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아, 시몬아

<누가복음 22장 24-34절>

24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26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27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28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29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33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34 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제자들은 서로 다투고 있었습니다.

자기들 중에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셔서 세상을 바꾸실 때가 임박했고,

그 새 나라에서 한 자리 차지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고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또 그들에게 앞으로 닥칠 일들에 대해,

그들은 완전 잘못 짚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날 밤 예수님은 군병들에게 잡히십니다.

바로 그날 밤 제자들은 스승을 버리고 도망합니다.

바로 그날 밤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일이 왜 이렇게 돌아갈까? 모든 게 엉망진창, 말짱 도루묵이 된 듯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일이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그 과정이 필요하리라는 것을…

그래서 그 뒤를 준비하십니다.

 

일단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가 세상 나라들과 어떻게 다른지 알아야 했습니다.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여기서 ‘이방인의 임금들’이란 로마황제와 그의 분봉왕들을 의미합니다.

당시는 로마제국이 세계를 재패하던 시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는 각 지역에 분봉왕들을 세워 그 넓은 제국을 통치했습니다.

그 이방인의 임금들, 세상 왕들은 강제로 백성들을 다스리고,

마구 권력을 휘두르며 백성의 은인으로 행세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민족들을 힘으로 눌러 복종시키며 자기 지위를 공고히 한 다음,

마치 자신들이 그들의 후원자요 ‘은인’(benefactor)인 듯 행세하는 아이러니…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 세상 왕들과 달라야 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앞으로 그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맡길 제자들에게

그 나라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로마황제가 그의 분봉왕들에게 제국의 각 지역을 맡겨 다스리게 하는 것 같이,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도 그의 제자들에게 그 나라를 맡겨 다스리게 하시려고,

그 보이지 않게 실재하는 나라의 통치 지침을 하달하고 계신 셈입니다.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본문 26절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하나님 나라에서는 거꾸로라는 것입니다.

제일 낮은 사람처럼 처신하는 자가 제일 높은 사람이란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다스리는 자’가 된다는 것은 ‘섬기는 자’가 된다는 의미란 것입니다.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며

친히 이 섬김의 본, 하나님 나라의 통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요13:14-15)

이 ‘섬김의 리더십’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자발적인 움직임을 수반합니다.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지극히 크신 그분이… 섬김을 받으셔야 할 그분이…

그 크고 높으심에도 불구하고, 친히 우릴 위해 낮아지셔서,

우리 중에 섬기는 자로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과 같으라’는 말은, 실은 그런 존재가 아닌데, 그런 모습으로 행하라,

기꺼이 그런 모습이 되라는 뜻입니다.

‘섬기는 자’로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 사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확신하는 사람,

그 확고한 자존감을 가진 사람이 기꺼이 낮아질 수 있습니다.

자신이 영광스런 하나님 나라 백성임을 확신하는 사람,

그 분명한 소속감을 가진 사람이 기꺼이 섬기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은인’이라 칭함을 받고자 하지,

진정으로 낮아져 온짱 ‘섬기는 자’가 되려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누군가에게 ‘은인’이 되고자 한다는 것은

상대에게 좋은 일을 행하려 한다는 의미일 수 있지만,

상대보다 높은 자리에서 그렇게 하려 한다는 뜻입니다.

반면, 누군가에게 진정 ‘섬기는 자’가 된다는 것은

상대보다 낮은 자리, 적어도 상대만큼 낮은 자리에서

그를 위해 필요한 수고를 감당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문제는, ‘누가 크냐’로 다투고 있는 저 제자들이,

또한 그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오늘의 우리들이,

어떻게 그런 ‘섬기는 자’로 살 수 있나 하는 것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그의 대적들에게 넘겨주는 흥정을 했습니다.

우리 역시 약간의 이득을 위해 주님을 팔 때가 있을지 모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라는 사실을 부인했습니다.

우리 역시 두려움 속에 주님을 부인할 때가 있을지 모릅니다.

그 나라에서 누가 크냐는 문제로 다투고 있던 제자들,

우리 역시 공동체 안에서 서로 키재기를 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놀라운 것은, 그처럼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에게,

그럼에도 주님은 그분의 나라를 맡기고자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 모습 그대로는 아닙니다.

