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예배-요8:31-38

요한복음 8: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말에 거하면 참으로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33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37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아노라 그러나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38 나는 아버지에게서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여러분은 자유롭습니까? 일반적으로 ‘자유’는 남에게 구속을 받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뜻에 따라 행동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나의 모든 행동이 나 자신에게서 말미암은 상태를 일컬어 보통 우리는 ‘자유롭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의 침략이나 독재 정권의 탄압과 같은 외부의 강제에 의해 자기 뜻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권리를 빼앗겨 본 사람들은 그 자유의 소중함을 잘 알 것입니다. 체코도 한국도 그 일을 경험한 역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자유롭지 않게 하는 것은 그런 눈에 보이는 외적인 요인들만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것들에 얽매여 내가 뜻한 바대로 살지 못하고 원하지 않는 어떤 일들을 자꾸 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무언가에 중독된 사람에게서 확연히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보통의 사람들도 자신이 그런 상태에 있음을 때때로 인식하곤 합니다. 일찍이 바울은 그런 상태에 있는 인간의 실존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19,24)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런 상태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길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말-제자-진리-자유. 마치 이것은 앞엣 것이 뒤엣 것을 가능케 하고, 다시 그것이 그 다음 것을 가능케 하는 연쇄구조 같습니다. ‘자유롭게 되는 것’은 ‘진리를 아는 것’에서 비롯되고, ‘진리를 아는 것’은 ‘제자가 되는 것’에서 비롯되고, ‘제자가 되는 것’은 ‘예수님 말씀에 거하는 것’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자유롭게 되기 위해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무엇을요? 진리를! 참된 것을 알게 되면 해방되어 자유로워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의 축적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깨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깨치고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두운 곳에 빛이 비칠 때 이미 그곳에 존재하던 것들을 비로소 밝히 보고 그 실체를 알게 되듯이, 이전과는 다른 차원, 더 깊은 차원에서 새로 보고 더 온전히 알게 되는 일을 의미합니다. 참되게 알지 못하면 해방될 수 없습니다. 무엇이 문제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면 거기서 벗어나는 일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더 나은 것을 알지 못하면 이전에 있던 곳을 나와 새로운 자유의 땅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진리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참된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우리는 자유로워집니다.

 

