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20년 8월 30일)
- 로마서 3장 21-26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예수 십자가의 의미 - 로마서 3장 21-26절.docx
<로마서 3:21-26>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모든 것을 덮는 하나님의 은혜와 모든 것을 초월한 하나님의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은 앞에 살펴보았던 두 본문을 모아서 한번 더 설교합니다. 복음의 핵심을 담고 있는 중요한 말씀이기에 한번 더 짚고 넘어가면 좋겠습니다. 먼저 본문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따라가며 요지를 정리해봅니다.
바울은 먼저 ‘하나님의 의’를 말합니다. 새로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 합니다.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뛰어드시는 하나님의 의로운 행동이 새로이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이 새로운 하나님의 의는 율법과 구별되는 것이면서 또한 율법과 연속선상에 있다고 합니다. 이미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되었던 일이 때가 되어 일어난 것이란 뜻입니다.
이어 ‘예수 그리스도’가 언급됩니다.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된 메시야, 오시리라 약속된 그리스도가 바로 예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마침내 오셨고,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의로운 행동이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새로운 하나님의 의는 이제 유대인이라는 특정 민족을 넘어 모든 믿는 자들에게 미친다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행하신 일이 각 사람에게 효력을 나타내는 것은 ‘믿음’을 통해서이며, 여기엔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어 바울은 모두가 죄인임을 말하고, 모두가 함량 미달임을 말합니다. 모두가 죄의 권세 아래 있고, 모두가 죄에 책임이 있기에, 누구도 하나님 앞에 떳떳이 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 죄 아래 있는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의 의미를 바울은 ‘속량’과 ‘화목’이라는 두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미치는 결과를 ‘칭의’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합니다. 또한 화목제물로 세워져 우리 모두를 위해 피흘린 예수를 통해 하나님은 그분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시고 또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신다 합니다.
여기까지 바울이 말한 내용은 지금으로부터 약 이천 년 전의 한 사건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의 피로써’라는 말이 암시하듯, 그것은 예수 십자가 사건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와서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이 일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본문을 따라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첫째로, 예수 십자가의 의미는 ‘속량’입니다.
노예로 팔렸던 사람을 다른 이가 값을 치르고 되사서 자유케 해주듯, 죄 아래 팔려 있는 우리 모두를 속량하여 죄의 권세에서 자유케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대신 내어주신 사건, 그것이 예수 십자가입니다.
나이를 먹고 세상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죄의 먹구름이 세상을 뒤덮고 있음을 느낍니다. 양심이 아주 무디지 않은 사람이라면 나 또한 그 죄에 얽혀들어가 있음을 깨닫곤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살 수 있는 것은, ‘어차피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일 고민해봐야 뭐하나, 당장 먹고사는 일이나 신경쓰자’ 하거나, ‘그래도 내가 저 사람들보다는 낫지, 이 정도만이라도 사는 게 어디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죄와 구원의 문제를 결코 가벼이 넘겨선 안 됩니다. 이 문제의 해결에 우리 인생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고민해봐야 답이 안 나오는 문제라 여겨선 안 됩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 이미 뭔가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나 정도면 괜찮은 편이라 말해서도 안 됩니다. 구원의 문제는 상대평가가 아니라 절대평가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에서 가장 멀리 있는 사람은, 자기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자기 힘으로 해결하겠다고 고집피우거나, 자기 힘으로 해결했다고 착각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모두가 죄 아래에 있습니다. 모두가 함량 미달입니다. 죄의 먹구름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스스로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 그 죄의 권세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할 수 없는 그 일을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그 아들 예수를 통해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모든 죄인을 대신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나쁜 것의 영향력 속에 있던 사람이 거기서 빠져나오기란 쉽지 않습니다. 범죄조직에 속해 있던 사람이 거기서 나오기 위해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걸 봅니다. 업소에 팔린 여인이 거기서 나오고자 하여도 눈덩이처럼 늘어난 빚 때문에 나올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이런 강압이나 강제가 없다 해도, 이미 그 세계에 길들여지고 중독되어서 아닌 줄 알면서도 좀처럼 헤어나오지 못하기도 합니다.
