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순절 성령강림

31:31-33

31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라

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

36:26-28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28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2:28-29

28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14:16-18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 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 하고 알지도 못 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6:7-11

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샬롬 ~ 한주간 평안하셨는지요..

이번 주일은 교회에서 오순절 성령강림 주일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성령강림주일을 맞이하여 오늘 설교를 통해 성령 하나님에 대해 살펴보는 시간을 갖길 원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성령님 하면 무슨 생각이 떠오르시는지요..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 중 한 분이 떠올랐을 수 있습니다.

다른 한 편으로, 능력, 치유, 축귀, 은사, 불, 방언.. 이런 단어들이 떠올랐을 수도 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이런 단어들과 관련된 많은 집회들이 열리고 있는데 예를들어, 성령의 권능, 치유, 축귀, 은사 대성회.. 같은 수 많은 집회들이 우리들 주변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이런 집회들로 인해 성령님 하면 능력, 치유, 축귀, 은사, 불, 방언.. 이런 단어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한 가지 더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성령의 권능, 치유, 축귀, 은사 대성회.. 이런 집회를 하는 교회나 단체들은 성령님께서 마치 그런 집회를 하는 교회나 단체들에만 계시고 기존 교회들에는 안 계시는 것처럼 말하는 경우가 많고, 그래서 기존 교회는 뭔가 잘 못 됐고 그들만 제대로 된 교회 또는 단체라는 인상을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즘은 개인 방송 시대가 되어 교회만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도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령충만함을 덧입고 능력적인 삶을 살자는데 그것을 반대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물론 성령 하나님께서 어떤 능력을 덧입혀 주실 수도 있고, 병을 낫게 하실 수도 있고, 귀신을 쫓아내 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그보다 훨씬 크신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성령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 중 한 분으로서 천지만물의 창조와 재창조 즉, 천지만물의 처음과 끝을 주관하시는 천지만물의 창조와 구원의 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오순절 성령강림 주일인데, 오순절이라는 절기는 유대인들의 7대 절기 즉,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 나팔절, 대속죄일, 초막절 중의 한 절기로 유대인들이 출애굽하여 50일째 되던 날에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은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출애굽한 유대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유대 절기는 예수님의 구원사역과도 부합되는 점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유월절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고 이로부터 50일째 되던 날에 성령님께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강림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후 50일 만에 율법을 받고 유대 공동체를 이루었던 것처럼, 예수님의 부활 후 50일 만에 성령님께서 강림하시고 제자들에게 임하신 후 예수님의 제자들은 교회라는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위에서 읽었던 본문 말씀들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에 대해  구약의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군데에서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시다가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님께서 오실텐데, 오시는 성령님이 어떤 분이신지, 오셔서 어떤 사역을 하실지, 그 분의 오심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직접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설교를 통해 오늘 본문의 모든 부분들을 다 살펴보는 것은 여러모로 어려운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서 중에 성령강림 사건이 가장 잘 기록되어 있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성령님에 대해 직접 말씀하신 부분 위주로 성령강림 사건의 의미를 살펴보는 것으로 족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능력, 치유, 축귀, 은사, 불, 방언.. 과 같은 것이 성령님에 대한 모든 것이 아님도 겸하여 살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성령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성령님은 삼위일체 하나님 즉,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중의 한 분이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라.. 사실 하나님을 피조물인 인간의 언어로 표현해 낸다는 것은 무척 조심스러운 것이고 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창조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피조물인 우리 인간은 땅에 있는데,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 무엇인가를 진술한다는 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이 땅으로 끌어 내리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의 이성의 인지구조와 능력을 초월해 계신 분을 인간의 이성의 인지구조와 능력 안으로 억지로 구겨 넣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친히 성경을 통해 계시해 주신 만큼 하나님을 깊이 알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장구한 세월동안 많은 신학자들에 의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연구되어 왔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관련하여 “빼리코레시스 Perichoresis”라는 신학용어가 있는데 – 빼리코레시스라는 용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상호내재, 상호침투가 동시에 일어남’을 가리키는 라틴어 신학용어입니다 – 이 용어를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을 간략하게 요약해 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한 번 들어보세요.. “삼위일체 하나님 즉,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은 나뉨 속에서 연합하여 계시고, 분리되지 않는 하나이면서 동시에 구별되는 셋이다.” 좀 어렵죠? 어떤 분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상호내재, 상호침투를 도미솔 화음을 예로들어 설명하는 것을 봤습니다. 도미솔 화음에서 각 음은 그 음 그대로를 유지하면서도 각 음에 침투하여 아름다운 화음을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도 미 솔 ~ 화음을 한 번 상상해 보세요.. 도미솔 각 음은 서로 침투하여 화음을 이루고 있지만 파라는 엉뚱한 음을 내고 있지도 않고 도미솔 각 음이 그 화음 속에서 일그러지거나 섞이지 않고 그 음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한 비유일 뿐 실제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어떠하심은 감히 피조물인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진술과 관련하여 우리는 그 진술을 이루고 단어 하나 하나, 그 단어들로 이루어진 진술의 구조 그리고 그렇게 해서 이루어진 그 진술이 의미하는 바를 면밀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저는 삼위일체와 관련하여 위에서 비유적으로 표현된 그런 진술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삼위일체에 관해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데까지 가고 성경이 멈추는 곳에서 멈추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즉, 성부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성자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성령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에서 멈추고, 만약 성경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더 말하고 있는 곳이 있다면, 면밀히 살피면서 그 곳까지 가보는 노력을 기울여 보는 것이지요..

