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23년 4월 30일)
- 마태복음 14장 22-33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오라 - 마14,22-33.docx
<마태복음 14장 22-33절>
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24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26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27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28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32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배를 타고 항해하던 제자들이 폭풍우 치는 바다 위에서 경험한 일을 통해 예수님을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하게 되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는 오병이어 기적, 즉 빈 들에서 예수님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많은 사람을 먹이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있고나서 ‘즉시’ 예수님은 제자들을 ‘재촉하사’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십니다.
이어 무리를 해산시키신 후 예수님은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 거기 혼자 계십니다.
당시 상황에 대해 우리는 그림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편에서 기도하고 계시고, 제자들은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항해하던 중이었습니다.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 바다 가운데 있을 때, 제자들은 거스르는 바람과 물결로 인해 고난을 겪게 됩니다.
배를 타고 항해할 때 거센 바람과 파도를 만나는 일이야 얼마든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의 인생항해 중에도 때때로 우리는 어려움을 만나고 고난을 겪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인생항해는 좀 다를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혹은 예수님의 제자라는 이유로, 어려움과 고난이 스스로 우리를 비껴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고난을 겪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예수를 믿는 사람이기에 피하지 않고 겪어야 하는 고난도 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 부름받아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께 쓰임받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아브라함, 야곱, 요셉, 모세, 다윗, 예레미야, 바울… 그들의 삶에 고난이 없었나요?
아닙니다. 그들의 삶을 특징짓는 것은 ‘고난의 비껴감’이 아니라 ‘고난 중에 하나님을 경험함’입니다. 고난 속에서 그들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더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졌습니다.
오늘 본문의 제자들이 당한 고난의 상황은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에 의해 의도된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22)
그날의 항해를 ‘재촉하신’ 분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제자들을 급히 배에 태워 바다로 나가게 하신 분, 그리하여 그 고난의 상황 속으로 그들을 몰아넣으신 분은 주님이셨습니다.
물론 모든 고난이 주님에 의해 초래되는 것이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우리 자신의 욕심과 어리석음에 의해 자초되는 고난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깨닫습니다. 때때로 주님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우리를 어떤 고난의 상황 속으로 인도하기도 하신다는 것을.
배가 바다 가운데 있을 때 바람이 거슬러 불기 시작했습니다. 앞으로 나아가려 하나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너무 멀리 와버려 되돌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숙련된 어부들이 그 배에 타고 있었으나, 그들 힘으로 그 상황을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얼마나 오래 그러고 있었을까요? 예수님이 오셔서 그 상황을 해결하실 때까지. 23절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배에 태워 보내시고, 이어 무리를 보내시고 나니 날이 저물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아직 ‘저물기 전에’ 배를 탔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25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들에게 오신 시간은 ‘밤 사경’이라 합니다. 유대인들은 일몰로부터 일출 때까지의 밤 시간을 넷으로 나누어 각각 일경, 이경, 삼경, 사경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밤 사경’이면 새벽 3시부터 6시 사이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해지기 전부터 동트기 전까지 거의 10시간 가량을 바다에서 그러고 있었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오실 때쯤엔 거의 녹초가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 시점에, 여전히 그 상황 속에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물 위를 걸어 오신 것입니다.
왜 그때 오셨는가? 좀 더 일찍 오시지. 제자들 고생 좀 덜하게.. 그런데 그들이 그러고 있는 줄 모르셔서 예수님이 늦게 오셨을까요? 마가복음의 평행본문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막6:47-48)
예수께서 ‘보셨다’고 합니다. 보고 오신 것이라 합니다. 보고도 그때 오신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 상황 속에서 그 만큼의 시간이 그들에게 필요하다 생각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서요? 그들이 자신들의 한계와 무력함에 직면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상황 속에서 예수님을 새롭게 경험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한 마디로, 그들의 ‘믿음’이 자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주님의 관심은 우리의 삶을 편하게 해주는 데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걸 기대하고 신앙생활하면 실망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주님의 관심은 우리의 믿음을 일으키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마음과 뜻을 함께 품고 그분의 일에 동참하며 살게 하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믿음은 저절로 자라지 않습니다. 영그는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내가 스스로 믿음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신뢰는 쌓여가는 것이고 날로 더욱 깊어져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삶의 특정한 상황 속에서 생겨납니다. 내 기존의 틀 속에 결코 우겨넣을 수 없는 그분을 삶 속에서 새롭게 만나는 경험을 통해 믿음은 생겨나고 자라납니다.