파키스탄에는 마약 중독 실태가 심각하다 합니다. 파키스탄에서 매일 테러로 죽는 사람이 40명 정도인데, 마약으로 매일 죽는 사람은 약 700명이나 된다 합니다. 더 심각한 것은 가난 때문에 거리로 내몰린 아이들이 마약에 쉽게 노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돈 천원이면 마약을 살 수 있어서 거리에서 구걸한 뒤 그 돈으로 마약에 빠져든다 합니다. 이런 아이들 대부분이 성인이 되기 전에 죽음을 맞는다 합니다.
죄에 얽매여 영적으로 죽어가는 인생의 모습이 이와 같다 할 것입니다. 처음엔 달콤한 유혹에 빠져 죄를 짓지만, 나중엔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죄에 끌려다닙니다. 마치 마약에 중독된 사람이 마약을 끊지 못하는 것처럼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권세 아래 있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죄가 그 사람을 지배합니다. 죄의 힘이 그 사람을 압도합니다. 죄를 짓지 않으려 해도 죄를 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를 일컬어 예수님은 ‘죄의 종’이 된 상태라 하셨습니다.
구원이란 이렇게 죄에 종노릇 하던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죄에 얽매여 있던 상태에서 자유케 되는 것입니다. 마약에 중독된 아이들에게 진정 필요한 일은 마약 살 돈 몇 푼 더 얻는 것이 아니라 그 마약의 늪에서 빠져나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죄의 권세 아래 있는 사람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일은 돈 몇 푼 더 버는 것이 아니라 그 죄의 늪에서 빠져나오는 것입니다. 참된 자유는 죄의 권세 아래서 마음껏 죄 지을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그 죄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마음껏 선을 행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이 자유를 우리에게 주시려고, 죄 아래 팔린 우리 모두를 구원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내어주셨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속량하기 위한 속전으로 내어주셨습니다. 구약의 속죄제사 속에서 흠없는 짐승의 생명이 범죄한 사람의 생명을 대신했던 것처럼, 죄없는 예수 그리스도가 범죄한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려 피흘리심으로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르시고 우리를 속량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귀보다 힘이 없어서 이런 일을 겪어야 했던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속량하신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그처럼 비싼 값을 치르신 이유는, 다시는 우리가 그 옛 세계로 되돌아가지 않길 바라시는 그분의 간절한 바람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말처럼(히9:13-14), 염소와 황소의 피가 비록 한시적이나마 죄인을 정결하게 하고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우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보혈은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은 이렇게 더없이 비싼 값을 치르셨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아무 공로없이 공짜로 구원을 얻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말합니다. 예수 십자가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값없이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십자가 복음 안에 깃든 하나님의 은혜가 전에 엇나갔던 우리를 다시 바로 세우는 구원의 능력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죄의 권세 아래 있는 한 우리에게 참 자유는 없습니다. 참 자유는 오직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이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합니다. 그 보혈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안에 거하십시오! 이제 나는 하나님께 속해 있다고 선포하십시오! 예수 십자가 복음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길 바랍니다.
둘째로, 예수 십자가의 의미는 ‘화목’입니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의 자리에 몸소 들어와 대신 고난받으심으로 하나님의 진노에서 죄인들을 덮어주신 사건, 그것이 예수 십자가입니다.
화목이란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말합니다. 화목이 필요한 이유는 모든 사람이 죄 아래에 있고, 악에 대해 하나님이 진노하시기 때문입니다.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고, 본질상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인이 그분 앞에 서는 것을 용납하실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자비하신 하나님은 이미 율법을 통해, 죄인이 죽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친히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화목제사입니다. ‘화목’으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캅포레트’ 속에는 ‘덮는다’(cover)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화목은 덮어주는 것입니다. 화목제물은 덮어주는 제물, 죄인의 자리에 대신 들어와 대신 피흘리며 죄인을 덮어줌으로써 그에게서 하나님이 죄를 보실 수 없게 해주는 제물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흘려진 짐승의 피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온전한 화목을 이루어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후에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날 진짜 화목제사의 그림자에 불과했습니다. 후에 있을 그 일을 내다보며 이스라엘의 한 예언자는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이 예언된 길을 따라 마침내 그리스도가 오셨고, 그가 우리 모두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어 십자가에서 대신 고난받고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 아들 예수를 우리 모든 죄인을 위한 화목제물로 내어주신 것입니다. ‘그의 피로써…세우셨다’는 말은, 십자가에서 흘린 예수의 피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목을 위한 것이었음을 의미합니다.