성령님이 어떤 분이신가와 관련하여 한 가지 더 살펴본다면, 예수님은 성령님을 가리켜 보혜사 성령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보혜사라는 용어에서 볼 수 있듯이 보호하시고 은혜를 주시는 분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14:26)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는 분.. 보혜사 성령님은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신 성령님, 보혜사 성령님이 오셔서 무슨 일을 하십니까? 요16:8을 보시겠습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이 말씀을 하시고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친히 해설을 달아 주셨습니다. 요16:9-11을 보시겠습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지금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시어 하늘로 올라가시고, 아버지께 구하셔서 성령님을 제자들에게 보내주실 것인데, 성령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친히 이 말씀의 뜻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여기 문맥을 잘 좀 살펴봐야 하는데, 성령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세상의 죄와 의와 심판을 책망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세상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는데, 성령님께서 오셔서 죄에 대한 의에 대한 심판에 대한 세상의 잘못된 생각을 책망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죄와 의와 심판이 동떨어진 세 가지 같지만 그러나 이 셋은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하나와 같은 긴밀한 관계 속에 있습니다. 즉, 죄인인 내가 나의 노력과 행위를 통해 의를 이루고자 하여 심판에 이르지만, 내가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 예수님의 의를 받아들이면 구원에 이른다는 식입니다.

 

자, 그렇다면 먼저 죄에 대하여.. 에 대해 살펴봅시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세상은 왜 죄에 대하여 책망을 받습니까? 이는 예수님 당시 한 바리새인의 기도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이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눅18:11-12)

세상이 죄에 대하여 책망을 받는 것은 율법을 잘 지키지 못 하는 것을 죄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위의 바리새인과 세리의 인용에서 세리가 죄인이요 반대로 바리새인은 의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오셔서 죄는 율법을 잘 지키지 못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라고 세상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켜 자기 의에 이르고자 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통해 이루어 놓으신 예수님의 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롬10:1-3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제가 읽어 드릴테니 잘 들어보세요..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앞부분 구절을 다시 한 번 보세요..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인용구절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의”와 “자기 의”는 이렇게 하면 좋은데 저렇게 하면 더 좋은.. 그런 선택사항이 아니라 구원과 관련된 중차대한 문제입니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나 성령님께서 오시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음이 죄인 것을 깨닫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의에 대하여.. 에 대해 살펴 봅시다.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함이요.. 저는 위에서 죄와 의와 심판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관련하여 마치 하나와 같이 긴밀한 관계 속에 있다 하였는데 특히 이 셋 중에 죄와 의는 동전의 양면과 같이 서로 반대되는개념으로 하나를 이루고 있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어떤 무엇이 죄여서 의가 아니고, 어떤 무엇이 죄가 아니어서 의라는 의미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을 보고 율법과 성전을 허물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참람한 죄를 짓고.. 그래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나무에 달려 죽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청년 예수를 믿고 따르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던 사울이 가만 둘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을 때 그의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으며, 예수 믿는 자들을 예루살렘으로 잡아 올려고 살기등등하게 다메섹까지 쫓아갔습니다. 그러나 다메섹에서 사울은 예수님을 만납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여기서 사울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는 전형적인 예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울은 어떤 의미에서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핍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예수님은 스스로의 죄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의를 이루고자 하는 죄인들의 의를 이루시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스스로의 죄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라 죄인들의 의를 이루시기 위해 죽으셨음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하나님께로 가신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죄인은 절대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가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중보역할을 감당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중보역할을 하실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스스로의 죄로 인해 죽지 않으시고 세상 죄를 지시고 자신을 화목제물로 내어 놓으시고 죽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 가실 수 있으셨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셔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를 중보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말씀을 읽어 드릴테니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 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4:14-15)

