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합 예배 (2021년 6월 6일)
- 고린도전서 3장 16-17절
- 설교자: Ondřej Kolář 목사
- 2021.6.6 연합예배 순서지 + 설교문.docx
꼬빌리시 야곱의 사다리 교회당 건축 50주년 기념 예배 설교문
<고린도전서 3장 16-17절>
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오늘 우리는 우리 교회의 개관 기념일을 맞이했습니다. 성경 속에서 오늘 본문 외에 교회당(kostel)에 관한 언급이 있는 다른 곳을 찾아볼 수 있겠습니까? 쉽지 않습니다. 성경을 펼쳐놓고 볼 때 우리는 성경 어디에도 교회당이라는 언급이 없음을 알게됩니다. 구약에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아주 간략한 언급이 나오기는 합니다. 그러나 유대인 성전과 기독교 교회는 실제로 동일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초창기부터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모든 동물제사의 완전한 종식으로 인식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희생 후에 이제 더 이상 어떤 동식물제사나 다른 희생제사는 필요치 않고 허용되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이 이미 행해졌고 주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다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교회당에서 구약의 제사와 같은 희생이 더이상 드려지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예수님의 죽으심 후 몇 십 년도 못 되어 완전히 허물어졌으며 다시 복구되지 않아 지금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에게는 큰 비극이었고 크리스쳔들에게는 종교발전의 자연스러운 결과로 여겨졌습니다. 계시록을 통해 우리는 심지어 새 예루살렘에서는 성전이 필요없음을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성전은 필요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성도들과 함께 거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의 성전과 계시록의 성전이 필요없는 새 예루살렘 사이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성전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했던 예루살렘 성전은 지금은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대면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시간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성전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어두운 시대를 살아간다고 할 수 있을까요?
신약성경 속의 증인들의 대답은 놀랍고 충격적입니다.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를 사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전이 바로 우리 크리스천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주님께서 이 세상에 친히 계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으로 이 땅에 오셔서 믿는 자들 안에 함께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전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더이상 드릴 필요가 없기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 각자 안에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특정한 장소에서 하나님을 찾거나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성소요 성령의 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아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에게 가까이 계십니다.
여기 우리가 성령의 전이라는 바울의 언급은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여기서 조금만 더 나가면 우리가 하나님이라는 데까지 나가게 되는데 이는 치명적인 오류입니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는 신성의 번쩍거림조차 없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하나님이고 무엇이 하나님이 아닌지조차 진술하거나 규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일 뿐입니다. 여기에 즉시 덧붙여야 할 것은 우리의 혼과 육이 성령님께 거룩하고 합당한 거처를 제공할 만한 그런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전이 된 것은 우리에게 무슨 자격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소중히 생각하십니다. 우리를 끝없이 쉼없이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팔 벌리고 있는 곳 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은 곳에, 마음의 완고함이 있는 곳에, 불신과 두려움, 변명이 있는 곳에 오십니다. 또한 우리의 육에, 쉽게 부서지고, 신뢰할 수 없고, 제한적이고, 병들기 쉬운 육에 오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혼과 육에서 무엇을 찾으실까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가장 숨기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방문객에게 보여주고자 하지만 이내 보여줄 것이 없음을 깨닫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가장 자신있게 보여드리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초라하고 볼품없는 거처에 내려오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단지 우리와 함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이 무슨 의미인지를 아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이는 우리의 선한 행위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선물입니다. 우리는 거룩합니다. 우리가 거룩하고 흠없는 삶을 살기 때문이 아니라 성전이 본질적으로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성전에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이러한 사실은 위로와 기쁨이 되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 거룩한 부담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혼과 육의 성전에 다른 것을 집어넣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우리를 당신의 소유물로 규정하십니다. 우리에게 권리를 주장하십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만 속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다른 영들, 악한 영들이 거할 곳이 없습니다. 우리의 혼과 육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다른 것을 탐닉해서는 안 됩니다. 낯선 침입자가 우리의 거처를 침범하고 하나님의 거처를 차지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비록 스스로 노예가 될지라도 다른 주인들의 손이나 권력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누가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였습니까? 바울은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성전을 파괴하셨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전을 파괴하실 수 있습니까? 우리는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왜 성전이 파괴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불신에 대한 벌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더 이상 속하기를 그만뒀을 때,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께 내어드리지 않고 그 마음의 자리를 우상들에게 내어줬을 때, 그에 대한 벌로 이방 민족들을 통해 성전이 무너질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누가 하나님께 속하기를 그만두고 다른 사람의 종이 될 때, 그렇게 함으로 인해 자신의 성전을 더럽힐 때, 그의 삶에서 하나님을 내어 쫓고 하나님 자녀의 신분을 버릴 때, 그의 결국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사람의 삶은 몰락으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
다시 교회로 돌아갑시다. 우리는 무엇이 교회가 아닌 것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교회이고 무엇이 중요합니까? 신약성경에 종종 언급된 한 건물을 떠올려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것은 회당입니다. 말 그대로 모임의 장소입니다. 믿는 자들의 만남의 장소, 기도, 찬송, 찬양, 설교 교육의 장소. 물론 제사의 장소는 아닙니다. 회당에서 우리는 종종 가르치시고 치료하셨던 예수님을 만납니다. 회당은 성전과 달리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습니다. 아직 그 효력을 상실하지 않았습니다. 회당과 교회는 둘 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저는 어떤 의미에서 회당과 교회는 거룩한 장소라고 감히 말하고자 합니다. 즉, 교회당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거룩합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확신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고, 그리스도를 따를 힘을 얻기 때문에 거룩합니다. 교회당은 다른 곳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더 가까이 계실 것이기 때문에 거룩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매 순간 매 장소에서 우리에게 가까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당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전파되고 성례가 거행되기 때문에 거룩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대면하실 때까지, 그러나 하나님의 영 안에서 보이지 않게 계시는 동안에, 교회당은 우리가 목적지를 향해 가는 길, 그 도상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표시로 여기에 있고 또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때로 멈추기도 하고 복음으로 새 힘을 얻기도 해야 합니다. 여기에 더해 우리 꼬빌리시 교회당은 성령님은 사람과 민족과 인종과 문화를 구별하지 않는 분이시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한 하늘 아버지의 자녀들이라는 사실까지 일깨워주는 교회당입니다. 아멘
(번역: 김영만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