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21년 10월 10일)
- 마가복음 4장 1-23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예수님의 설교 - 막4, 3-9, 33-34.docx
<마가복음 4 : 1-23>
1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바다에 떠 있는 배에 올라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닷가 육지에 있더라
2 이에 예수께서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시는 중에 그들에게 이르시되
3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5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하지 못하였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삽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9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10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 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와 더불어 그 비유들에 대하여 물으니
11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12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13 또 이르시되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
14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15 말씀이 길 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16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17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18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19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20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21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22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23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가 이천 년 전 예수님의 설교를 듣는 무리들 중에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을 전하십니다.
어떤 농부가 씨를 뿌렸다. 더러는 길바닥에 떨어져서,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더러는 자갈밭에 떨어져셔, 금세 싹이 났으나 뿌리내리지 못해, 해가 뜨자 곧 시들어 버렸다. 더러는 가시떨기 잡초밭에 떨어져서, 싹이 났음에도 잡초 틈새에 짓눌려 아무 소득이 없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져서, 무성하게 자라 농부가 생각지도 못한 큰 결실을 맺었다.
그리고 이어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이 말씀을 남기고 홀연히 그 자리를 뜨십니다. 자, 이제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설교 끝났으니, 이제 소지품 챙겨 집에 가실 건가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설교는 누구나 들을 만한 쉬운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 속에 담긴 뜻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지금 농업에 관한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곡식 생산량을 늘리는 비결을 가르쳐주시는 건가요? 아니죠! 뭔가 다른 게 있는 것 같습니다.
조금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이런 해석을 내놓을 수 있을 겁니다: 같은 씨앗이라도 어떤 땅에 떨어졌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그렇죠.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정도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별로 새로울 것 없는 상식 수준의 얘기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단지 그 메시지 전하시려고 이 말씀을 하신 걸까요?
이 얘기를 처음 들은 사람들은 이 정도 이해에서 더 나아가기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기 계신 여러분들은 아마 이 말씀 속에 담긴 더 깊은 뜻을 이미 알고 있을 것입니다. 워낙 많이 들은 내용일 테니까요. 본문 14절 이하에 그 내용이 나오죠. 뿌려진 씨앗은 뭘 의미합니까? 예, 말씀이라 합니다. 그럼 그 씨앗이 떨어진 땅은요? 말씀 들은 사람의 마음 상태를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말씀의 씨앗이 길바닥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날쌔게 달려드는 사탄에게 바로 그 말씀을 빼앗겨버리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말씀의 씨앗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듣고 기꺼이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말씀이 그 사람 마음속에 뿌리내리지 못해 오래 가지 못하고, 후에 그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를 당하면 곧 넘어지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말씀의 씨앗이 가시덤불 아래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그 밖의 여러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가로막아 결실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리고 말씀의 씨앗이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들은 말씀을 잘 받아들여 많은 열매 맺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결국 그 사람 마음 상태가 어떠하냐에 따라 말씀이 그의 삶에 미치는 결과가 달라지리라는 메시지입니다. 이 속뜻을 이해한 사람들은 이제 어떻게 할까요?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겠죠. 그리고 그 마음이 좋은 땅이 될 수 있도록, 열매 맺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필요한 무언가를 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 말씀은 처음 들을 땐 누구나 쉽게 들을 만한 얘기지만, 그 속에 담긴 뜻을 알고 나면 매우 심오하고 도전적인 말씀임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의 ‘설교 내용’ 못지 않게 예수님의 ‘설교 방식’에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친절한’ 설교자 같지만, 가만 보면 결코 친절한 설교자가 아닙니다. 누구나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씀을 전하시지만, 듣는 사람 입에 모든 걸 다 떠먹여 주시진 않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방식으로 말씀을 전하시고, 어떤 방식으로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전해지는지 아는 일은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말씀을 전해야 하고, 어떻게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하는지와 연관되는 중요한 문제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기 있던 무리에게 그 하나님 나라 비유의 속뜻을 바로 다 설명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후에 예수님을 찾아와 그 말씀의 의미를 재차 물어본 사람들에게만 이를 알려주셨습니다. 큰 무리, 많은 사람이 같은 말씀을 들었지만, 그 말씀의 참된 의미를 깨달은 사람은 소수였습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나요? 다른 이들보다 지능이 더 뛰어났던 사람들? 아닙니다! 더 알기 원했던 사람들, 그 말씀의 속뜻을 참으로 이해하기 원했던 사람들, 그래서 한 번 더, 한 걸음 더 예수님께 나아간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로 그들이 ‘들을 귀 있는 자들’, ‘마음이 좋은 땅인 사람들’이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처음 던지신 말씀만 듣고 그 뜻을 한 번에 다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애초부터 그 말씀은 질문을 필요로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하지만 묻는 사람은 소수였어요. 이해할 수 없었음에도 왜 다수는 더 묻지 않았을까요? 마음이 길바닥 같고, 돌밭 같고, 또 잡초밭 같았기 때문이겠죠. 그 말씀에 의해 자기 마음과 삶이 근본적으로 새로워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처음부터 모든 걸 다 말해 주지 않으신 걸까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들려주신 후에 바로 이어서 그 속뜻을 다 설명해 주시면 되잖아요. 그럼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바로 다 듣게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하지 않으신 거죠?