형제 자매 여러분, 유대 공동체에서 대제사장의 역할이 무엇인가요? 일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 백성들의 모든 죄를 씻기 위해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자입니다. 이와 똑같이 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단번에 자기를 드리는 제사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든 죄를 정결케 씻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의가 바로 ‘자기 의’가 아니고 ‘하나님의 의’인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오시면 자기 의에 빠져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는 자들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심판에 대하여.. 에 대해 살펴봅시다.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이 세상 임금은 누구입니까?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입니다. 죄의 종이 되어 사망과 흑암의 그늘에 앉아 있게 하는 자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그들의 얼굴에 비취지 못하게 하는 자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으로 옭아 매어 생명의 성령의 법의 다스림을 받지 못 하게 하는 자가 이 세상의 임금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이 세상 임금은 결정적인 치명타를 입게 되었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세상 죄를 지시고 죽으심으로써 이 세상 임금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드는 자들을 더 이상 죄의 법으로 옭아맬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한 사망권세를 깨부수고 부활하심으로써 이 세상 임금은 예수님의 부활에 연합된 자들을 더 이상 사망의 법으로 옭아맬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을 때 사탄은 번개같이 떨어지고 회복될 수 없는 치명타를 입었습니다. 이제 이 사탄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최후심판을 통해 영원히 꺼지지 않는 둘째 사망의 불 못에 던져질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가 구원을 얻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은 재창조로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첫 창조보다 더 온전한 창조요 더 궁극적인 창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성령께서 오신 사건은 첫 창조만큼이나 아니 어떤 점에서 첫 창조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니는 사건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성령님에 대해 살펴보고 있으니 이 재창조를 성령님과 함께 생각해 봐도 좋을 것 같은데, 첫 창조 즉,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전 즉, 구약에서는 성령님께서 특별한 사람들에게 함께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령님의 함께 하심, 성령님의 임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명을 맡기고자 하시는 몇 몇 특별한 사람들에게 성령님께서 함께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 후 즉, 신약에서는 성령님께서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것도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 ‘속’에 함께 해 주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령님의 내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권력을 왕으로 섬기며 살아갑니다. 또는 돈 즉, 맘몬신을 왕으로 섬기며 살아갑니다. 명예를 왕으로 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오시면 권력과 돈과 명예를 섬기는 것이 이 세상 임금이 세상 사람들의 얼굴에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이 비취지 못 하도록 속이고 있는 것임을 드러내 보이심으로써 세상을 책망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이 세상 임금이 이미 심판받아 번개와 같이 떨어졌으므로 이제 더 이상 세상사람들을 죄와 사망의 법으로 옭아맬 수 없다는 것을 밝히 드러내 보이심으로써 세상을 책망하십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저는 최근에 미국에 사는 한 유대인이 예수님을 믿게 된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은 마크 애들러 박사라는 (Dr. Mark Adler) 분이었는데, 저는 막연히 유대인은 예수님을 믿기 어려울거라는 생각이 있었기에 그 분이 예수님을 믿게 됐다고 하니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까.. 하는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애들러 박사는 간증 중에 유대인이 예수님을 믿기 어려운 이유들을 몇 가지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은 강경한 유일신론자들이기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여러분, 유대인들이 매일 암송하는 말씀, 신6:4 쉐마 이시죠?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오직 하나인 여호와..’ 이런 여호와를 믿는 유대인들이 나와 하나님은 하나이니라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믿기는 어렵다고 합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사람인데 사람이 하나님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합니다.

유대인들은 신약을 믿지 않는다 합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아예 신약을 읽지 않는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주후 70년에 성전이 무너지고 흩어져 각 회당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는데 이 때 유대 랍비들이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고 유대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쳐왔다 합니다. 그리고 유대 랍비들은 유대인들에게 신약을 읽지 못하게 하고 절대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한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또한 역사적으로 기독교인들에게 받은 핍박 때문에 기독교인들에 대한 적대감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십자군전쟁 때 십자군이 이슬람 교도 뿐만 아니라 유대인을 죽인 것과, 유럽과 각지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을 핍박한 것과, 홀로코스트로 수 많은 유대인이 죽은 것에 대해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에게 적대감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을 하면 가정에서 사회에서 큰 문제가 되는데 유대사회에서 추방되고 가족들도 멀리한다 합니다. 어떤 가정은 다른 종교로 개종하면 그 사람의 장례식을 거행하고 죽은 사람 취급하는 가족도 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이유에도 불구하고, 애들러 박사는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뉴저지와 필라델피아에 큰 사업체를 갖고 있는 사업가였습니다. 그는 1991년 어느 날 조깅을 하고 있었는데 스스로에게 “열매를 맺는 삶을 살라!”라고 큰소리로 고함을 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합니다. 이게 무슨 일인가.. 그는 즉시 평소와 다른 무엇인가가 그에게 일어났음을 느꼈습니다. 그는 그 때까지 신실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에게 과일사업을 하라고 하시는 건가.. 생각했습니다. 평소와 다른 뭔가를 느꼈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무엇인가 말씀하시기를 원하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즉시 과일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과일에 대해 깊이 연구도 하고 어떻게 유통시킬 것인지 고민도 하였습니다.

