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21년 3월 21일)
- 마가복음 10장 46-52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 막10,46-52.docx
<마가복음 10:46-52>
46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 입성 전 예수님의 마지막 치유 기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여리고 마을에 오셨던 예수님이 허다한 무리와 더불어 그 마을을 나가실 때였습니다.
길 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던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바디매오’란 말은 ‘디매오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그의 정식 이름이라기보다는 사람들이 편의상 그를 부르던 호칭이었을 것입니다. 디매오의 아들 맹인 거지, 그는 그렇게 불리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예수’라 부른 것은, 그가 예수님을 메시야, 즉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자로 믿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는 보지 못하는 상태에 있었지만 들은 것에 기초하여 믿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를 꾸짖습니다. 당신이 끼어들 상황이 아니다, 잠잠하라 합니다. 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습니다. 더욱 크게 소리 지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께서 이윽고 걸음을 멈추십니다. “그를 부르라” 하십니다.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그러자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갑니다.
겉옷은 가난한 자의 모든 것일 수 있습니다. 신명기에서는, 가난한 자의 옷을 전당물로 취했을 경우 반드시 해질녘에는 돌려줄 것을 명합니다. 그날 밤 그가 그것을 입고 자야 하기 때문입니다(신24:12-13). 또한 구걸하는 자에게 겉옷은 적선된 돈이 떨어지는 자리입니다.
예수께서 물으십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보기를 원합니다!” 조금의 주저함도 없는 요청…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그 즉시 바디매오는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길로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때 예수님 일행은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여행길이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일을 앞둔 비장한 여정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 맹인 거지는 그저 귀찮은 방해꾼처럼 보이기 십상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외침은 모든 장애물을 극복하고 구원자 그리스도께 닿았습니다. 그 포기하지 않는 외침이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춰 세웠고, 마침내 그를 구원으로 이끌었습니다.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사람의 기도입니다. 나의 구원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는 것뿐임을 아는 사람의 간구입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 엄청난 양의 책을 읽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를 액면 그대로 정직히 바라볼 수만 있으면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쉬워 보이는 일을 우리는 잘 하지 못합니다. 우리 자신을, 또한 다른 사람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이를 먹고 지식과 경험이 쌓여갈수록 오히려 그 일을 더 못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상식을 뒤엎는 역설적인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18장 3절에,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또 이런 말씀도 있지요.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막10:23). 그럼 누가 들어갈 수 있나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5:3).
그리고 요한복음 9장에서는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9:39,41)
“Kyrie eleison – Pane smiluj se –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께 이 말로 나아가야 할 사람이 바디매오 뿐일까요? 우리 역시 주님의 긍휼이 필요한 사람들이 아닙니까? 주님의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이 아닙니까?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을 보십시오. 뭔가 문제가 있다는 걸 다들 느끼실 것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우리가 이 상황에서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어디서부터 무얼 어떻게 시작해야 합니까?
“Kyrie eleison –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 스스로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꾸지 못해요. 다른 사람을 더 낫게 만들 능력도 우리에겐 없어요.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도 이렇게 주님을 불러야 합니다.
바디매오처럼 우리에게도 치유가 필요합니다. 눈이 있어도,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눈이기에 치유가 필요합니다. 귀가 있어도,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하는 귀이기에 치유가 필요합니다.
손이 있어도, 행해야 할 것을 행하지 못하는 손이기에 치유가 필요합니다. 발이 있어도, 가야 할 곳으로 가지 못하는 발이기에 치유가 필요합니다.
머리가 있어도, 알아야 할 것을 깨닫지 못하는 머리이기에 치유가 필요합니다. 가슴이 있어도, 느껴야 할 것을 느끼지 못하는 가슴이기에 치유가 필요합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만약 지금 이 순간 예수님께서 이렇게 물으신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적선 좀 넉넉히 해주십시오!” 바디매오는 그렇게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삶을 예수님 안에서 소망하며 간구했습니다.
“보기를 원하나이다!” 지금껏 감히 꿈꿀 수도 없었던 놀라운 일, 하지만 그의 마음속 진정한 소원, 다른 누구도 해줄 수 없고 오직 예수님만이 해주실 수 있는 그것을, 그는 대담하게도,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아뢰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수님께 무엇을 구하시겠습니까? 저와 함께 이렇게 기도해보시면 어떨까요?
주여 보기를 원합니다! 당신이 보시는 것을 나도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나를 고쳐주소서!
주여 듣기를 원합니다. 당신이 말씀하시는 소리를 참으로 듣기 원합니다. 나를 고쳐주소서!
주여 행하기 원합니다. 당신이 기뻐하시는 일을 참으로 행하기 원합니다. 나를 고쳐주소서!
주여 깨닫고 느끼기 원합니다. 당신의 뜻을, 당신의 마음을, 참으로 깨닫고 느끼기 원합니다. 나를 고쳐주소서!
어느덧 나의 기도가 멈춰 있다면, 그것은 어느덧 소망하는 법을 잊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요한복음 5장에는 예수께서 38년된 병자를 치유해주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치유를 경험하기 전까지 이 병자는 오직 한 가지만을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천사가 내려와 물을 움직일 때, 다른 사람보다 먼저 연못에 들어가는 것.
예수께서 그에게 다가와 물으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러자 그가 대답합니다.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이 베데스다 세상에서 그는 언제나 패배자, 루저,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계속되는 실패의 경험 속에서 그는 얼마나 세상을 원망하고 제 신세를 한탄했을까요? 그 무력감 속에서 그는 더 나은 무언가를 소망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눈길이 그에게 머물고, 이윽고 그에게 다가오셨을 때, 그에게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문이 열렸습니다.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예수님은 다만 이렇게 말씀하셨고, 그는 즉시 나아 제 발로 그곳을 빠져나갔습니다.
진실한 기도는 기도하는 이의 내면 깊은 곳을 치유하고, 이전엔 꿈꿀 수 없었던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문을 엽니다. 예수님을 통해 보게 된 바디매오가 그 길로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된 것은, 그에게 회복된 것이 육신의 시력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바디매오처럼 우리도 이 기도로 주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 단순한 기도 속에서 모든 장애물을 극복하고 주님께 닿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과의 만남 속에서 온전한 치유를 경험하고 새로운 길 위헤 설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이 은혜를 체험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바디매오처럼 우리도 간절히 당신을 부릅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를 치유하시고 온전한 구원으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