사도 요한은 이 ‘화목제물 예수’에 대해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려줍니다. 요한일서 2장 2절에,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를 통해 온 세상 모든 사람과 화목하기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또한 요한일서 4장 10절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화목제물 예수는 죄인인 우리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한국전쟁중에 있었던 일이라 합니다. 한 미군병사가 퇴각하면서 강원도 깊은 골짜기를 지나고 있는데 어디선가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울음소리를 따라가 봤더니 소리는 눈구덩이 속에서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아이를 꺼내기 위해 눈을 치우던 병사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거기 옷을 하나도 걸치지 않은 알몸의 여인이 죽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갓난아이와 함께 피난을 가던 어머니가 깊은 골짜기에 갇히게 되자, 아이를 살리기 위해 자기 옷을 모두 벗어 아이를 감싸고는, 허리를 구부려 아이를 끌어안은 채 얼어죽고만 것이었습니다. 어머니의 희생적인 사랑이 아이의 생명을 살렸던 것입니다.
제 자식을 위한 이 어머니의 희생이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희생을 닮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모두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죄인인 우리가 받았어야 할 하나님의 진노를 그가 대신 받았고, 그 희생의 피로 우리 죄를 덮어주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로 막힌 담을 허무시고,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이 그분의 소중한 아들을 주시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거룩한 진노와 화목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막는 여러 요인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 바빠서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술을 먹어야 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 삶이 부끄러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합니다. 제가 아는 한 분은 작은 철공소를 운영하던 분이었는데, 그 일을 그만두게 되면 교회 나가겠다 하였습니다. 이유를 물으니, 그 일을 하다보면 본의 아니게 정직하지 못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 분은 그 때마다 양심에 가책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가족들 먹여살려야 하니 일은 그만둘 수 없고, 그래서 후에 좀더 떳떳하게 살 수 있을 때 신앙생활 하겠다는 얘기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할 이유를 대자면 한이 없겠지만, 우리가 그분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통해 친히 무슨 일을 하셨는지 안다면, 그 어떤 것도 이유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을 이루기 위해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려 피흘리신 예수님 안에서 이제 그 무엇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을 수 없습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10:19-22)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을 이룰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도 화목을 이룰 수 있습니다. 전에 말씀드린 바 있지만, 한 때 저는 인간이 너무 싫었습니다. 너무 밉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 마음이 싹 사라졌습니다. 어떤 계기 때문이었는지 잘 생각은 나지 않지만, 그냥 언제부터인가 사람을 바라보는 제 시선이 좀더 따뜻해져 있었습니다. 사람은 여전히 그 사람이지만, 사람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시선, 사람을 품어주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제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일 것입니다.
고린도후서에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5:19) 교회는 하나님께서 부탁하신 이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세상에 전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화목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 서셨던 자리를 교회는 늘 기억하면서 그 뒤를 따라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예수 십자가를 통해 친히 우리에게 화목의 길을 열어 주셨으니, 이 복음을 믿고 여러분도 하나님과 화목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제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보시고, 우리는 이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봅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서로를 바라봅니다. 예수 십자가 복음 안에서 이 화목의 은혜를 누리고 화평케 하는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예수 십자가의 의미는 ‘의로움’입니다.
예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은 그분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시고 또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십니다. 여기 두 가지 의로움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움과 신자의 의로움. 예수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죄에서 속량하시고 화목의 길을 여신 하나님은 의로우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를 통해 행하신 이 의로운 일이 바로 나를 위한 것이었음을 믿는 사람을 하나님은 의롭다 하십니다.
