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 것인가?

<마태복음 4:1-4>

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고, 이미 설교도 많이 했던 본문이지만, 오늘 다시 이 말씀으로 설교하게 된 것은, 지난 주간에 우리 교회 아이들로부터 질문을 받으면서 이 말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기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과 관련된 아이들의 질문은 두 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왜 금식했나요?” 그리고 “예수님은 왜 돌들을 빵으로 만들지 않았나요?”

“하나님의 아들이어서 배고픔을 느끼지 않았던 건가요?”라는 질문도 있었는데, 본문에 “금식하신 후에 주리셨다’는 말이 나오므로, 이 질문은 따로 다루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배고픔의 고통을 느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금식했는가? 이 질문을 받았을 때, 떠오른 또하나의 질문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일부러 아무것도 안 드신 것일까, 아니면 먹을 것이 없어서 못 드신 것일까? 1절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광야로 가셨다는 말이 나옵니다. 광야에서 생활하는 데 필요한 것들을 철저하게 준비해 가신 게 아니었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사십 일을 금식하셨다’는 말은 마치 사십 일간 아무것도 먹지 않으리라 작심하고 기도하셨다는 느낌을 주지만, 당시 일반적인 금식 관습이 낮에는 안 먹고 밤에는 먹으며 금식기도를 이어가는 것이었음을 고려할 때,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셨다는 것은 일부러 작심하고 안 드셨다기보다는 먹을 것이 없어 못 드셨다고 보는 게 더 맞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누가복음에는 “날 수가 다하매 주리셨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 먹지 않음으로 인한 배고픔의 고통이 극점에 달한 상태를 묘사합니다. 바로 그 시점에 마귀가 시험하는 자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금식하신 이유를 그저 ‘거기 먹을 것이 없어서’라고만 말하기엔 부족함이 있습니다. 그 먹을 것 없는 광야에서 예수님은 왜 사십 일간이나 먹지 않고 지내신 것일까요? 사람들 가운데서 본격적인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기에 앞서, 하나님께 온전히 집중하는 시간,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분의 마음과 뜻을 깊이 묵상하는 시간을 갖고자 함이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아무 생활 대책도 없이 광야에 들어가 사십 일을 지낸단 말인가? 미친 짓 같지만 그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을 신뢰했던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주시는 것을 받으며 살리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3장에는 세례 요한이 나옵니다. 아시다시피 요한은 그의 뒤에 오실 메시야의 길을 준비한 사람입니다. 복음서 기자 마태는 이 세례 요한의 음식이 ‘메뚜기와 석청’이었음을 말합니다. 이 말씀을 읽은 우리 아이들 중 하나가 또 질문했습니다. “왜 요한은 메뚜기와 들꿀을 먹었나요?” 이 질문 때문에 또 생각했습니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이것은 요한이 광야에서 생활한 기간이 길었다는 것과, 광야에서 먹을 음식을 따로 준비해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는 광야에서 그에게 주어지는 음식을 먹으며 살았던 것입니다. 사실 그는 레위 지파 제사장 가문 출신이어서 직업과 생계가 보장된 삶을 살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광야로 들어간 이유는 무엇일까?

누가복음 3장 2절에 기록된 말씀이 그 대답일 것입니다.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받으며 살리라 작정하고 광야로 들어간 요한에게 하나님은 메뚜기와 석청을 주셨을 뿐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들려주셨던 것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이 마귀의 제안 속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진 특권과 능력입니다. 하지만 이 제안을 거절하시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발휘하신 특권과 능력은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무한한 신뢰였습니다.

