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20년 10월 11일)
- 로마서 5장 1-5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예수 믿는 자가 누리는 복 - 롬5,1-5.docx
<로마서 5:1-5>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예수 믿는 자가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것에 대해 사도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논증하였습니다. 이어지는 5장 첫머리에서 바울은 그렇게 믿어 의롭다 하심을 입은 우리가 이제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복에 대해 설명합니다.
예수 믿는 자가 누리는 복, 첫 번째는 ‘화평’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화평’(에이레네/샬롬)이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죄악과 적대감의 장벽이 허물어지고 거리낌 없이 소통할 수 있게 된 화해와 화목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길이 뚫린 것입니다.
평화는 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것이지만, 국제적 평화건, 이웃간 평화건, 가족의 평화건, 개인의 평화건, 진정한 평화는 언제나 하나님과의 평화, 하나님과의 화목된 관계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첫 단추를 잘 꿰야 옷을 제대로 입을 수 있는 것처럼, 이 하나님과의 평화가 이루어질 때 다른 모든 관계도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시편 85편은 하나님의 구원을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는’ 일로 묘사합니다. ‘정의’와 ‘평화’, ‘칭의’와 ‘화목’은 함께 결합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립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평화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하나님은 그분과 우리 사이에 평화를 확립하시기 위해 당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주시고, 그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의로운 하나님 자녀의 신분을 부여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된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기본적으로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이러한 신뢰가 있습니다.
반면, 참된 평화가 없는 곳, 서로간에 적대감이 있는 곳에는 신뢰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자리, 그 마음을 지배하는 것은 불신과 불안입니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 누가 다 예측하고 제어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에게 현실의 고난은 그저 나를 해하려고 달려드는 누군가의 적대행위로만 인식되기 쉬울 것입니다.
권력기관에 대한 기본적인 불신이 있으니 부과되는 조치는 다 못마땅할 뿐입니다. 내 권리를 빼앗길까 불안한 마음이 있으니 다른 이에 대한 고려는 뒷전으로 밀려납니다. 뿌리깊은 불신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고, 이기심에 속박된 불안이 주위에 약한 자들을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고난의 순간을 앞두고 예수님은 남겨질 제자들에게 성령을 약속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바로 이 평화를 염두에 두고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성도들에게 권면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
다른 길이 다 막혀도 하나님께로 통하는 길은 뚫려 있습니다. 기도하십시오. 세상이 알지 못하는 평화, 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평화가 임할 것입니다.
예수 믿는 자가 누리는 복, 두 번째는 ‘은혜’입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여기서 바울은 ‘은혜’(카리스/헤세드)를 믿는 자가 ‘들어가 서 있게’ 되는 곳으로 묘사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어떤 새로운 장소로 들어가 서 있게 되는 일이란 뜻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곳으로 들여보내진다, 인도된다는 뜻입니다. 그곳은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미치는 곳,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이 역사하는 곳입니다.
일전에 어느 드라마에서 다음과 같은 명대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서 있는 곳이 달라지면, 풍경도 달라진다” 어느 자리에서 보느냐에 따라 현실이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서 있는 곳이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은혜의 자리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럼 보이는 것도 달라질 것이고, 행하는 것도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우리 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순간, 우리는 그분께서 이미 우리를 향해 문을 활짝 열어 놓고 계셨음을 발견합니다. 우리가 늘 있고자 원했던 그곳에, 마침내 우리가 서 있음을 알게 됩니다. (메시지성경)
왕의 궁전에 들어가는 것은 오직 왕이 호의를 베푸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장벽이 예수 안에서 허물어지면서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되었고 그분의 임재 안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 은혜와 관련해 사용된 두 개의 동사 ‘들여보내지다’와 ‘서있다’는 다 완료 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두 일 다 이미 우리에게 이루어진 일임을 나타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미 우리는 그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고 지금도 그 안에 확고히 서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첫 순교자 스데반은 은혜가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박해자에서 전도자로 변화된 사도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 고백하였습니다. 안디옥교회는 선교사역을 떠나는 바울과 바나바를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에게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였습니다.
