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씨름

<창세기 32:21-31>

21 그 예물은 그에 앞서 보내고 그는 무리 가운데서 밤을 지내다가

22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23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29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30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31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맘아 절었더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야곱의 인생은 힘겨웠습니다.

그는 속여 빼앗는 인생, 움켜쥐고 도망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그는 쌍둥이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습니다.

‘발꿈치를 잡는 자’, ‘속이는 자’, 이것이 그의 이름이 되었고,

좀처럼 그는 그 이름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는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볼 줄 아는 영적인 안목을 갖고 있었고,

하나님의 사람이 누리는 복에 대한 간절한 사모함이 있었지만,

태생적으로 불리한 조건 속에 있었습니다.

그는 둘째였고, 형보다 매력적이지 못했으며, 아버지는 형을 좋아했습니다.

이에 그는 형의 배고픔을 이용해 장자의 명분을 속여 빼앗았습니다.

또한 눈 어두운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복을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형의 보복을 피해 도망칩니다.

어머니의 고향 밧단아람으로 가는 길에,

그는 꿈에서 하나님을 만나 약속을 받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창28:15)

 

이후 외삼촌 라반의 집에 도착한 야곱은

그의 딸 라헬을 아내로 맞고자 7년을 약정하고 일합니다.

하지만 7년 후 외삼촌의 속임수에 넘어가,

다시 7년을 더 일하며 아내들과 자식들을 얻습니다.

그렇게 14년이 지나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 마음먹고,

야곱은 라반과 다시 품삯 계약을 맺어 재산을 모으려 하지만,

라반은 다시 교활한 수법을 써서 그것을 방해합니다.

이에 질세라 야곱도 꼼수를 써서 제 소유를 늘려갑니다.

그렇게 또 6년이 지나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야곱은 다시 꿈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창31:3)

하나님은 단지 이렇게만 말씀하셨는데,

야곱은 하나님이 “지금”(31:13) 떠나라 하셨다며 아내들을 설득하여,

라반이 집을 비운 사이 몰래 가족들과 재물들을 이끌고 다시 도망치듯 그곳을 떠납니다.

라반이 뒤늦게 알고 뒤쫓아 가지만, 하나님은 그가 야곱을 해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이렇게 야곱은 하나님의 도우심 속에 ‘라반’이라는 산 하나를 넘었지만,

그의 앞에는 또 하나의 산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의 형 에서와의 만남이었습니다.

야곱은 세일 땅에 있는 형 에서에게로 자기보다 앞서 사자들을 보내어,

자신이 어떤 경위로 가나안 땅을 향해 가고 있는지 전합니다.

불필요한 오해를 없애고 서로간에 경계심을 풀기 위한 목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돌아온 사자들이 전한 말은 야곱을 더욱 두려움에 빠뜨렸습니다.

에서가 장정 사백 명을 거느리고 그를 만나러 오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두렵고 답답한 마음에 야곱은 다시 전략을 세우기 시작합니다.

자기와 함께 한 동행자와 가축들을 두 떼로 나누고,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게 돌아가라 하셨잖아요. 은혜를 베풀겠다 하셨잖아요.

두려워요. 저와 제 가족들을 형의 손에서 구원해주세요.

그리고나서 형에게 보낼 선물을 준비합니다.

몇 차례에 걸쳐 선물을 나눠 보내며 형의 호의를 구합니다.

 

그날 밤이었습니다.

갑자기 야곱이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얍복 나루로 데려갑니다.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고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합니다.

그리고 무슨 이유인지 야곱은 그 나루터에 홀로 남습니다.

아무리 야곱이라도 저 혼자 살겠다고 거기 남았을 것 같진 않습니다.

하나님께 매달려 담판을 지어야겠다 작심했던 게 아닐까요?

갑자기 어떤 사람이 야곱에게 달려듭니다.

엉겁결에 야곱은 그 사람과 엉겨붙습니다.

그렇게 밤새도록 둘은 씨름합니다.

무엇을 위한 씨름인지 알 수 없는 이상한 씨름,

도대체 이 사람은 누구이며 왜 야곱에게 씨름을 거는가?

야곱이 기를 쓰고 버티자,

그 사람은 씨름을 끝내려고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

하지만 그 상황에서도 야곱은 놔주지 않고 말합니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러자 그 사람이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이라 하니, 그가 다시 말합니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야곱도 그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그러나 그는 대답해주지 않고, 야곱을 축복한 후 사라집니다.

 

이후 야곱은 그 곳 이름을 ‘하나님의 얼굴’이란 뜻의 ‘브니엘’이라 붙입니다.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죽지 않았다는 놀라움과 안도의 표현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가 밤새 씨름했던 그 사람이 하나님이셨다는 고백입니다.

그렇다면 바로 궁금해집니다. 왜, 도대체 왜 하나님은 그러신 걸까?

야곱의 말대로 그 씨름을 거신 분이 하나님이셨다면,

그분이 사람의 모습으로 거기 오셔서 야곱과 맞붙으신 거라면,

제 생각에, 그 씨름은 ‘져 주기 위한 씨름’이 아니었을까요?

하나님이 야곱과 겨루어 힘으로 지실 분은 아니시니까요.

그럼 다시 ‘왜 져 주려 하셨냐’는 질문이 남겠죠.