진리는 계시됩니다. 열려야 보이고 알게 됩니다. 진리는 아무에게나 계시되지 않습니다. 진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계시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란 예수님의 말씀에 거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혹은, 말씀(로고스)이신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예수님의 말씀에 ‘거한다’ (meno)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붙들고’(hold) 그 안에 계속 ‘머문다’(abide in)는 뜻입니다. 제자는 예수님의 말씀 중에 자기 마음에 드는 것만을 붙잡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에게 도움이 될 것 같으면 그 안에 머물고 그렇지 않으면 그 밖에 나가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제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나선 사람이며, 예수님과 늘 함께 거하며 배우는 사람이고, 예수님께 한 걸음 더 나아가 질문하는 사람이며, 예수님이 열어 보여 주시는 것을 받아 행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초기 제자들은 “와서 보라”는 예수님의 초청을 받고 가서 그분이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였습니다(요1:39). 오늘의 우리 역시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 나아가 그분이 계신 데를 보고 그분과 함께 거하는 제자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진리는 바로 그 사람들에게 계시되며, 그렇게 참된 것을 깨달은 결과가 자유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께 보냄받아 세상에 왔으며, 그가 하는 모든 일은 그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는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또한 그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며, 그가 하는 모든 말은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 그를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에게서 보고 들은 것을 나타내는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거하는 것이 진리를 아는 데 이르는 길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하나님을 눈으로 보지 못하였지만 아버지 품 속에 있던 독생자, 가장 가까이에서 그분을 보았던 하나님의 아들이 그 참되신 하나님을 세상에 나타내었기 때문입니다(요1:18). 진리는 참되신 하나님과 그분의 선하신 뜻이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진리를 이 땅에 드러내는 빛입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세상의 흐름에 이리저리 휩쓸리며 살지 않고 시냇가에 심긴 나무처럼 예수님의 말씀에 뿌리박고 거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믿음의 한 걸음을 내딛어본 사람, 예수님의 말씀에 반응하여 부르시는 곳으로 나아간 사람만이 거기서 새롭게 경험하며 보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거하는 이의 마음과 삶 속에 진리의 빛이 비쳐질 때 모든 어둠에 속한 것들이 밝히 드러납니다. 그 진리의 빛이 비쳐진 곳에서 우리는 그간 나를 지배하며 얽어매고 있던 것들의 실체를 분명히 깨닫습니다. 참되신 하나님과 그분의 선하신 뜻에 비추어 볼 때 그것들이 얼마나 악하고 거짓된 것들인지 깨닫고 거기서 벗어나길 소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생명의 빛 되신 예수님을 따라 나아가는 가운데 마침내 우리는 새로운 자유의 땅에 서게 됩니다. 이처럼 자유의 삶을 위해 우리는 어떤 ‘말’에 거해야 합니다. 어둠을 밝히는 빛과 같은 참된 말에 거해야 합니다. 그 말은 곧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 예수님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은 그러나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여러분, 이 말이 사실일까요?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다는 말은 맞지 않아 보입니다. 이전에 그들의 조상은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했었고, 바벨론 포로기를 겪기도 했습니다. 그 후로도 유대인들은 계속 이방나라들의 압제 아래 있었고, 그 예수님 당시에도 로마제국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왜 그들은 자기들이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다고 말하는 걸까요? 아마도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지금 로마의 압제 아래 있다고 우리를 종으로 보는가? 누가 뭐래도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다. 로마가 힘으로는 우리를 종처럼 부릴 있을지 몰라도 우리의 정신은 누구도 노예로 삼을 없다! 어쩌면 우리 주위에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이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나는 내가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자꾸 자유 구원이니 얘기하면서 나를 귀찮게 하는가? 그런데 내가 자유롭다고 주장하는 것과 실제 내가 자유로운 것과는 엄연히 다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실제로는 자유롭지 않은 상태에 있다고 보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무슨 뜻입니까? 그들이 죄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들이 죄에 속박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 상태 그대로 있는 한 그들은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구체적으로 무슨 죄를 범하고 있다는 말씀일까요?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거스르며 하나님께 보냄받은 그분의 아들을 죽이려 하고 있는 것이니 말입니다. ‘죄’를 뜻하는 헬라어 ‘하마르티아’에 담긴 의미 그대로, 그들의 생각과 행동은 ‘과녁을 빗나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예수님을 죽이려 할까요? 예수님으로 인해 그들의 안전과 자유가 위협받는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요11:48) 이것이 당시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의 우려였습니다. 예수로 인해 폭동이 일어나 로마가 유대 나라를 전멸시키는 상황을 걱정했던 것입니다. 로마제국 하에서 그들이 어렵사리 확보하고 있던 최소한의 안전과 자유, 비록 제한적으로나마 누리고 있던 그것마저도 잃게 될까 두려웠던 것이고, 그들에게 예수님은 그런 상황을 초래할 수 있는 위험인물로 비쳐졌던 것입니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그들 스스로 만들어 놓은 틀이 너무나 견고해서 예수님의 말씀이 뚫고 들어갈 여지가 없습니다. 이미 그 속이 다른 것들로 꽉 차 있어서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새로운 것을 담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튕겨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없애버리려는 것입니다. 자기의 틀 속에 고분고분 들어오지 않는 사람들을. 이것은 아이러니입니다. 그들을 살리고 자유케 하려고 오신 예수님이 그들에겐 자기 안전과 자유를 위협하는 존재로 여겨져 그를 죽이려는 상황이니 말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들이 상황을 정확히 간파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자기 집’에서 내몰려 한다는 생각 말입니다. 확실히 예수님은 그들이 거할 집을 바꿔주고자 하십니다. 하지만 단순히 집을 빼앗는 게 목적이 아니라 참된 안전과 자유가 보장되는 더 좋은 집으로 그들을 인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종은 언제나 주인으로부터 받을 상이나 벌을 염두에 두고 주인에게 반응합니다. 종은 주인의 집에 거하면서도 언제든 쫓겨날 수 있다는 두려움 속에 거합니다. 그래서 종은 최소한의 자기 안전과 자유를 확보하는 길을 스스로 뒤로 마련하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존재의 기반 위에서는 참된 안전과 자유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들은 다릅니다.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아들은 아버지의 집에 있을 때 쫓겨나리라는 두려움을 갖지 않습니다. 설령 그 집 밖을 나오게 되더라도 언제든 다시 돌아올 수 있음을 의심치 않습니다. 언제나 아들은 두려움 속에서가 아니라 사랑 안에서 아버지에게 반응합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방식입니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요10:17-18)

