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21년 1월 31일)
- 창세기 24장 34-53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 창24,34-53.docx
<창세기 24:34-53>
34 그가 이르되 나는 아브라함의 종이니이다
35 여호와께서 나의 주인에게 크게 복을 주시어 창성하게 하시되 소와 양과 은금과 종들과 낙타와 나귀를 그에게 주셨고
36 나의 주인의 아내 사라가 노년에 나의 주인에게 아들을 낳으매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 아들에게 주었나이다
37 나의 주인이 나에게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너는 내 아들을 위하여 내가 사는 땅 가나안 족속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택하지 말고
38 내 아버지의 집,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하시기로
39 내가 내 주인에게 여쭈되 혹 여자가 나를 따르지 아니하면 어찌하리이까 한즉
40 주인이 내게 이르되 내가 섬기는 여호와께서 그의 사자를 너와 함께 보내어 네게 평탄한 길을 주시리니 너는 내 족속 중 내 아버지 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 것이니라
41 네가 내 족속에게 이를 때에는 네가 내 맹세와 상관이 없으리라 만일 그들이 네게 주지 아니할지라도 네가 내 맹세와 상관이 없으리라 하시기로
42 내가 오늘 우물에 이르러 말하기를 내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만일 내가 행하는 길에 형통함을 주실진대
43 내가 이 우물 곁에 서 있다가 젊은 여자가 물을 길으러 오거든 내가 그에게 청하기를 너는 물동이의 물을 내게 조금 마시게 하라 하여
44 그의 대답이 당신은 마시라 내가 또 당신의 낙타를 위하여도 길으리라 하면 그 여자는 여호와께서 내 주인의 아들을 위하여 정하여 주신 자가 되리이다 하며
45 내가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마치기도 전에 리브가가 물동이를 어깨에 메고 나와서 우물로 내려와 긷기로 내가 그에게 이르기를 청하건대 내게 마시게 하라 한즉
46 그가 급히 물동이를 어깨에서 내리며 이르되 마시라 내가 당신의 낙타에게도 마시게 하리라 하기로 내가 마시매 그가 또 낙타에게도 마시게 한지라
47 내가 그에게 묻기를 네가 뉘 딸이냐 한즉 이르되 밀가가 나홀에게서 낳은 브두엘의 딸이라 하기로 내가 코걸이를 그 코에 꿰고 손목고리를 그 손에 끼우고
48 내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하사 나의 주인의 동생의 딸을 그의 아들을 위하여 택하게 하셨으므로 내가 머리를 숙여 그에게 경배하고 찬송하였나이다
49 이제 당신들이 인자함과 진실함으로 내 주인을 대접하려거든 내게 알게 해 주시고 그렇지 아니할지라도 내게 알게 해 주셔서 내가 우로든지 좌로든지 행하게 하소서
50 라반과 브두엘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우리는 가부를 말할 수 없노라
51 리브가가 당신 앞에 있으니 데리고 가서 여호와의 명령대로 그를 당신의 주인의 아들의 아내가 되게 하라
52 아브라함의 종이 그들의 말을 듣고 땅에 엎드려 여호와께 절하고
53 은금 폐물과 의복을 꺼내어 리브가에게 주고 그의 오라버니와 어머니에게도 보물을 주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어떤 일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다는 것, 하나님께서 친히 진행해가시는 일이라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원하고 또 받들기 원합니다. 하지만 그러려면,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드러나고 어떻게 인식되는지 알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주인 아브라함의 명을 받고 그의 며느릿감을 구하러 온 아브라함의 종이 우물가에서 만난 한 소녀의 아버지와 오빠에게 그간 있었던 일들을 설명하고 그들의 최종 결정을 구하는 내용입니다.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우리는 가부를 말할 수 없노라” 이것이 그들의 대답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들은 그 일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음을 그처럼 확신할 수 있었을까요?
첫째로, 이 일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신뢰하는 한 사람을 통해 시작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37-38절에서 그는 이 일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말합니다: “나의 주인이 나에게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너는 내 아들을 위하여 내가 사는 땅 가나안 족속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택하지 말고 내 아버지의 집,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하시기로”
왜 아브라함은 가나안 여인들 중에서 며느릿감을 택하려 하지 않을 걸까요? 하나님께서 그의 후손에게 주신 명령과 약속을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삭이 그 땅에서 복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그 다음에 나오는 내용을 보면 더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말을 듣고 그 종이 묻습니다. “혹 여자가 나를 따르지 아니하면 어찌하리이까?” 거기서 좋은 사람을 찾는다 해도, 그녀가 자기를 따라 가나안 땅으로 오려고 하지 않으면 어찌하느냐는 질문이지요.