바울은 그의 편지에서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였습니다. 그는 고린도후서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넘치게 하셔서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신다’ 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에서는 하나님이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디모데후서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라’ 권면하였습니다.
은혜는 예수 믿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호의입니다. 그 무엇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또한 은혜는 예수 믿는 자들을 굳게 세우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 무엇도 우리를 영원한 패배와 수치의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없습니다. 이 은혜 위에 서 있을 때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도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사도 야고보는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습니다. 겸손한 그릇에 은혜가 채워진다는 뜻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가 더욱 많을지어다’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우리 마음은 은혜로 채워집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은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라는 말로 마쳐집니다. 박해의 시대를 살아가던 당시 신자들에게 은혜는 그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베드로 역시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 격려하였습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벧전5:10)
은혜는 선물로 받는 것이나, 받는 이에게도 최소한의 노력은 필요합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권면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
예수 믿는 자가 누리는 복, 세 번째는 ‘기쁨’ 혹은 ‘즐거움’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예수를 믿게 된 사람은 소망이 바뀝니다. 바라고 구하는 것이 바뀝니다. ‘자기 영광’을 구하던 삶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삶으로 바뀝니다. 예수를 믿게 된 사람은 또한 즐거움의 이유가 바뀝니다. 내가 바라는 것을 이루며 즐거워하던 삶에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이루며 즐거워하는 삶으로 바뀝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새롭게 뚫린 길로 들어가 은혜의 자리에 서 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뵙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속성이며 하나님이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광스런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빛 가운데 거하시며 그분의 존귀와 위엄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영광 받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영광을 결코 빼앗기지 않으실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 안에서 우리를 영화롭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주실 때, 하나님이 우리를 알아주실 때, 하나님이 우리를 인정해 주실 때 우리는 영광스럽게 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는 뜻입니다. 사도 요한은 증언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또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4:6)
하지만 이 하나님의 영광은 세상 끝에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과 함께 확연히 드러날 것입니다. 그날에 예수 그리스도는 큰 권능과 영광으로 나타나실 것이며(막13:26),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 그분의 영광을 함께 받을 것이고(골3:4/롬8:17), 탄식하던 피조물들도 썩어짐에서 해방되어 영광의 자유에 이를 것입니다(롬8:21). 새 하늘과 새 땅, 회복된 하나님의 나라 전체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차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바라고 즐거워하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던 우리가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소망은 우리의 창조주요 구속주요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 그리고 그분 앞에서 영화롭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소망 중에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약속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장된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우리에게서 이 기쁨을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 내면에서 솟아나는 비밀스런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궤가 마침내 성 안으로 들어올 때 다윗은 옷이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춤을 추며 즐거워했습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은 예수 이름을 전하다 박해를 받으면서도 오히려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에 감사하며 기뻐하였습니다.
국가대표 축구선수들이 자기 가슴에 달고 뛰는 태극마크를 자랑스러워하며 힘든 줄 모르고 그라운드를 누비듯이, 우리 십대 자녀들이 좋아하는 아이돌 스타와 일심동체가 되어 함께 울고 함께 웃고, 그 오빠 생각을 하면 밥을 안 먹어도 마냥 행복하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내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에 자랑스러워하며 세상의 그라운드에서 이미 승리한 싸움을 싸워나갑니다. 하나님과 일심동체가 되어, 그분과 같은 것을 소망하며 기쁨으로 그분의 뜻을 이루어갑니다.
상황이 좋을 때 뿐 아니라 좋지 않을 때에도. 평온하고 풍족한 때 뿐 아니라 어려움과 힘듦 속에서도.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그처럼 확고한 약속과 소망에 기초한 것이므로 바울은 또한 담대히 말합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바울은 ‘환난을 즐거워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고 말합니다. 상황이 안 좋을 때에도 여전히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기쁨의 이유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정신이상자들이 아닙니다. 다만 고갈되지 않는 기쁨의 이유를 가진 사람들, 그럴 수 있는 소망의 원천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라 할 것입니다.