 

이 예수님에게서 우리는 참으로 자유로운 한 인간의 모습을 봅니다. 그는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아들은 영원히 아들입니다. 그리고 아들은 아버지의 집에 영원히 거합니다. 그래서 아들은 자유롭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한 마음 한 뜻으로 행하는 데 있어 자유롭습니다. 참으로 복된 소식은 이 아들의 권세가 빛으로 오신 그 아들을 영접하는 모든 사람에게 약속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9,12) 예수님이 누리셨던 자유로운 아들의 권세, 즉 강제로나 억지로가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과 일치된 마음과 뜻을 따라 자유로이 행할 수 있는 권세를 그를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도 주셔서 누리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가 가까웠음을 아시고 예수님은 남겨질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1-3) 예수님은 그분의 말씀에 거하며 그분의 길을 따르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한 거처가 아버지 하나님의 집에 예비되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심지어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그 거처는 그들이 이 땅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자리에도 마련될 수 있다는 말씀도 하십니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14:23)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안정감의 토대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약속된 이 영원한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시고 기다리시는 집, 하나님께서 친히 오셔서 함께 거하시는 집, 그보다 안전한 집은 없을 것입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후5:1) 이 소망 위에 서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갈 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던 것처럼 예수님 말씀을 따라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히11:10) 예수님의 말씀은 기존에 내가 거하던 집을 그저 무너뜨리기만 하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더 나은 집, 참된 자유와 안전을 보장해주는 집으로 인도하는 생명의 말씀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거짓과 폭력이 만연한 세상 속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향해 벽을 세우고 자신이 만든 틀 속에 스스로 갇히곤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나와 내가 속한 집단, 내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를 보호하고 제한적으로나마 자유를 보장받으려는 몸짓이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틀이 또 하나의 절대가 되어 그 안에 고분고분 들어오지 않는 사람들에게 악을 행하는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평화는 내 틀 속에 들어오지 않는 이들을 배척하거나 제거함으로써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화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가해자가 먼저 잘못을 스스로 인식하고 피해자에게 용서를 비는 것이 화해의 출발점일 것 같지만, 그런 식으로 화해가 이루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자기를 비워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기대한 대로 움직이지 아니하고 그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십자가로 나아가셨습니다. 그것은 섬김의 길이었지만, 그를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과 한 마음 한 뜻으로 행하는 자유로운 아들의 길이었고, 또한 자유케 하는 길이었습니다.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은 그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자유케 하시려고 그가 친히 나무에 달려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신 것이며, 또한 부활하심으로 후에 그를 믿고 따르는 모든 이에게 산 소망이 되신 것입니다. 그가 십자가에 달려 두 팔을 벌리심은 우리 모든 죄인을 그의 가슴에 품으심이요, 아버지 하나님의 집에 우리 모두를 위한 거처를 마련하심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걸어가신 용서의 길이요 사랑의 길, 생명의 길이요 자유의 길, 또한 화해의 길이요 평화의 길입니다. 오늘 이곳 꼬빌리시 야곱의 사다리 교회당에 이처럼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것은 그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이 여기 있는 각 사람 마음에 비쳐들었기 때문이며, 우리가 그분에게서 들었던 말씀이 우리를 자유케 하는 진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를 매여 있던 죄에서 해방하여 우리 속에 하나님을 위한 공간, 또 다른 사람들을 위한 공간을 창조합니다. 우리를 진정 자유로운 삶으로 초청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여기 있습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