본문 28-29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그 제자들에게 맡기실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함께 한 자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험’이란 말은 ‘시련’(trials)이란 말로 번역해도 무방하겠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고난을 겪으실 때 그들이 그 옆에 있었던 사람들이란 의미만은 아닙니다.

나아가,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자, 예수님과 함께 하는 자라는 이유로,

여러 시험과 시련을 겪게 될 사람들이란 의미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15장 20절에,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또 누가복음 21장 17절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제자들은 예수님으로 인한 여러 시험과 시련을 겪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다스리는 자,

다시 말해, 섬기는 자로서의 역량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모든 시험과 시련 속에서도,

아니 오히려 그것을 통해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셨던 것처럼,

제자들도 그 모든 시험과 시련을 통과하며 더 신실한 하나님의 종으로 세워질 것이기에,

예수님은 그들이 하나님 나라를 맡아 다스릴 사람들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과 시몬의 대화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 사랑하시는 제자를 하나님 나라의 지도자로 세우시기 위해

어떤 섬김의 역할을 감당하셨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31-32절 다시 한번 함께 읽겠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여기서 ‘까부른다’는 것은, 키에 담아 키 끝을 위아래로 흔들어

안에 든 곡식의 쭉정이나 검불 따위를 바람에 날리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곡식 까부르기 해보신 적 있습니까?

어릴 때 저의 부모님이 농사를 지셔서,

저는 어머님이 들에서 참깨 까부르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참깨를 털면 알곡과 쭉정이가 섞인 상태로 떨어집니다.

그럼 그걸 모아 적당량 퍼서 ‘키’라는 농기구에 담습니다.

그리고 키질 한다고 하는데, 두 손으로 키를 잡고 위아래로 반복해 흔들면,

가벼운 쭉정이들은 바람에 날려 밖으로 떨어지고 무거운 깨알들은 안에 남게 되는데,

가끔은 하얀 깨알들도 키 밖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 땅에 떨어진 깨알들을 집어들어 보면 대부분 속이 차있지 않은 것들입니다.

속이 비어 있기에 가벼워서 쭉정이와 함께 땅에 떨어진 것입니다.

사탄이 시몬을 비롯한 제자들을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다는 말씀은

그런 식으로 사탄이 그들의 믿음을 키질하고자 요구했다는 의미겠습니다.

구약성경 욥기에도 보면, 사탄은 욥을 시험하기 전에 하나님께 먼저 이를 요구하고,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욥에게 시련을 가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자, 그 사탄의 요구에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다 합니까?

예, 시몬을 위해 그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셨다 합니다.

미리 아셨음에도, 사탄이 아예 그 일을 못하도록 막으신 것이 아니라,

시몬이 그 시험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주님 손을 놓지 않도록,

오히려 그 시험과 시련을 통해 더 온전한 모습으로 빚어질 수 있도록,

뒤에서 먼저 기도해 주시고 기다려 주신 것입니다.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그가 넘어질 걸 아셨지만, 그가 돌이킨 후 감당할 역할을 소망하고 계심을 봅니다.

우리는 그렇게 돌이킨 후의 베드로가 넘어지기 전의 베드로보다 더 위대하다는 걸 압니다.

예수님은 오늘의 우리를 위해서도 그처럼 뒤에서 기도해주시는 분입니다.

히브리서 7장 24-25절에 말씀합니다.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그러므로 힘들 때, 시험과 시련을 당할 때, 그래서 불평이 생길 때,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그런 일들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실 때는

그분이 우리에게 관심이 없거나, 사랑하지 않으셔서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나에게 소망하시는 더 좋은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며,

그것이 이루어지도록 그분은 나를 위해 기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왜 기도하시는가? 먼저 우리 편에서 생각해 봅시다.

나의 필요가 채워지고, 내 뜻이 이루어지는 것만을 생각하면,

기도는 불필요해 보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이미 내 필요를 아시기에 딱히 구할 이유가 없어 보이고,

주님은 내가 구하는 대로 늘 이뤄주시는 건 아니기에 딱히 구할 이유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그분이 예비하신 가장 좋은 것 받는 일을 생각한다면,

기도는 우리에게 너무나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주실 준비가 되어 계시지만,

우리가 준비가 안 되어 못받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용서할 준비가 되어 계시지만,

우리가 진실한 죄 고백을 드릴 준비가 안 되어 있어,

용서의 은혜가 우리 안에서 역사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실 준비가 되어 계시지만,

우리가 다른 것에 마음이 가 있어, 그 더 좋은 것을 바라보지 못하기에,

예비된 그 가장 좋은 것을 받지 못합니다.