마귀의 제안에 대해 예수님이 하신 대답 속에 당시 그분의 생각과 결심이 그대로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이것은 ‘빵’보다 ‘말씀’이 중요하다는 말인가요? 제가 보기엔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대립되고 있는 것은 빵으로 대표되는 ‘물질적 필요’와 말씀으로 대표되는 ‘영적인 필요’가 아닙니다. 둘 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것을 아십니다. 여기서 대립되고 있는 것은 ‘땅으로부터 사는 삶’과 ‘하늘로부터 사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사는 삶’, ‘하나님 주시는 것으로 사는 삶’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인용하신 이 말씀은 구약성경 신명기 8장 3절인데요, 그 말씀이 어떤 맥락에서 주어진 것인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먹을 것이 없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배고픔을 경험했습니다. 자기 백성으로 부르신 사람들을 하나님은 왜 그처럼 낮추시고 주리게 하셨을까요? 그들에게 가르쳐 주고자 하시는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살며,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여기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이라 번역된 부분은 사실 의역입니다. 히브리어성경에는 ‘말씀’이란 단어가 본문에 없습니다. 따라서 성경 원어를 따라 직역하자면,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이 아니라 ‘모든 것’이라 번역해야 맞습니다. 영어성경 NASB나 RSV에서는 이를 좇아 ‘모든 것’(everything)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Everything에는 물론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포함됩니다. 그러니 이 구절을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이라 번역해도 사실 크게 틀리진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어디 성경말씀 뿐이겠습니까? 말씀은 ‘사건’이 되고, 또 ‘양식’이 됩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것으로 이 땅의 모든 생명체가 살고, 또 새로운 역사가 만들어집니다. ‘모든 것’이란 표현 속에는 사람이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받아 사는 것이 성경말씀 외에도 많다는 사실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땅에서 나는 어떤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먹이실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택하신 방법은 ‘만나’였습니다.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려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듣도 보도 못하던 음식, 그들의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신비한 음식이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처럼 하늘에서 내리는 양식으로 자기 백성을 먹이셨을까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것으로 산다는 것을 그들에게 깨우쳐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만나는 그야말로 하늘,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게 분명히 보이는 양식이었으니까요. 후에 그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해 농사 지으며 사는 동안에도 이 사실을 잊지 않기를 하나님은 바라셨습니다.

물론 오늘의 우리는 이 ‘만나 세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우리 먹을 양식이 떨어지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본 세대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은 세례 요한도 마찬가지였고,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만나를 직접 눈으로 보고 먹었던 사람이라 해서 다 믿음의 사람이 된 것도 아니고, 만나를 맛보지 못한 사람이라 해서 다 불신의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옵니다. “예수님은 왜 금식했는가?” 광야에 먹을 것이 없어서! 왜 먹을 것이 없었는가? 아버지 하나님이 주시지 않아서! 여기서 잠시 멈추어 이 상황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도 유익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분이 사랑하시는 아들에게 무려 사십 일간이나 아무 먹을 것도 주시지 않은 상황 말입니다.

왜 그러셨을까? 마귀의 시험이 가능하도록? 하지만 그것은 결과이지 목적이라 할 수 없습니다. 더 긍정적인 목적과 이유를 우리는 예수님의 대답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으로 산다’는 것을 그 아들도 체험으로 알게 하기 위해서!

사십 일을 먹지 못한 사람이 배고픔의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별로 새로울 것이 없는 당연한 현상입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그 사람이 살아 있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말씀으로 시험을 이긴다는 것은 결코 당연하지 않은 놀라운 능력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은 그럴 수 있었을까요? 사람이 떡으로만 살지 않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것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왜 돌들을 빵으로 만들지 않았는가?”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살기로 결심했고, 또 그렇게 살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그분이 인용하신 그 말씀을 광야생활 내내 떠올리며 그 힘든 시간을 견디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우리로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초월적 능력으로 승리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인간적 연약함 속에서 우리도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승리하신 것입니다. 보통의 인간과 다른 조건 속에서 살며 승리하신 것이 아니라, 보통의 인간이 겪는 삶의 조건 속에서 하나님 주시는 힘과 지혜로 승리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5:15)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을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2:18)

