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예배-류광현

<요한계시록 5:1-14>

1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2 또 보매 힘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나 3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더라 4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아니하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5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7 그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니라 8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9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11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12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13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14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오늘 우리는 서로 다른 인종, 언어, 문화, 세대, 국적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오늘만이 아니라 벌써 이십 년 넘게 이곳 꼬빌리시 야곱의 사다리 예배당에서는 의식적으로 이런 모습의 예배가 드려지고 있습니다. 이십 년 전에는 물론 지금까지도, 이것은 대다수 교회들이 즐겨 따르는 예배방식이 아니며, 어떤 의미에서는 자연스런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일 같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이렇게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하는가? 오늘 본문 말씀이 하나의 이유일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최초 청자는 로마제국 하에서 고난과 박해를 겪고 있던 초기 교회 성도들입니다. 그들에게 저자 요한은 그가 성령에 감동되어 보았던 천상의 예배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전해줍니다. 하늘에 보좌가 있고, 그 보좌 위에 하나님이 앉아 계십니다. 그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가 있고, 그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앉아 있습니다. 이 24라는 숫자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와 초대교회의 열두 사도를 합친 숫자이며, 따라서 이십사 장로는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대표한다 하겠습니다. 그 보좌 주위에는 얼굴이 각각 사자, 소, 독수리, 사람 같은 네 생물이 있으며, 이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전체 피조물을 상징합니다. 요한은 이 네 생물이 밤낮 쉬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찬양하며 경배하는 것을 봅니다. 또한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자기의 관을 벗어드리는 모습을 봅니다. 이것을 보여주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짐승’으로 상징되는 제국의 권력자들, 또한 제국이 숭상하는 신들이 세상 역사를 통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이 세상에서 고난과 박해를 겪고 있던 그 시절에도, 또한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도,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 속에 현존하며, 역사의 주권은 하나님이 쥐고 계시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 안에서 인내하며 세상을 이기도록 부름받았다는 것입니다.

이어 요한은 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는 것을 봅니다. 안팎에 글씨가 쓰여 있고 일곱 인으로 봉해진 책이었습니다.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어 요한이 슬퍼하고 있을 때, 장로 중 한 사람이 말합니다.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그리고 이어서,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은 한 어린 양이 나아와 보좌에 앉으신 이의 손에서 그 두루마리를 취합니다. 이 어린 양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 두루마리를 취하셨다는 것은 그분이 세상 역사의 열쇠를 쥐고 계심을 뜻합니다. 그가 그 두루마리를 취하고 열기에 합당한 이유는 그가 승리했기 때문이며, 그 승리의 비결은 힘을 가진 사자가 도살당한 어린 양이 되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실로 이 어린 양 예수의 승리는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방식, 하나님이 그분의 권력을 행사하시는 수단이 무엇인지를 드러냅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를 고집하지 않고 자기를 비워 사람들과 동등한 위치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기를 십자가에 내어주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다시 살리셨고 그를 다시 높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승리는 폭력을 통한 승리가 아니라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에 의한 승리였습니다.