그래도 사는 데 별 문제 없다구요?

시험과 시련을 맞았을 때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26:41)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하라 말씀하시고,

또 친히 우릴 위해 기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왜 기도하시는가? 이번엔 하나님 편에서 생각해 봅시다.

힘으로 상대방이 어떤 걸 하게 만드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힘으로 그 사람의 마음도 얻을 수 있습니까?

그가 나를 진정 사랑하도록 만들 수 있습니까?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진실한 헌신과 열정이 솟아나오게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 일은 억지로 되는 게 아니죠.

진심어린 사랑의 실천만이 진심어린 사랑의 응답을 낳고,

내면에서부터의 진정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 인생에 고난을 허락하실까?

왜 모든 일이 쉽게 풀리게 해주지 않으실까?

역으로 생각해 봅시다.

우리 인생에 고난이 없고, 모든 일이 쉽게 풀린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찾을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을까요?

글쎄요. 별로 그럴 것 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 되어 가겠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바라시는 것은

그분과 한 마음 한 뜻으로 사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같이 사랑하고, 예수님 같이 섬기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일은 억지로, 혹은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니죠.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시는 그 눈으로 내가 나를 바라볼 수 있게 될 때,

비로소 조금씩 조금씩 발현되는 ‘진정한 나’의 모습이 바로 그것일 겁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시험과 시련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여실히 드러냅니다.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그의 진심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날 밤 그는 작은 여종의 질문에 엄청난 두려움을 느끼며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하였고, 이어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합니다.

비로소 그는 주님의 눈으로 자기를 보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 주님의 눈은 그의 실체를 꿰뚫어 보기만 하는 눈이 아니라,

이미 모든 걸 아시고, 이미 용서하시고, 그 모습 그대로 품어 주시는 사랑의 눈이었습니다.

그 사랑이 그를 변화시킵니다.

그 사랑이 그를 자유케 합니다.

그렇게 그는 사랑 안에서 주님과 통하였고,

이제 자발적으로 예수님 따라 낮은 곳으로 나아갑니다.

 

시몬아, 시몬아…

그의 이름을 이렇게 두 번 부르실 때, 예수님은 어떤 마음이셨을까?

계속해서 ‘베드로’란 예명으로 불리던 그가 여기서는 본명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사명 받은 제자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의 그를 향한 주님의 시선이 반영된 듯 합니다.

사탄이 그 사랑하는 제자의 믿음을 날려 버리려고 맹렬한 기세로 달려드는 상황에서,

앞으로 그가 겪어야 할 일들을 생각하며 스승은 안쓰러웠던 것이 아닐까?

인간으로서의 시몬은 약합니다. 넘어지기 쉬울 것입니다. 견디기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통과해야 합니다. 견뎌야 합니다. 돌이키고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그래야 ‘베드로’로 설 수 있습니다. 그래야 ‘반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자로 세워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를 위해 기도하신 것입니다.

기도하시고 품으시며 그 사랑하시는 제자를 섬기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섬겨야 할까요?

사랑하는 자녀들, 사랑하는 교우들, 사랑하는 친구들, 또 사랑하는 이웃들…

그들에게 닥칠 모든 힘들고 어려운 상황들을

우리가 미리 다 알고 차단해 줄 수는 없을 것이며,

또 그렇게 하는 게 진정 그를 위하는 일이라 볼 수도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미리 막아줄 수 있으셨음에도 그러지 않으시고,

시몬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기다려 주셨던 예수님을 생각합시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우리 안에서 작동하고 있음을 믿는다면,

그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도록 서로를 위해 기도해주는 일은

그 무엇보다 귀한 섬김의 실천이 될 것입니다.

사랑 안에서 기도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나타내시고, 주님 닮은 섬김의 삶으로 부르시는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마음에 성령을 통해 사랑을 부으셔서, 우리가 기꺼이 낮은 곳에 처하며 섬기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서로를 위해 기도해주는 우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