우리는 내가 컨트롤 할 수 있는 상황 속에만 있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게 삶을 계획하고 일을 추진합니다. 그리고 일이 잘 되면, 하나님 없이도, 다른 사람 없이도, 얼마든 내 힘으로 잘 살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때때로 우리를 내가 통제할 수 없는 한계의 상황 속으로 몰아넣으십니다. ‘재촉하여’ 우리를 앞서 배에 태워 보내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얼결에 그 상황 속에 들어와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살려고 몸부림칩니다. 이런 식이 아니라면 자진하여 그 상황 속에 들어갈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예수님은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물 위를 걸을 수 있어? 이거 사실 맞아?”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겠지만, 후에 제자들이 고백하듯 진실로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면, 그가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것보다 걸을 수 없다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왜 바다 위를 걸어서 오셨을까? ‘타고 갈 배가 없어서’라는 대답을 내놓을 수도 있겠지만, ‘굳이 배를 타야 할 이유가 없어서’라는 대답이 더 나아 보입니다. 물 위를 걸어서도 능히 오실 수 있는 분에게 꼭 배를 타고 이동하셔야 했다고 말하는 것은 뭔가 좀 억지같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이 나에게 오실 때 어떤 모습으로 오실 거라 생각하십니까? 고난의 상황 속에 있는 나에게 오셔서 나를 구원하고자 하실 때 그분이 어떤 모습, 어떤 방법으로 다가오시리라 생각하십니까? 내가 예상할 수 있는 모습, 전혀 당황스럽지 않을 방법으로 그분이 내게 다가오셔야 한다고 주장하시렵니까?
예수님이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제자들은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 소리 질렀다고 합니다. 그들을 사랑하시는 분, 그들을 부르신 분, 그들을 구원하실 수 있고 또 구원하고자 하시는 분의 다가오심을 그들은 더 큰 위협의 상황으로 인식하며 무서워했던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는 어떤가요? 내 삶의 상황 속에 내가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주님의 구원의 손길을 인식하고 있습니까? 나를 살리려는 그분의 다가오심을 나를 죽이려는 다가오심으로 오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폭풍우도 모자라 이제는 유령인가? 어째 이렇게 악재가 겹치는가? 주님은 우리를 아주 버리셨는가?” 그럴리가요. 주님은 우리를 결코 버리시지 않습니다. ‘제때에’ 구원하러 오십니다.
늦었다구요? 아니요! 그 폭풍우 속에서 제자들이 죽었나요? 아니잖아요. 그들은 살아 있습니다. 아직 견디고 있습니다. 그들이 감당할 만하다 생각하셨기에 그때까지 주님이 기다리신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께서 ‘즉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이 유령이라 생각한 그 존재, 사람이라면 저렇게 물 위를 걸어 다가올 수는 없다 생각한 그 존재가 바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주님이라 합니다. 그러니 안심하고,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지나온 삶을 돌아보십시오. 힘들고 어려운 일 많았지만 그래도 잘 지나오지 않았습니까? 그게 다 여러분 힘으로 해결된 것인가요? 아닐걸요.
우리 삶에 고난이 없었고, 그 속에 개입하여 역사하신 주님의 손길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는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런 시간들과 상황들이 있었기에 우리 마음과 삶 속에 주님이 들어오실 여지가 있었던 것입니다.