우리 눈에 흔하게 보이는 돌들을 다 내가 원하는 어떤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이 세상 배고픔의 문제는 단번에 해결될 것이고, 우리 역시 생계의 문제로 더이상 고민할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마귀의 제안을 단번에 거절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으로 산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낮추시고 주리게 하신 이유, 그리고 그들에게 만나를 내려주신 이유,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를 광야에서 주리게 하신 이유, 그리고 그에게 마귀의 시험을 이길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 이유, 하나님이 오늘 이 시대를 사는 자기 백성들을 주리게 하시는 이유, 그리고 그들에게 그 힘겨운 삶을 견디고 이겨나갈 은혜를 허락하시는 이유, 모두 동일할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으로 산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말씀으로 모든 시험을 이기시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 수종듭니다. 여기 ‘수종들었다’는 말은 먹을 것을 비롯해 예수님의 필요를 채워주었다는 뜻입니다. 아마도 그것은 명령을 받고 수행한 하나님의 심부름이었을 것입니다. 이 천사들의 활동 또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것에 포함된다 할 것입니다.   

따지고보면,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먹고사는 문제로 염려하는 이유는 굶어 죽을까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좀 더 좋은 것 먹고 좀 더 윤택한 생활 하고 싶어서입니다. 아마도 “먹고살기 위해서!”란 말보다 인간세상에서 더 강력한 핑계꺼리가 또 없을 것입니다. ‘먹고살기 위해서’라 하면 조금의 부도덕쯤은 눈감아 주어야 합니다. ‘먹고살기 위해서’라 하면 조금 이기적으로 살아도 이해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먹고살기 위해서’라는 핑계가 하나님 나라에서도 잘 통할까요?

우리는 예수님이 이 부분에 대해 너무나 단호한 말씀을 하고 계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분명한 우선순위를 제시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일이 먼저, 그 다움이 우리의 필요이며, 이것은 하나님이 채워주실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고, 우리의 필요는 우리가 알아서 할 일일 것 같은데, 예수님은 반대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seek) 일은 우리가 할 일이고, 우리의 필요가 채워지게 하는 일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우리 인생은 늘 ‘먹고살기 위해서’라는 핑계 뒤에 숨어 엉뚱한 방향으로만 애쓰다 끝나버리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내 마음과 삶을 다스리시게 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내리는 결정, 내가 맺고 있는 관계, 내가 하는 일들, 나의 시간 사용, 물질 사용, 은사 사용… 이 모든 부분에 하나님이 주인 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가 이루어길 소망하며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삶이며, 예수님은 우리에게 여기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라 말씀하십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그에 필요한 모든 자원들을 우리에게 공급해 주시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런 삶을 실제로 살아가는 데 가장 방해꾼으로 작용하는 것이 ‘돈’, 즉 ‘맘몬’이라는 것을 예수님은 간파하십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6:24)

하나님의 일에 돈이 쓰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돈이 1번이 되는 한, 더이상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섬김이 될 수 없습니다. 먼저 많이 벌고, 그 후에 하나님을 위해 쓰겠다는 생각을 가지신 분이 있다면, 얼른 생각을 바꾸시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섬길 수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 앞에는 두 가지 삶의 길이 놓여 있을 뿐입니다. 하나는 ‘이방인과 같은 삶’,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따르는 삶’. 나와 내 가족의 필요를 채우는 일, 먹고사는 문제를 최우선순위에 두고, 하나님 나라 구하는 일은 뒷전에 놓고 사는 삶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하늘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알지 못하는 자의 삶, 곧 ‘이방인과 같은 삶’(마6:32)입니다. 반면, 하나님 주시는 것을 받아 살리라는 믿음 안에서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고 채우시는 은혜를 경험하며 사는 삶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하늘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아는 자의 삶, 곧 ‘예수님 따르는 자의 삶’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좀 무거운 말씀을 드렸는데, 이것은 생계의 최전선에서 살아가는 여러분 삶의 무거움을 고려치 않고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힘들다고 적당히 하려 하면 마음은 나뉘어지고 삶은 교착상태에 빠져들 뿐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분명한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의 말처럼,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제자의 길은 ‘와서 죽으라’ 하시는 길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다시 사는’ 길,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으로 거듭나는 길입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마귀의 질문에 예수님이 대답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대답해야 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으로 살 것이라” 이 말씀으로 예수님이 승리하셨던 것처럼, 그 예수님의 길을 따르며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으로 산다는 것을 깨우쳐 주심에 감사합니다. 이 믿음 안에서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며 예수님 따르는 삶 속에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