그러자 주인 아브라함이 이렇게 말했다 합니다. “내가 섬기는 여호와께서 그의 사자를 너와 함께 보내어 네게 평탄한 길을 주시리니, 일단 너는 내 고향 내 친척들 중에서 내 아들의 아냇감을 찾아라. 거기까지가 네 할 일이다. 만약 그들이 네게 주지 아니할지라도 너에겐 책임이 없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종이 말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 앞 6절과 7절에서 아브라함은 이런 말을 합니다. “내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돌아가지 아니하도록 하라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고향 땅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아들의 아냇감을 찾는 이 일을 시작하면서 타협 불가의 원칙으로 삼고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여인이 이 쪽으로 와야 하고 아들이 그 쪽으로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유는 전에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나님이 주신 이 약속의 말씀이 아브라함에게는 1번이었습니다. 이 우선순위, 이 타협 불가의 원칙 때문에 일은 성사되기 더 어려워 보였습니다. 하지만 길은 그 원칙을 따라 나게 되어 있고, 그 길이 바른 길일 때 그 길에 놓여 있는 난관들은 하나님 안에서 극복될 수 있을 것입니다.
신명기 29장 29절에 말씀합니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지금 우리 눈에 감추어진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우리가 좌지우지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나타난 일이 있습니다. 이전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 하나님이 주신 약속, 하나님의 명령, 이 모든 것들이 성경 말씀 속에 들어 있고, 그것은 이미 우리에게 나타난 것이며,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한 것이라 합니다. 우리가 이 나타난 일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걸 반대로 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감추어진 일, 하나님께 속한 일은 어떻게든 알아내려고 안달하고, 나타난 일, 이미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은 소홀히 여깁니다. 소위 ‘예언’이라는 이름으로 미래를 점쳐주거나 보장해준다는 사이비들 뒤에 줄을 서고, 나의 현재와 미래를 진정 복되게 할 수 있는 눈앞에 보화는 스스로 걷어차 버립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원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원하고, 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기 원한다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1번으로 붙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 일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음을 그들이 확신할 수 있었던 두 번째 이유, 그것은 그 일이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선하심을 따라 진행되어왔음을 그들이 감지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낙타 열 필을 끌고 길을 떠납니다. 메소보다미아 나홀의 성에 이릅니다. 성 밖 우물 곁에 낙타들을 꿇려놓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오늘 나에게 순조로운 만남을 허락해 주소서. 이 성의 여인들이 물 길으러 나올 시간입니다. 내가 우물 곁에 서 있다가 한 소녀에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너는 물동이를 기울여 나로 마시게 하라’ 그랬을 때 그녀가 ‘마시세요. 내가 당신의 낙타에게도 마시게 하겠습니다’ 라고 하면, 그 소녀가 바로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인 줄로 알겠습니다.”
그런데 말을 마치기도 전에 한 소녀가 물동이를 메고 우물가로 다가옵니다. 그녀가 물을 채워 오자 종은 준비한 말을 건넵니다. 그리자 그녀는 “마시세요” 하며 급히 물동이를 내려 마시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또 말하기를 “당신의 낙타를 위해서도 배불리 마시게 하겠습니다” 하며, 다시 우물로 달려가 모든 낙타를 위해 물을 긷는 것이었습니다.
종은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다가, 과연 하나님께서 평탄한 길을 주셨는지 알고자 그녀에게 답례하며 묻습니다. “그대는 누구의 딸입니까? 그대 아버지 집에 우리가 머물 곳이 있을까요?” 그러자 그녀가 대답합니다. “저는 밀가가 나홀에게서 낳은 아들 브두엘의 딸입니다. 우리 집에 짚과 사료와 머물 곳이 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리브가였고, 그녀의 할아버지 나홀은 아브라함의 동생이었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의 종은 머리를 숙여 하나님께 경배합니다.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나이다. 나의 주인에게 사랑과 성실을 그치지 아니하시더니, 이렇게 나를 인도하사 내 주인의 동생 집에 이르게 하셨군요.”