고난은 타락한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기 위해 거쳐갈 수밖에 없는 길입니다. 또한 고난은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을 더 온전히 빛어가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고난 없이 인생을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누구에게나 고난의 시간은 찾아옵니다. 고난을 피하는 것을 목표로 사는 사람은 어리석습니다. 고난의 시간을 유익하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사는 사람이 지혜롭습니다.
바울은 예수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고난은 유익한 것이 될 수 있다 말합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인내’란 ‘어려움에 굴복하지 않고 맞서며 견디는 능력’을 말합니다. 고난이 없다면 우리는 인내를 배울 수 없을 것입니다. ‘연단’으로 번역된 헬라어 도키메는 시험을 통과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성숙한 성품’, ‘검증받은 자질’을 뜻합니다. 이 도키메가 ‘쇠붙이를 불에 달구어 두드려서 단단하게 한다’는 의미의 ‘연단’으로 번역된 것입니다. NIV 영어성경에서는 이것을 ‘character’라는 보다 쉽게 와닿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고난 중에 인내하는 사람 속에 형성되는 좋은 캐릭터, 즉 성숙한 인격이나 성품을 말합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이룬다 합니다. 고난은 다이아몬드를 만들기 위해 탄소에 가하는 압력과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내할 때, 우리는 내적으로 형성되고 빚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그분의 성품을 조성하십니다.
그리고 이 연단이 소망을 이룬다 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소망’은 단순히 ‘내가 바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고난과 인내와 연단의 끝에서, 모든 인간적 욕망의 거품이 걷힌 상태에서, 온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향하여 생겨난 소망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것, 하나님께서 그분의 약속을 따라 이루실 그 일을 함께 바라며 기다리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모든 것을 즉각적으로 원하는 세계, 인격의 일관성보다 이미지의 선정성에 매료되는 세계, 각자 자기가 터치하여 선택한 것으로 자기를 구성하며 실현하는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아브라함처럼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으며’ 산다는 것은 더욱 어리석고 미련해 보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 말합니다. 설령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있다 해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 소망 때문에 부끄러워할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지기’ 때문이라 합니다. 우리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예수를 믿게 하신 성령이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심으로 우리로 흔들림없이 소망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라 했습니다(갈5:22).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딘다’ 했습니다(고전13:7). 신실하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우리 영혼을 안전하고 든든하게 보호해 준다 하였습니다(히6:19).
바로 이런 이유로 바울은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다 한 것입니다. 예수 믿는 자가 성령 안에서 누리는 기쁨과 즐거움의 복은 고난 속에서 고갈되는 복이 아니라, 오히려 그 고난을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신뢰하고 소망하는 가운데 변함없이 누릴 수 있는 복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에는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들이 포함되지만, 훨씬 더 많은 복이 이처럼 보이지 않는 것으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확실한 것을 소유하는 데 집착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런 것들을 자기 옆에 많이 쌓아두고 있다 하여 그만큼 누리며 산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복,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복,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복,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약속되어 있지만, 실제로 모두가 이 복을 충분히 누리며 사는 건 아닐 것입니다.
몸도 마음도 어려운 시절을 지나고 있습니다. 이 상황 속에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작동하고 있는 줄 믿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없는 것에 집중하기보다,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복이 무엇인지 다시금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하며 평화를 누리십시오! 감사하며 은혜 안에 거하십시오! 소망 중에 기뻐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예수 믿는 자에게 주시는 이 하늘의 복을 매순간 충만히 누리고 나누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우리에게 주시는 하늘의 복에 감사드립니다. 그 가치를 아는 이가 누릴 것입니다. 주님 주시는 평화와 은혜와 기쁨의 복을 매순간 충만히 누리고 나누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