12절에서 예수님은 구약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사람들이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도록 일부러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시는 거죠? 사람들이 깨닫고 돌이켜 죄사함 얻기를 바라지 않으신다는 건가요?
그럴리가요. 예수님의 의도와 마음이 그렇지 않다는 것은 본문 21-22절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등불을 가져다가 됫박 아래나 침상 밑에 두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놓지 않느냐?”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무슨 뜻입니까? 숨김은 결국 드러냄을 위한 것이며, 감춤은 결국 나타냄을 위한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은 사람들이 이를 들어도 바로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일종의 숨김이자 감춤이지만, 그러한 숨김과 감춤은 결국 드러내고 나타내기 위해 의도된 것이란 말씀입니다. 드러내기 위해 숨긴다, 나타내기 위해 감춘다는 뜻이 되겠죠.
그렇다면 왜? 왜 예수님은 이런 방법으로 말씀을 전하시는 걸까요? 왜 전하시는 말씀에 그런 숨김 장치를 해놓으시고, 더 알기 원해 재차 나아오는 사람에게만 그 감추인 속뜻을 알려주 는 방식을 취하신 거죠?
마태복음 7장 6절에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가치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좋은 것을 줘봐야 소용없습니다. 더 알고 싶은 마음이 없고 받아들일 생각도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심오하고 유익한 말씀을 들려줘봐야 소용없습니다. 더 많은 정보가 주어지면 듣는 이의 태도가 달라질 수 있지 않냐구요? 아니요! 마음이 딴 데 가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도 별 도움이 안 됩니다.
오히려 마음이 딴 데 가 있는 채로 어설프게 들은 그 말씀의 지식은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회개를 방해합니다. 하나님이 이사야를 백성들에게 보내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마음에도 없는 그들의 피상적인 회개를 하나님이 더이상 원치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말뿐인 회개, 진정한 마음의 변화 삶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 형식적인 죄사함의 의식들, 그렇게 마음속 찝찝함을 손쉽게 해결해버리고 다시 뻔뻔스레 이전의 삶으로 되돌아가는 모습, 이제 더는 보고싶지 않다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수히 말씀하셨어요: 너희 나무는 병들었다! 하지만 듣지 않아요. 하나님이 결단을 내리십니다: 내가 그 나무를 베어버리겠다! 아니, 하나님이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을 그리 하시면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답이 뭐죠?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사6:13) 하나님의 소망이 이처럼 소수의 남은 자들을 향해 있음을 봅니다.
예수님도 그처럼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며 재차 그분께 물으러 나아온 소수에게 집중하신 것입니다. 그가 그 사회에서 어떻게 여겨지는 사람이든 관계없이, 사람에 대한 그 어떤 차별도 없이, 예수님을 향해, 또 하나님 나라를 향해 믿음으로 발돋움하는 사람들, 바로 그들에게 예수님은 반응하시며 하나님 나라의 비밀과 능력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당시에 예수님께 병고침을 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어요. 심지어 예수님 옷자락에 손만 대었을 뿐인데 병이 나은 사람도 있었어요.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기 때문이죠.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병이 낫게 된 사람에게 꼭 이 말씀을 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께 나아가면 병이 나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 그것이 그 사람에게 없었다면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란 말씀입니다.