그로부터 2년 후 1993년 어느날 그는 과일회사 이름을 The fruit of the Earth Company 지구의 과일 컴퍼니로 정하고 간판을 달기위해 간판상점에 들렀습니다. 1991년 조깅사건 이 후 그는 성경을 매일 조금씩 읽고 있었는데 간판상점을 들러서도 그는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간판상점 사장이 구약만 읽고 있었던 아들러 박사에게 신약 요한복음 3장을 읽어보라고 권했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아들러 박사는 니고데모처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앞부분은 이해가 되는데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뒷부분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간판상점 사장 하롤드에게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가 무슨 뜻인지 물었습니다. 하롤드 사장은 앉아서 그의 수염을 어루만질 뿐 아들러 박사에게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았습니다. 사실 하롤드 사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친히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말씀을 아들러 박사에게 깨우쳐 주시기를 기다린 것이었습니다. 근데 놀랍게도 그 간판상점에서 아들러 박사는 성령으로 거듭난 체험을 합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이 말씀을 하신 분이 예수님이시고 이렇게 말씀 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실 수 밖에 없다는 생각에 이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오 하나님!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군요.. 아들러 박사는 하염없는 눈물을 흘립니다. 하롤드는 아들러 박사에게 요한복음 15장도 읽게 했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아들러 박사는 1991년 조깅때 들었던 “열매 맺는 삶을 살라!”는 목소리가 과일사업을 하라는 말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도 맺고, 주와 복음 역사도 섬기고.. 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아들러 박사는 말합니다. “나에게 누구도 복음을 전해 주지 않고, 누구도 신약을 읽어봐라고 권해준 사람도 없었지만, 성령님께서 친히 나에게 복음을 깨닫게 하시고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믿게 하셨습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성령님은 예수님 믿기 극히 어려운 사람도 예수님을 믿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또 지난한 세월이 걸릴지라도 한걸음 한걸음 성숙케 하시고 때가 되매 많은 열매도 맺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령님은 성령님 이퀄 능력을 주시고,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불을 내려주시고, 방언을 하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물론 성령님은 능력을 주시고,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불을 내려주시고, 방언을 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 반대는 아닙니다. 즉, 능력을 주시고,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불을 내려주시고, 방언을 하게 하시는 분 이퀄 성령님은 아닙니다.

성령님은 아들러 박사 같은 분이 예수님을 믿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작고 가벼운 일이겠습니까.. 여기 계신 한 분 한 분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작고 가벼운 일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 믿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아들러 박사처럼 예수님 믿기에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한 사람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으로 인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아들러 박사처럼 예수님을 믿게 되고 교회를 이루고 살게 되었습니다.

성령님은 아들러 박사 같은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백성 자녀 삼으시고 이 세상에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이루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성도로 하여금 그 교회의 덕을 세우도록 능력도 주시고, 병도 고쳐주시고, 귀신도 쫓아내 주시고, 때로는 불도 내려 주시고, 방언도 주시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역사적이고 단회적인 사건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오순절에 오신 성령님은 약속하신 대로 지금도 여기에 있는 우리들 심령에 ‘내주’하시고 계십니다.

기도하옵기는, 우리들 심령에 내주하시고 계신 성령 하나님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모든 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해 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혹시 누가 흑암과 사망의 그늘 아래 앉아 있다면 성령 하나님께서 그에게 찾아 가셔서 큰 빛을 비춰 주시길 기도드립니다. 혹시 누가 삶이 힘들어 절망 가운데 처해 있다면 성령 하나님께서 그에게 찾아 가셔서 장래 일을 보게 하시고, 꿈을 꾸게 하시며, 이상을 보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욜2:28)

“..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요16:8-1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꼬빌리시 교회 모든 형제 자매님들께 함께 하길 빕니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