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합 예배 (2021년 3월 7일)
- 요한복음 17장 15-22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2021.3.7 연합예배 설교문 - 요17,15-22.docx
<요한복음 17:15-21>
15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17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19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오늘 본문은 임박한 수난과 죽음, 부활과 승천의 때를 앞두고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남겨질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구하지 않고, 다만 악에 빠지지 않도록 보전해주시길 간구합니다. 그들은 세상에 존재해야 합니다. 하지만 세상과 구별된 모습으로 존재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속하신 분이 아니듯, 그의 제자들도 세상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 속에 살면서도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존재로 산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오늘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 속에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제대로 듣지 못한 상황 속에서, 이 땅의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어떤 모습으로 여기 존재해야 할까요?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거룩하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구별하는(set apart) 것을 말합니다. 구약성서(LXX)에 보면, 제사장직이나 예언자직을 위해 어떤 사람을 성별(consecration)할 때 이 말이 사용됩니다.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요10:36)로 본인을 묘사하십니다. 이처럼 거룩은 하나님의 고유한 속성, 하나님의 하나님다운 속성이며, 그 거룩하신 하나님이 누군가를 거룩하게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거룩하신 그분과 밀접히 연결된 특별한 존재로 구별지으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분을 통해 세상에 파송될 제자들을 위해 아버지께서 바로 그 일을 해주시도록 요청한 것입니다. 그들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낼 수 있는 존재가 되도록 그들을 성별해 주시길 간구한 것입니다.
이 성별의 과정은 ‘진리’에 의해(by) 이루어지며, 진리는 곧 ‘아버지의 말씀’이라 합니다. 하나님 말씀 속에 담긴 그분의 마음과 뜻이 세상에 파송될 예수님의 제자들을 거룩하게 성별합니다. 거룩한 사명자가 된다는 것은 보내신 이의 마음과 뜻을 자기 안에 온전히 품는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이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제자들에게 분명히 일깨우시기 위해 예수님은 혼신의 노력을 다하셨습니다.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님의 삶과 사역 전체가 그를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계시합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일꾼으로 성별하는 진리는 이 예수님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마음과 뜻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거룩’은 동시대 바리새인들이 추구하던 ‘거룩’과 달랐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부정하게 여겨지는 사람들을 공동체에서 배제하는 방식으로 거룩과 구원에 이르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그 부정하게 여겨지던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셨습니다. 병든 자와 귀신들린 자, 세리와 창녀와 죄인들, 사회에서 멸시받고 배척받는 사람들, 구원의 여망이 없어 보이던 그들에게 가셔서, 그들도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들임을 일깨우시며 구원의 길로 이끄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0) 이 예수님의 긍휼과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에게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예수님은 부정하게 여겨지는 사람들과의 접촉을 차단하는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 가까이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온전히 나타내는 방식으로 그분의 거룩함을 드러내셨습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한 이야기가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거룩함, 세상 속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존재의 삶을 인상깊게 보여줍니다. 한 나병 환자가 예수께 나아와 꿇어 엎드리며 말했습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그가 ‘원하시면’을 언급한 이유는 그의 나병 때문에 그가 부정하게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그러자 곧 나병이 그에게서 떠나가고 그는 깨끗해졌습니다. 그냥 말씀만으로도 고치실 수 있었을 텐데, 왜 굳이 그의 몸에 손을 대셨을까? 그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셨지만, 그는 나가서 그 일을 널리 전파했습니다. 그로 인해 예수님은 자유로이 그 마을을 드나들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부정한 자와 접촉했다는 사실이 마을에 알려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을밖 외딴 곳에 계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마지막 문장이 흥미롭습니다. “그러나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예수님의 기도는 그 초기 제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 후에 그분을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여기에는 오늘의 우리도 들어갈 것입니다. 그들, 아니 우리 모두를 생각하며 예수님은 또 하나의 기도를 드립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그분을 믿는 사람들이 다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됨은 ‘고착된 하나됨’이 아니라 ‘흐르는 하나됨’입니다. 잃어버린 자를 찾아 끝없이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사랑, 그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함께 품고 함께 흘러가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하나됨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요15:5) 한 줄기에 붙어 있는 우리를 진정 하나되게 하고 거룩하게 하는 것은 한 나무 전체를 타고 흐르는 수액처럼 우리 사이를 관통해 흐르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일 것입니다. 이 거룩한 사랑의 흐름 속에서 자라고 열매맺는 한 나무를 보면서 세상 사람들은 그 나무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다시 처음에 던졌던 질문으로 돌아가봅니다. 이 세상 속에 살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존재로 산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을 통해 계시된 진리로 거룩하게 되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나타내며 산다는 뜻일 것입니다. 지금 미얀마에서는 무고한 생명들이 불의에 짓밟히며 희생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배척받고 소외된 사람들이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코로나 상황 속에서 건강을 잃고, 생명을 잃고, 가족을 잃은 사람들, 또 생계의 기반을 잃은 사람들이 이 체코 땅에도 많습니다.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을 마치고 앞서 가시는 예수님을 향해 베드로가 뒤에서 묻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주님의 십자가 사랑이 그분이 가신 곳으로 이제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