이와 대조적인 상황이 마가복음 6장에 나옵니다. 예수님이 고향 나사렛에 가셨을 때, 그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왜죠? 우리가 아는 그 ‘마리아의 아들 목수’ 예수가 어떻게 그런 일을 행할 수 있겠어, 라는 선입견 때문이었습니다. 그날의 일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5-6)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 예수님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분을 믿도록 설득하는 데 집중하지 않으셨어요. 그분을 향해 믿음을 발휘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도와주는 데 집중하셨습니다.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5:19)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향해 믿음을 발휘할 때, 예수님은 그에게서 아버지 하나님이 일하고 계심을 보았고, 이에 그 일을 도와 그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과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마음의 땅이 좋지 않은 사람들, 지금 들을 귀가 없는 사람들에 대해 하나님은 무관심하시다 말할 순 없을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 4절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말씀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밭이 좋은 땅이 될 수 있도록 뒤에서 보이지 않은 수고를 감당하고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거기에 더하여 우리 자신이 해야할 역할도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처음부터 마음이 좋은 땅인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지금 마음이 좋은 땅인 사람은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 지금껏 그 일을 성실히 수행해온 사람일 것입니다.
말씀과 믿음의 관계에 대해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롬10:14) 복음의 말씀을 들을 때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을 수 있고 그래야 구원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말씀과 믿음의 관계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는 또하나 중요한 원리를 말합니다. 이 복음의 말씀을 듣고도 그 말씀이 그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히4:2)
이로 볼 때, 예수님께서 사람들 사이에서 비유로 말씀하시고 그 속뜻을 바로 다 말씀해주지 않고 기다리신 것은 심령의 가난함과 믿음을 가지고 그분께 나아오는 사람들과의 이차적 만남을 위해 의도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들을 귀 있는 자들이 누구인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더 말해줘도 좋을 사람들이 누구인지, 예수님은 그렇게 분별하셨고, 마음이 좋은 땅인 그 소수의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더 열어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과 능력을 나타내주시는 방식이라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들어야 할 것인가?
말씀을 전하는 자는 모두에게 모든 걸 다 말해주려는 욕심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설교를 하려다 본질을 놓치고 대중이 듣고 싶어하는 말에 기울어지는 우를 범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번의 설교는 그 자체로 종착점이 아니라, 더 깊은 세계로의 영적 여정이 시작되는 출발점이 되면 좋을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자는 그 한 번의 들음으로 끝내지 않고 주님께 한 걸음 더 나아가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제가 나름 기도하며 설교를 준비하여 일주일에 한번 여러분에게 말씀을 전하지만, 저는 여러분의 상황과 사정을 다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말할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어요. 그 전하는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과 삶에서 실제적으로 역사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이후 여러분의 반응에 달려 있습니다. 그건 여러분의 몫입니다.
말하자면 목회자의 주일설교는 예수님이 많은 무리 앞에서 전하신 최초의 비유 말씀과 유사한 성격을 갖습니다. 그 안엔 많은 것이 들어 있지만, 또한 아직 많은 것들이 드러나지 않은 채로 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드러날 수 있을까요? 이 말씀이 오늘 나의 삶에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여러분 스스로 이 질문을 재차 던지며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질문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 내게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질문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 안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 잘 살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정도로 해두자’는 뜻입니다. 정말 말씀을 따라 살고자 몸부림치는 신앙인은 질문합니다. 그 질문 속에서 주님을 더 깊이 만나고, 참으로 열매 맺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말씀 안에서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고 삶 속에서 말씀의 열매 풍성히 맺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말씀을 통해 우리를 당신께로 부르시는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우리 마음이 좋은 땅이 되게 하시고, 주님 안에서 말씀의 열매 풍성히 맺는 저희의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