때문에 그분은 자격이 있습니다. 찬양과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십니다. 어린 양이 두루마리를 취하자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찬송을 위한 악기와 성도의 기도가 담긴 그릇을 들고 그 앞에 엎드립니다. 이어 수많은 천사들도 그 죽임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고 노래합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의 모든 피조물도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찬송합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 드려지던 예배는 이처럼 승리하신 어린 양, 일곱 눈으로 세상을 감찰하고 계신 예수님에게도 드려집니다. 성부와 성자가 이처럼 영광과 능력을 공유하고 있음을 선포하는 교회는 이 신학이 교회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에 어떻게 반영되어야 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에 존재하는 ‘일치’와 ‘차이’, ‘친교성’(communion)과 ‘타자성’(otherness)을 반영하는 교회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다양성 속에서의 하나됨’을 이루어가는 교회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자기를 비우고 낮추며 내어주는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일 것입니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부르는 ‘새 노래’ 속에서 승리하신 어린 양과 교회와의 관계가 묘사되고 있습니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9) 여기 ‘사다’(구속하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일종의 경제용어입니다. 당시 전쟁포로가 됐던 사람을 돈 주고 사서 집으로 돌려보내는 상황에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노예가 된 사람을 누군가 대신 값을 치르고 사서 자유케 해주듯, 예수님이 그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하여 하나님께 되돌리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속된 하나님의 백성이 어느 한 인종, 한 언어, 한 국적의 사람들만이 아니라는 사실이 언급됩니다. 초기 교회들 안에 유대인과 헬라인, 노예와 자유인, 남자와 여자, 할례파와 무할례파, 노인과 젊은이가 함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런 다양성과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함께 동등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는데, 이는 그들 모두가 어린 양의 피로 구속받았다는 동일한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노래는 다음과 같이 이어집니다.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10) 이것은 오래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부르셨던 일을 연상시킵니다(출19). 하지만 요한은 이를 둘로 나누어 ‘나라와 제사장들’로 표현합니다.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해 탄생한 교회를 현세에서 막강한 권력을 자랑하고 있는 로마제국과 의식적으로 대비시키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교회는 일종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로마제국과 같은 방식으로 통치되는 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사랑의 통치를 구현하며 증거하도록 부름받은 공동체가 교회라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그의 피로 구속하신 사람들을 ‘제사장들’로 삼으셨다 합니다. 구약시대 제사장은 특정 민족, 특정 지파에 속한 사람만 될 수 있었지만, 이제 성도들은 그의 인종, 언어, 성별, 계층, 세대, 국적과 상관 없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직접 누립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세상 속으로 퍼져가게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노래는 ‘새 노래’라 불립니다. 어린 양 예수를 통해 하나님이 하신 일이 역사에 터닝 포인트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공통점 때문에 함께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 속에 증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저는 서로 다른 배경의 사람들이 이처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유를 오늘 본문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 하였습니다. 요한이 보았던 이 천상의 예배는 이 땅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교훈하는 메시지입니다. 예배는 종교적 행위인 동시에 정치적 행동입니다. 예배는 내가 충성을 맹세하고 있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드러냅니다. 요한계시록이 쓰여진 시대상황 속에서 예배는 그리스도인 예배자들이 오직 하나님께만 충성하려 한다는 그 사실로 인해 로마제국에 대한 저항의 의미를 띄였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오늘날과 같이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한 지역에 모여 사는 다인종, 다문화 상황 속에서 교회가 ‘다양성 속에서의 하나됨’을 추구하는 것은, 한 편으로는 지배(domination)나 동화(assimilation)를 꾀하는 세상의 문화에 대해, 다른 한 편으로는 분리(segregation)나 분열(fragmentation)을 꾀하는 세상의 문화에 대해 저항하는 의미를 갖습니다.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우리처럼 만들려는 것’(assimilation)도,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우리 삶의 영역에서 배제시키려는 것’(segregation)도 편한 길일 수는 있지만 옳은 길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여기서 우리가 드리는 연합예배는 분열과 대립과 차별과 폭력이 만연한 이 세상에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가 임하길 바라며 드리는 소망의 예배요 믿음의 예배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있는 예배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과 우리 문화를 중심에 두려는 유혹에 저항하게 하고, 우리 자신의 문화를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려는 시도에서 돌아서게 합니다. 물론 예배는 그것이 표현될 수 있는 문화적 현장들을 필요로 합니다. 하지만 예배의 중심은 하나님이지 개별 문화가 아닙니다. 문화적 차이가 서로에게 위협이 아닌 축복으로 인식될 수 있는 공동체를 함께 만들어가는 일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공동체에 아름다움과 힘과 부요함을 더해주는 축복으로 말입니다.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하나님을 예배할 때, 거기에는 익숙함의 공간과 더불어 낯설음의 공간도 존재합니다. 누군가에게 그것은 그저 거북스런 조건으로 여겨지겠지만, 바로 그 공간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하는 공간이 될 수 있습니다. 예배 중에 아무 불편한 요소도 없다면, 익숙한 것 너머로 나를 밀어내줄 요인이 하나도 없다면, 또한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날 여지가 전혀 없다면, 거기에는 신비를 위한 공간도 없을 것이고, 우리 마음과 삶 속에 하나님이 역사하실 공간도 없을 것입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함께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은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을 신비로운 방법으로 새롭게 빚어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곳 꼬빌리시의 다민족 예배공동체는 하나님의 선교가 낳은 결실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함께 드리는 예배가 우리가 함께 전하는 복음입니다. 이 함께함의 여정 속에서 우리가 함께 부를 ‘새 노래’가 있을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