폭풍우는 결국 그칩니다. 예수께서 배에 타시자 거짓말처럼 바람이 그쳤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폭풍우는 허상이라는 거죠. 그 폭풍우를 한순간에 잠재우시는 분, 그분이 진상입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분이 바로 그분입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그 무엇도 우리에게 일어날 수 없습니다. 반면,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모든 것은 그 안에서 우리가 더 나은 모습으로 빚어지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을 듣고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이 말은 당신이 주님이신 줄 믿지 못하겠다는 의심의 말일까요, 아니면 당신이 명하시면 내가 능히 물 위를 걸어 당신에게 갈 수 있다는 믿음의 말일까요?
둘 다겠죠. 어두운 밤, 폭풍우 치는 바다, 그리고 배와 예수님 사이의 거리… 이 환경 속에서 베드로는 그 말하는 이가 주님이시라는 것을 눈으로 보아 확신할 수 없었을 겁니다. 즉, 그의 감각과 이성을 통해서는 그가 목소리로 듣는 이가 자신이 알던 주님과 같은 분이라는 확신에 이를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 말하는 이가 정말 주님이 맞다면, 그분은 능히 그로 하여금 물 위로 그분께 가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베드로는 마음으로 확신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 베드로는 보는 것을 따라 행동하지 않고 어느덧 자기 속에 믿음을 따라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굳이 베드로는 물 위로 예수께 가려 했던 것일까? 다른 제자들은 다 배에 가만히 있는데 왜 이 사람은 유별나게 그 일을 시도하려 한 걸까?
지난 수요성경모임에서 거기 있던 분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이 상황에서 나도 베드로처럼 요청하고 행동할 것 같다고 생각하시냐고. 그런데 그럴 것 같다고 답하신 분이 의외로 많더라구요. 거의 절반은 되는 것 같았습니다. 참 신기했습니다. 저라면 안 그럴 것 같았거든요.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그래, 예수님이 놀라운 기적을 행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걸 믿는 것과, 그런 일이 바로 나를 통해 일어나는 걸 실제 체험하는 건 다른 차원의 얘기지.. 의외로 많은 분들이 그런 체험적인 신앙에 대한 갈급함이 있구나..”
그렇다면, 그 상황에서 베드로처럼 요청하고 행동했을 것 같지 않은 나는 주님의 그런 초자연적인 능력이 나를 통해 일어나는 걸 원하지 않는 건가?” 자문해 봤는데, 단연코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한계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가 저 자신과 우리 공동체 가운데 나타나고 체험되는 것을 그 누구보다 간절히 소망하는 사람이 아마 저일 겁니다.
그렇다면 왜?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굳이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왜 굳이 물 위를 걸어야 하죠?
그날 저녁 성경모임 때, 역시나 본인도 그 상황에서 베드로처럼 요청했을 것 같다는 분이 계셔서 그 이유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대답이, “그냥 예수님과 함께 있고 싶을 것 같아요!”
그때는 그냥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했는데, 그 대답이 단초가 되어 이후 제가 새롭게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요청한 이유에 대해.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배 안에 있었습니다. 바다 위에서 배는 이동수단이기도 하지만 최소한의 안전장치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배라는 안전장치 안에 있었음에도 그 폭풍우치는 고난의 상황 속에서 제자들은 불안하고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그 거세게 요동치는 바다 위를 걸어와 그들을 안심시키는 이가 있었습니다. 정확히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가 주님이시라 합니다. 그 순간 베드로에게서 믿음이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래, 주님이시라면 능히 그럴 수 있을 거야! 저 바다 물결을 밟으며 걸을 수 있고, 이 거센 폭풍우 속에서도 흔들림없이 설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베드로의 시선이 폭풍우로부터 예수님에게로 옮겨가 고정됩니다. 자신이 지금 서 있는 배 안보다도 주님이 물결을 밟고 서 계신 그곳이 더 안전한 곳으로 느껴집니다. 그곳에 함께 있고 싶습니다. 주님과 함께 있고 싶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 주님께로 가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단순히 주님이 하시는 놀라운 일을 나도 한번 해보고 싶다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주님 안에 있을 때 내가 가장 안전하다는 믿음과, 그 주님 계신 자리에 내가 함께 있고 싶다는 마음에서 그렇게 요청했던 것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고 본문을 다시 보니, 베드로의 초점이 ‘물 위로’에 있지 않고 ‘오라 하소서’에 있었다는 것이 새삼 눈에 들어옵니다. “Lord, if it’s you, tell me to come to you on the water.” 그럼 왜 ‘물 위로’를 말했을까요? 그 상황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가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으니까.
