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21년 4월 11일)
- 누가복음 24장 13-35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알아봄의 은혜 - 눅24,13-35.docx
<누가복음 24:13-35>
13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18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19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20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22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24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들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28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29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33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시던 날에 두 제자가 예루살렘에서 약 11km 떨어진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가고 있었는지, 혹은 무엇을 위해 가고 있었는지는 언급되지 않습니다. 문득 한 사람이 그들 가까이로 와서 함께 걷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사람이 그분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보면서도, 알아보지 못하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영어로 ‘본다’는 것은 see라는 단어를 쓰고, ‘알아본다’는 것은 recognize라는 단어를 씁니다. See, but not recognize의 상황입니다.
보긴 보되 대충 보아서 한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오인하는 일도 있고, 보긴 보되 시력이 약해서 보아야 할 것을 못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기에, 어떤 사람들은 다수에게 인식되지 않은 채 한동안 시야에서 밀려나 있기도 합니다.
대부분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도대체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어땠기에 그들이 알아보지 못한 걸까? 하지만 이 질문 속에는 알아보지 못한 원인이 예수님에게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전과 같지 않아서 제자들이 못 알아본 것이다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전혀 다른 관점에서 이 상황을 묘사합니다. 본문 16절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알아보지 못한 원인이 그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 두 제자의 눈이 가리어져서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낯선 행인의 모습으로 가까이 다가오신 예수님이 그들에게 묻습니다. “무슨 얘기를 주고받으며 가십니까?” 그러자 그 두 사람이 얼굴에 슬픈 빛을 띠고 멈추어 섭니다. 그 중 한 사람 글로바가 되묻습니다. “당신은 예루살렘에서 오는 길이면서도 어찌 거기서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합니까?” — “무슨 일인데요?” — “나사렛 예수의 일 말이오. 그는 참으로 훌륭한 선지자였소. 그런데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그를 사형 판결에 넘겨 십자가에 못 박았소. 우리는 그가 이스라엘에 구원을 가져올 거라 기대했었다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대화 속에도, 또 우리들의 대화 속에도 이런 슬픈 빛이 드리워져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질병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고 있는 상황 속에서, 불의의 압제와 개인의 이기심이 수많은 생명을 짓밟고 있는 상황 속에서 우리가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을까요? 정말 예수님은 몰라서 물으시는 것입니까?
그럴리가요. 하지만 과연 그들은, 혹은 우리는, 일어난 일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기는 한 것입니까? 나사렛 예수의 일, 그것이 그렇게 슬픈 일로 끝나버린 것이던가요? 아닙니다. 그들이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아직 눈이 가리어져 있어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깨닫게 해주시려고 예수님은 그들 가까이로 오신 것이 아닐까요?
눈이 가리어진 사람들은 현실을 바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이미 부활의 아침, 기쁨의 새날이 밝았음에도, 여전히 죽음의 오후, 슬픔의 과거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그들에게 예수님은 과거형, 그저 깨어진 꿈일 뿐입니다.
눈이 가리어진 사람들은 또한 보이는 것에만 집착합니다. 잘 보지도 못하면서 말이죠. 이미 그들은 새벽에 무덤에 갔던 여인들로부터 놀라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들 말대로 무덤이 비어 있는 것도 확인했죠. 하지만 다시 살아났다는 그 예수를 직접 본 것은 아니라 합니다. 그래서 믿을 수 없다는 말이겠죠. 이 말을 다시 살아나 거기 서 있는 예수님 앞에서, 그분을 마주보며 하고 있는 이 상황은 얼마나 아이러니한지요!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일이 일어났는데 왜 그것을 믿지 못하는가? 자기 욕망, 자기 신념, 자기 비전에 갇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이미 예수님께서 수차례 제자들에게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귀담아 듣지 않았기 때문이겠죠. 그날의 제자들뿐 아니라 오늘의 우리도 자신이 그려논 그림 속에 갇혀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는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 낙심과 혼란 속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걸으시며 다시 가르치십니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 자세히 설명해 주십니다. 후에 그들은 고백합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지만 당시 그들은 그 행인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는 걸 염두에 둘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진 것은 예수님과의 재회로 인한 감격 때문이 아니라 말씀의 진리와 만난 감격 때문이었다는 뜻입니다.
이윽고 그들은 가려던 마을에 다다릅니다. 동행하던 행인은 거기서 더 가려 합니다. 만남과 교제는 거기서 끝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애초에 내가 생각했던 것이 여기까지니까 여기까지만 합시다, 그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고 적극적으로 강권합니다. “우리와 함께 여기 더 머물다 가시지요. 함께 더 있고 싶습니다.”
믿음은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면서 또한 적극적으로 얻는 것입니다. 믿음은 가만히 있는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내 삶의 자리에 예수님을 초청함으로써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말씀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예수님은 공간을 창조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진리와 만날 수 있는 공간, 믿음에 이를 수 있는 공간, 우리 안에 사랑이 꽃필 수 있는 공간… 그 공간을 창조하시고 거기서 그분은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예수님은 이 두 제자의 초대에 응하십니다. 그들과 식탁을 함께하십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그분이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실 때,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분인 줄 알아봅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보이지 않습니다.
이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설명할 길은 없습니다. 다만 이 일이 의미하는 바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에 그들은 보면서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이제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주님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나에게 다가오신 그분이 나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분이며, 또 부활하신 그분임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하나가 열리면 다른 것들도 열립니다. 알아봄의 은혜는 삶의 방향을 바꿉니다. 두려움과 슬픔에 눌려 있던 마음에 담대함을 불어넣습니다. 두 제자는 즉시 일어섭니다. 왔던 길을 되돌아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다른 제자들이 모인 곳으로 가서 자신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어떻게 만났는지 전합니다.
우리에게도 새로운 계시의 순간, 알아봄의 은혜가 꼭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다 안다 말할 순 없을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예수님을 아는 만큼 더욱 더 온전해져 갑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을 아는 만큼 더 바르게 이해할 수 있고, 우리와 관계된 사람들을 사랑하는 일도 예수님을 아는 만큼 더 잘 행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없이 잘 살아보려 하는 일만큼 어리석은 일이 또 없을 것입니다.
이 제자들의 경우처럼 때로 예수님은 우리 삶의 길에 낯선 이의 모습으로 다가오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예수님은 우리 주위에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과 그분 자신을 동일시하십니다. 그들을 돌보고 섬긴 것이 곧 그분에게 한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의인들은 황송한 마음에 예수님께 되묻습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여기 ‘본다’는 말이 계속 나옵니다. 물론 그들이 이웃을 섬길 때 본 얼굴은 예수님 얼굴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에 대한 섬김이 예수님 자신에 대한 섬김이라 말씀하시니, 이 예수님 말씀을 기억하며 사는 사람은 이제 보는 것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보는 그 사람에게서 예수님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주님을 놀라운 영적 시력으로 알아보며 살아가는 복된 제자의 삶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이 성령을 통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분이 내 삶의 여정에 다가오셔서 말씀하실 때, 그분을 가까이 초청하여 알아봄의 은혜를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