이에 대한 답은 그 씨름을 치르고나서 야곱이 얻은 것 속에 있을 겁니다.

그것이 무엇이죠? 예, 새로운 이름입니다.

‘이스라엘’, 하나님과 겨루어 이김이라는 뜻이죠.

그 씨름을 통해 하나님은 야곱의 이름을 바꿔주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다른 사람의 발꿈치 잡는 자’에서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사람’으로.

그냥 조용히 바꿔주실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그런 고된 과정을 겪게 하신 걸까요?

이름만 바뀌지 않고 사람도 바뀌게 하시려고!

이제 자신이 그 새 이름에 걸맞는 사람이 되었음을

야곱 스스로도 믿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하시려고!

너는 이제 이스라엘이다!

하나님과 및 사람과 겨루어 이긴 사람이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앞으로 나아가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야곱과 밤새 씨름하시고,

또 그 씨름에서 져 주신 이유는

야곱에게 특별한 이김의 경험을 주셔서

그의 신앙과 삶을 새롭게 하시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이제껏 야곱에게는 ‘정면돌파하여 이겨본 경험’이 없었으니까요.

앞서 가는 이의 발꿈치 잡는 인생,

속여 빼앗아 움켜쥐고 도망치는 인생,

하나님 약속 붙들고 믿음으로 돌파해나가지 못하고,

늘 그 뒤에 빠져나갈 구멍 만들어놓는 인생,

이것이 지금까지 그가 살아온 방식이었고,

그런 삶의 굴레에서 그 스스로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그렇지요?

다 약한 부분이 있고,

늘 넘어지는 자리가 있으며,

벗어나고 싶어도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각자의 한계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아실 것이고,

우리가 그것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하실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찾아오는 고난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엉겨붙어 씨름하게 되는 골치아픈 상황들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저 얼른 지나갔으면 하는 소나기,

달갑지 않은 불청객으로 여겨질 때가 많겠지만,

그 씨름들을 통해 어쩌면 하나님은

우리가 좀처럼 넘어설 수 없었던 어떤 것을 넘어서게 하시고,

우리 인생을 새로운 지평 위에 올려놓으려 하시는지도 모릅니다.

 

야곱에게는 정면돌파하여 이겨보는 경험이 꼭 필요했습니다.

그의 삶에 하나님이 역사하실 여지가 더 커지기 위해서 말이죠.

편법이 아닌 정공법으로,

속임수가 아닌 끈질김으로,

자기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떨치고 나아가보는 경험이 너무나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 길로나 가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떤 식으로든 성공하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바르게 가기를 원하십니다.

그 바른 길의 끝에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곳에 우리가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분의 의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이야기 속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하나님은 그들에게 모든 것을 미리 다 알려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만 방향을 지시하시고, 이어서 그 길에 함께하겠다 약속하십니다.

이후 그들이 걸어가는 길에는 역경도 있고 실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그 길에 하나님은 동행해주시고,

그들의 믿음을 끌어올리시며 그들의 삶을 새롭게 하십니다.

우리에게도 야곱처럼 정면돌파를 통해 이겨본 경험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본 경험,

그 말씀의 길을 따라 역경을 돌파해본 경험,

그렇게 진리 안에서 담대함을 얻는 경험이 꼭 필요합니다.

 

다섯 살배기 저희 아이와 가끔 게임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승부욕이 강해서 지는 걸 못견뎌합니다.

보통은 제가 일부저 져 줄 때가 많습니다.

티나지 않게 극적으로 아깝게 질 수 있도록 많은 애를 씁니다.

그런데 가끔은 그게 맘 먹은 대로 안 돼서 제가 이길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아이는 울거나 씩씩거리며 저를 막 때리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고민이 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정말 이 아이를 위하는 걸까?

앞으로 살다보면 분명 제 맘대로 안 되는 일, 지는 일들이 생길 텐데…

몇 번 그렇게 제가 이겼더니 최근엔 이 아이가 편법과 반칙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게임의 룰을 다시 설명해주고,

정정당당하게 해서 이겨야 진짜 이기는 것이다 말해 주었습니다.

 

우리에게 참된 승리를 알게해 주시려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예수 십자가는 죄의 길에 서 있는 우리를 의의 길로 이끄시기 위한

하나님의 의도적인 져 주심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피흘리고 있을 때, 아래에서 누군가 말했습니다.

“지금 당장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하지만 그는 내려오지 않았죠. 사람들 눈에 그는 패배자로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패배가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부활로 이어지는 길,

정면돌파를 통해 참으로 이기는 길로 우리를 이끄시기 위한,

하나님의 의도적인 져 주심, 그분의 사랑이었습니다.

 

이후 야곱은 담대히 앞으로 나아갑니다.

저 멀리 에서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오는 것을 보면서도,

이제 야곱은 행렬의 맨 앞에 섭니다.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형을 향해 나아갑니다.

허벅지 관절이 어긋나 다리를 절며 연신 굽히고 나아오는 동생을 향해,

에서는 오랜 미움을 털어버리고 달려와 맞이하며 안고 입맞춥니다.

두 형제는 그렇게 서로 안고 뒤엉켜 울며 화해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믿음으로 나아가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새롭게 빚어질 수 있기를,

그리하여 마침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그곳에 이르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