예수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이 만난 자리입니다. 예수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처벌하심으로 그분의 공의를 나타내셨고, 또 예수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덮어주심으로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우리 입장에서 볼 때 우리가 전에 지은 죄는 간과되었지만, 하나님 입장에서 볼 때 그 죄는 처벌되었고, 십자가형이라는 가장 혹독한 방식으로 그 죄책은 처리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언약적 정의’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맺은 언약에 끝까지 충실하신 방식으로 그들을 구원하심으로 그분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십니다. 이 하나님의 정의는 사람에 대한 연민과 자비를 그 안에 품고 있는 정의입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를 세상의 제단에 희생제물로 세우심으로써, 옛 언약의 율법을 만족시키는 동시에, 언약의 범위를 더욱 넓혀 온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의 새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 십자가를 통해 자기의 의로움을 나타내신 하나님이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신다 합니다. 이것을 ‘칭의’라 합니다. ‘일컬을 칭(稱)’에 ‘옳을 의(義)’를 써서 칭의라 합니다. 이 말은 법정 용어입니다. 법정에서 재판관이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에게 그들이 무죄임을 선고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요?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창15:6) 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그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의 의로 여겨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를 통해 행하신 일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 일이 바로 나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음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럴 때 그 일의 효력이 나에게 나타나게 된다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하여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희생해가면서 그에게 꼭 필요한 호의를 베풀었다 칩시다. 이 경우 그 호의를 베푼 사람이 상대방에게 진정 바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염치가 있지 어찌 제가 그걸 받겠습니까?’ 이렇게 말하길 바랄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 잊지 않고 앞으로 더 잘 살겠습니다’ 아마 이렇게 말하길 바랄 것입니다. 하나님도 같은 마음이시지 않겠습니까?
죄를 지어 형벌이 부과된 사람이 그 형벌을 다 채우면 방면됩니다. 교도소 문을 나가 자유의 몸이 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나의 죄책을 대신 지고 죽으셨음을, 내 죄의 형벌을 그가 대신 다 받으셨음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에게 이제 하나님은 ‘너는 무죄다! 너는 의롭다! 너는 자유다!’ 선언하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실제로 의로운 사람이어서 의롭다 선언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의로운 행동이 나의 믿음을 통해 나에게 효력이 있는 것으로 인정되기에 의롭다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삶이 다시 바로 설 수 있습니다. 죄의 권세에서 해방된 자로서 이제 우리는 자유롭게 선을 행하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된 자로서 이제 세상에 화평을 이루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사실 저는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신다’는 말에 좀 불만이 있었습니다. 믿는다 하면서 전혀 의로운 모습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좀 다릅니다.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마8:13) 예, 결국 그 믿음대로 될 것입니다. 믿음이라고 다 똑같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그 누구보다 잘 아실 것입니다. ‘참되게’ 예수 믿는 사람은 십자가 은혜가 그 사람 속에서 ‘참되게’ 역사하여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참되게’ 경험할 것이고, 그저 시늉으로 예수 믿는 사람은 앞으로 어떻게 될는지 두고보면 알 일입니다.
칭의는 구원의 완성이 아닙니다. 출발점일 뿐입니다. 우리의 신앙여정은 의롭지 않음에도 의롭다고 칭함 받는 일로 시작되지만, 예수님을 바라보며 걸어가는 그 신앙여정 속에서 우리는 점점 더 의로운 사람이 되어갑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의 구원은 우리 자신의 의가 아닌 예수님의 의로 성취될 것입니다.
정신병원에 한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자신을 쥐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입니다. 쥐처럼 엎드려 쥐 흉내를 내는 정신병 환자였습니다. 그를 치료했습니다. 너는 사람이다. 나는 사람입니다. 치료가 끝나고 퇴원하는 날, 그가 가족들에게 다가가는데 갑자기 고양이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겁을 내며 도망갑니다. 너는 사람이고 저것은 고양이라고 알려줍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말합니다. “내가 사람인 것은 아는데, 저 고양이가 나를 정말 사람으로 볼까요?” 무엇을 말합니까? 아직까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안다고 하지만 참으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누구인지 참으로 아십니까?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릴 때가 있었습니다. 어쩌면 지금이 그런 때인 것 같다 느끼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누구인지 잘 모르겠거든, 다시 예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거기에 우리의 ‘가치’가 있고, 우리의 ‘정체성’이 있으며, 우리의 ‘사명’이 있습니다. 또한 거기에 우리 모두를 위한 ‘자유’가 있고, 우리 모두를 위한 ‘평화’가 있으며, 우리 모두를 위한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 십자가가 우리의 구원이 됨을 믿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그 ‘속량’의 십자가, ‘화목’의 십자가, ‘칭의’의 십자가, ‘사랑’의 십자가 붙들고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그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그 십자가 사랑 마음에 받으며 예수 믿기 원하는 사람에게 예비된 구원의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모두가 늘 그 십자가 은혜 안에 거하며 참된 자유와 평화와 소망을 누리게 하시고, 값없이 받은 사랑 늘 기억하면서 우리도 사랑하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