너무나 아름다운 이야기지요? 과연 ‘여호와이레’라 할 것입니다. 어떻게 그 마을에 들어와 처음 만난 소녀가 아브라함의 친척일 수 있습니까? 그건 그럴 수 있다 쳐도, 어떻게 그 소녀가 이처럼 괜찮은 사람일 수 있었을까요?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 일에 개입하셨다는 말 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하나님의 뜻을 확인해간 방식에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 사람을 알아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그의 기도에 하나님이 어떻게 선하게 응답하시는지에 주목했습니다. 또한 그의 요청에 그 소녀가 어떻게 선하게 반응하는지에 주목했습니다. 그는 그 소녀에게 특정한 반응을 기대했는데, 그것은 지친 나그네와 그의 낙타들을 위해 그녀가 수고하여 물을 마시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수고를 요하는 일이었습니다. 물동이에 물을 채워 어깨에 메고 가는 중에 다시 그 물동이를 내려 상대에게 마시게 하는 일은 분명 수고로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낙타가 열 마리였는데, 그 모든 낙타를 위해 다시 우물로 달려가 연거푸 물을 길어올려 마시게 하는 일은 엄청난 수고를 요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낙타 한 마리가 먹는 물의 양이 75~185리터라고 합니다. 평균 100리터라 쳐도, 열 마리니까 1000리터나 되는 엄청난 물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이만큼 힘든 일이었으니까 그만큼 예비된 사람을 알아보는 기준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종은 왜 이것을 그 주인의 며느릿감을 알아보는 기준으로 삼았던 것일까? 바로 그 모습이 ‘좋은 사람의 좋은 행동’이라고 그가 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바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준은 그의 주인 아브라함에게서 그가 보고 배운 것이었을 겁니다.
창세기 18장에는 아브라함이 지나가던 나그네 셋을 자기 집으로 영접하여 극진히 대접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창세기 19장에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나그네의 모습으로 소돔에 들어온 두 천사를 자기 집에 영접하여 보호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반면 악한 소돔 사람들은 그 마을에 들어온 이 나그네들에게 해를 가하려 하죠. 이로 볼 때, 나그네를 어떻게 대하느냐, 이것은 당시 의인의 삶과 악인의 삶을 가르는 중요한 기준점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아들의 아냇감을 구하는 일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었던 또 하나 중요한 요인은 평소 그의 삶이라 할 것입니다. 평소 그의 의로운 삶이 그의 종에게 바른 가치관을 심어주었고, 그것이 다른 특별한 순간에 그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확신하게 하는 기준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바르고 선한 길을 따라 진행되는 일에 하나님의 전능하신 개입이 나타날 때, 우리는 그 일이 하나님께서 친히 진행해가시는 일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 길이 좁은 길일수록, 그 길이 험한 길일수록, 그 길을 지나오는 동안 하나님이 함께하셨다는 증거는 더욱 확실해질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 일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음을 그들이 확신할 수 있었던 세 번째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이 모든 것을 말하는 이의 겸손함과 진정성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리브가는 달려가 이 일을 가족들에게 알립니다. 이후 그 집에 들어간 아브라함의 종은 지체하지 않고 자신이 거기 온 목적과 그간 있었던 일들을 소상히 말하기 시작합니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주인 아브라함을 대신해서 그의 아들 이삭의 아냇감을 데리러 왔다. 당신들의 딸이요 누이인 리브가가 바로 그 사람인 것 같다. 그녀를 데려가도 되겠느냐?
어떤 사람이 내 집에 와서 남의 집 귀한 딸을 자기 주인의 며느릿감으로 데려가겠다고 대뜸 말하면 바로 흔쾌히 내어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윗감 얼굴도 못 본 상태인데요. 하지만 브두엘과 라반은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yes or no를 자기들이 말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라고 여겨졌습니다. 그 이유는 이 모든 것을 말하는 그 아브라함의 종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임을 그들이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본문 48-49절에서 그는 말합니다. “내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하사 나의 주인의 동생의 딸을 그의 아들을 위하여 택하게 하셨으므로 내가 머리를 숙여 그에게 경배하고 찬송하였나이다 이제 당신들이 인자함과 진실함으로 내 주인을 대접하려거든 내게 알게 해 주시고 그렇지 아니할지라도 내게 알게 해 주셔서 내가 우로든지 좌로든지 행하게 하소서”
오늘 본문의 사건은 두 개의 맹세를 기반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맹세입니다. “내가 이 가나안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아브라함은 이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들었고, 그 원칙을 따라 난 길로 일이 진행되게 하였습니다. 또 하나의 맹세는 아브라함의 종이 하나님과 아브라함 앞에서 한 맹세였습니다. 아브라함의 고향 땅으로 가서 이삭의 아냇감을 찾겠다는 맹세였습니다. 그는 이 맹세에 끝까지 충실한 모습인 것을 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참여하는 사람의 신실함은 그 일이 하나님께서 진행해가시는 일임을 확신하게 하는 요인이 됩니다. 그는 자기를 내세우거나 자기를 증거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일을 주관하시고 온전히 마무리지으실 분, 바로 그가 믿는 하나님만을 높이고 증거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하고 행하기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원하고 확신하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1번으로 붙들고 분명한 원칙을 따라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고 바르고 선한 길을 고수하십시오. 그리고 언제나 하나님만 경외하며 증거하십시오. 그런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우리를 당신의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 위에 굳게 세워주시고, 하나님의 선하고 바른 뜻 안에서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인도하심 속에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