베드로의 요청에 예수님이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물 위로 걸으라!” 하셨나요? 아니죠. “Come!” “오라!” 예수님은 베드로가 요청하고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오라! 그 무엇도 네가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못할 것이다! 저 물결 조차도!
예수님의 입에서 ‘오라!”는 말씀이 떨어졌을 때, 베드로는 과감히 배에서 물 위로 내려섰고, 잠시 후 그는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로 가고 있었습니다.
단순히 물 위를 걷는 예수님에 대한 신기함과 부러움만으로 그 출렁이는 바다 위에 제 몸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보다 주님이 서 계신 자리, 주님이 나를 부르시는 그 자리가 더 사모할 만한 것이 될 때에만, 그리고 내가 거기로 나아가는 것을 주님이 원하시고 또 가능케 하시리라는 믿음이 있을 때에만, 그런 대담한 모험을 감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삶이기도 하지만 주님 계신 자리로 나아가는 삶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요12:26)
주님 계신 자리로 나아가는 길에서 우리가 꼭 베드로처럼 바다 물결 위를 걸을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예수님이 계신 곳, 주님이 부르시는 자리로 나아가고자 한다면, 그 믿음의 길에서 주님은 분명 우리가 거기 이르는 것을 막는 요인들을 그것이 무엇이든 능히 제거해주실 줄 믿습니다.
물론 베드로는 완벽하지 못했습니다. 물 위를 걸어 예수께로 나아가다가 중간에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갔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있던 시선이 바람에 의해 분산되면서 두려움에 사로잡힌 결과였습니다.
베드로의 이 모습은 오늘 우리의 모습이기도 할 것입니다. 주님께로 나아가는 길,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가는 길에서 우리 역시 때때로 시선이 분산됩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물결에 휩쓸립니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내용은 우리에게 희망이 됩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베드로가 주님을 향해 소리치자 그 ‘즉시’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비록 베드로가 예수님께 ‘믿음이 작은 자’란 말을 듣긴 했지만, 여기 있는 우리들의 믿음이 이 베드로의 믿음 만큼은 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는 믿음을 발휘한 사람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통해 나타나는 것을 경험한 사람이 아닙니까? 그리고 즉시 손을 내밀어 구원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직접 체험한 사람이 아닙니까?
이것을 체험해본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삶은 분명 같을 수 없을 겁니다. 믿음으로 주님을 향해 나아가는 길에서 비록 실족하는 일이 있었을지라도, 다시 시선을 주님께로 향하며 구원을 요청했을 때 그 즉시 손을 내밀어 붙잡으시는 주님의 손길을 체험해본 사람은, 다음에 또 다시 그 믿음의 한 걸음을 떼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체험은 베드로가 제대로 했지만, 배에 있던 다른 제자들도 이 모든 일을 보았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와 함께 배에 오르시자 바람은 그쳤고, 배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예수께 절하며 고백합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어쩌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들의 신앙생활도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그분이 ‘진실로’ 그러하시다는 것을 나날이 더 온전히 깨달아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리 우리가 인생여정 중에 폭풍우치는 고난의 상황을 만난다할지라도, 주님은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구하러 오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만 그분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방법은 우리의 예상을 깨는 모습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합시다.
우리는 보이는 것 너머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눈을 들어 폭풍우 너머에 계신 주님께 시선을 고정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 세상 그 어느 곳보다 안전하고 사모할 만한 곳이 주님이 계신 자리, 주님과 함께하는 자리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오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거기에 이르는 것을 가능케 하십니다. 가는 길에 설령 실족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그 즉시 손을 내밀어 붙들어주시는 주님 안에서 우리는 얼마든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더 나은 믿음의 한 걸음을 다음에 또 내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그분은 진실로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