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길 바라시고, 이를 위해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만,

그분이 주시려는 ‘좋은 것’은 내가 지금 기대하는 ‘좋은 것’과 꼭 일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토록 아이스크림과 초콜렛을 좋아하던 저희 아이가

한달 전 공포스런 치과 치료를 경험한 뒤로는 그것들을 잘 먹지 않습니다.

여전히 손에 들고 바라보며 좋아하기는 해도 실제 먹는 일에는 신중을 기합니다.

초콜렛이 자기에게 ‘좋은 것’이라는 확신이 이전보다 약해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아이가 초콜렛을 좋아한다고 하여 그 초콜렛을 마음껏 먹게 해주는 것이

진정 그 아이의 행복을 위한 일이라 생각하는 부모는 별로 없을 것입니다.

벌써 이가 많이 상해 있는데도 계속해서 초콜렛을 내놓으라 떼를 쓰는 아이를 바라보며

아빠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속으로 생각합니다.

얘야, 너의 행복을 그 누구보다 바라는 사람은 나란다. 네가 원하는 것을 지금 네게 주지 않는 것은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야. 내 마음을 너에게 보여줄 수 있다면 좋으련만…

불순종의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더이상 에덴 동산에 있을 수 없게 되고,

그들의 삶에는 고통과 수고가 끼어들게 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죽옷을 입혀 주시고,

모든 것을 가장 좋은 모습으로 회복시켜가는 구원의 대장정을 시작하십니다.

죄와 고통과 시련과 죽음이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가로놓였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다시 그 모든 것을 뚫고 품으며 우리들을 찾아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무엇에 속지 말라는 것입니까?

우리가 겪고 있는 고된 상황이 다 하나님 탓이라는 생각에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상황 속에 언제나 우리의 역할을 남겨놓고 계심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내가 시련 속에 있다면 하나님의 선의를 의심하지 말고,

지금 나의 욕망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돌아보는 일이 유익할 것입니다.

또한, 그 시련 속에서 이제 나는 끝이라는 생각에도 우리는 속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선하시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 뿐임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온다 합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시련도, 고통도, 불행도, 그 순간엔 다 이해할 수 없다 해도,

그 모두가 위로부터 내려오는 가장 좋은 것의 일부분임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좋은 것, 온전한 선물은 위로부터 주어집니다.

그 선물이 선물로 인식되기까지 우리가 할 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온전한 선물’ 자체를 우리가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빛들의 아버지, 진리요 생명이요 사랑이신 그분께로부터 내려오는 것입니다.

진주조개가 자기 안에 들어온 이물질과 부대끼며 영롱한 진주를 빚어내듯이,

하나님은 시련 속에 있는 우리에게 빛을 비추사 우리를 새롭게 빚어내십니다.

하나님은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다 합니다.

나에게 늘 좋은 것을 주시던 하나님이 어느 순간 내가 원치 않는 것을 주실 때,

선하고 완전하신 그분이 어느 순간 악하고 불완전한 존재로 변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변한 것, 혹은 변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나의 인식일 것입니다.

하나님에 관해 내가 기존에 갖고 있던 관념, 그것에 속지 마십시오!

하나님에 대해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 그것이 곧바로 하나님은 아닙니다.

때가 되면 그 관념은 부서져야 하고, 또다시 더 온전히 빚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입니다.

내가 계시다 말한다 하여 계시고, 안 계신다 말한다 하여 안 계신 분이 아닙니다.

내가 이런 분이라 생각한다 하여 그분이 그런 분이 되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분은 존재하시고, 우리는 그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도의 기독교 영성가 앤소니 드 멜로 신부는 말합니다.

사실은 하느님으로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하느님에 대해 ‘아노라’기 때문에 하느님을 보지 못한다. 하느님을 못 보게 하는 마지막 장벽은 하느님 개념이다… 하느님에 대한 최고의 앎은 하느님을 알 수 없는 분으로 아는 것이다. (깨어나십시오, 144)

그렇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많이 모른다고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의 의미,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다 알진 못합니다.

다만 확실히 아는 것은, 하나님은 선하시고, 그분의 본질적 속성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알게 된 하나님에 관한 핵심적 지식입니다.

이에 기초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할 만한 분으로 믿고 사랑하며,

계시된 진리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단번에 확 바꿔버리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변화되는 과정은 한 생명이 엄마 뱃속에서 점점 자라나

해산의 고통 가운데 태어나는 과정에 비유될 수 있을 것입니다.

혹은 작은 열매가 비바람 맞으며 자라나 결실하는 과정에 비유될 수도 있겠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사랑의 열매로 맺히길 바라시면서 말입니다.

이 과정을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무한한 시공간을 넘어,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사로잡으러 옵니다.

그 사랑은 제때 오고, 우리는 그 사랑을 반겨 맞는 데 동의하든가 거부할 수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동의하면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작은 씨앗 한 알을 심고 가 버리십니다.

우리 안에서 그 씨앗이 자라나는 과정은 고통스럽습니다.

성장을 방해하는 잡초와 가라지들을 우리는 잘라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씨앗은 결국 저 혼자 자랍니다.

언젠가 우리 영혼이 하나님께 속하는 날,

영혼이 사랑에 동의할 뿐 아니라 실제로 사랑을 하는 날이 옵니다.

바로 그때가 이제 영혼 쪽에서 우주를 가로질러 하나님께로 가야할 때입니다.

그때가 되면 자기 안에서 자라난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가 보입니다.

그 나무는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그 씨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으나 하나님은 우리 안에 그 나무의 씨앗을 심었습니다.

이제 그 나무는 우리 안에서 무럭무럭 자라나 결코 뽑히지 않는 나무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프랑스 철학자 시몬느 베이유가 하나님과 우리의 만남을 묘사한 방식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안에 그 씨앗이 심겨져 있습니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사랑으로 저와 여러분 속에서 역사하고 있습니까?

속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선의를 의심케 하는 무책임한 생각들,

크신 하나님을 좁은 관념 속에 가두려는 자기중심적 생각들,

그런 것들에 속지 마십시오.

시련을 통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고,

시련을 견디어 내며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장 좋은 것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당신을 믿고 사랑합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상황 속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역사하고 있는 줄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더 정직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서게 하시고, 사랑 안에서 인내하게 하시며, 더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