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22년 1월 23일)
- 사사기 6장 11-16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큰 용사여 - 삿6,11-16.docx
<사사기 6:11-16> (개역개정)
11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12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매
13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나이까 또 우리 조상들이 일찍이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우리를 넘겨 주셨나이다 하니
14 여호와께서 그를 향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하시니라
15 그러나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 하니
16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한 사람이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었습니다. ‘타작’이란 곡식의 낟알을 줄기에서 떨어내 거두는 것을 말합니다. 보통 밀을 타작할 때는 넓은 공터에서 바람을 이용해 겨를 날려 보냅니다. 곡식 다발을 마당에 깔고 짐승이 밟게 하거나 도리깨로 두드려 타작합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고 있었다 합니다. 뭔가 이상하죠?
포도주 틀은 포도를 넣고 으깨어 포도즙을 얻기 위해 만든 틀을 말합니다. 천연 석회암에 약간의 거리와 경사를 두고 두 개의 웅덩이를 팝니다. 위쪽 웅덩이에 포도를 넣고 으깨면 그 즙이 작은 홈을 따라 아래쪽 웅덩이로 흘러들어가 모이게 하는 방식입니다. 포도주 틀에서는 포도즙을 짜고, 밀 타작은 너른 마당에서 하는 것이 정상인데, 기드온은 왜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고 있었던 걸까? 본문 11절에 보니까,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그랬다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미디안 사람들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미디안 족속은 추수 후가 아닌 추수 전에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한 해 동안 땀흘려 농사지은 것을 아예 터 잡고 앉아 직접 추수해 가져갔습니다. 조금이라도 남은 것이 있으면 낙타를 동원해 잘근잘근 밟아버려 이스라엘이 아예 재기할 꿈도 못꾸게 다 파괴해버렸습니다. 그들이 침략할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은 산으로 도망쳐 웅덩이를 파고 굴을 파고 성을 쌓으며 숨어 있어야 했습니다.
기드온이 자기 집 근처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할 당시는 아마도 미디안 군사들이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간 후였을 것입니다. 혹시나 소문이 미디안 사람들 귀에 들어갈까봐, 그처럼 몰래 포도주 틀에서 얼마간의 곡식 다발을 경계어린 눈빛으로 타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말합니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큰 용사’(mighty warrior), 전쟁에 능한 용맹한 장수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큰 용사’란 호칭은 당시 기드온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뒤에 나오는 내용을 봐도, 기드온은 본래 심약하고 조심스런 성격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6:27,39). 그런데도 왜 여호와의 사자는 그런 기드온을 ‘큰 용사’라 부른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그를 그렇게 세워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를 부르시는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며 실제 큰 용사의 모습으로 그를 빚어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현재형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앞으로 그럴 것이란 뜻이 아닙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란 뜻입니다. 기드온이 누가 봐도 ‘큰 용사’여서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기드온을 부르신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로 인해, 부름받은 그 순간부터 이미 기드온은 ‘큰 용사’라 불려야 마땅했던 것입니다.
상황이 어려울 때 사람들의 자존감은 무너집니다. 나의 환경, 나의 지위, 나의 소유가 나를 규정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집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달리 보십니다.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최종적인 답은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나의 정체성을 형성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과정에서 하나님 안에 감추인 나의 진면목이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앞으로’ 인도해 가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다는 말씀이 아직 기드온에겐 와닿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나이까?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실 때 여호와께서 온갖 기적을 행하셨다는 말을 우리 선조들에게서 들었습니다만, 그 기적들이 지금 다 어디로 갔습니까? 지금 이 상황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 사람들의 손에 넘겨주신 결과입니다!”
기드온의 심정이 이해가 되지요? 그럴 만합니다. 그런데 기드온의 말 속에 빠져있는 진실, 그가 깊이 고려하지 않고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그런 비참한 상황에 처하게 된 이유입니다. 6장 1절에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칠 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넘겨 주시니”
그들이 여호와께 행한 잘못이 무엇인지 하나님은 한 선지자를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에게 알려주십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 너희가 거주하는 아모리 사람의 땅의 신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였으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느니라”(6:10)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렸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버림받았다 느끼는 지금의 상황은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셔서 생겨난 상황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김으로 생겨난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을 이집트 사람들의 학대와 억압에서 구원해내신 여호와 하나님 대신에 그 가나안 땅 사람들이 섬기던 풍요의 신 바알과 아세라를 숭배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사실을 기드온에게 굳이 다시 설명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왜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라 하셨을까요? 기드온의 힘만으로 그 일을 해야 한다, 혹은 할 수 있다는 뜻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기드온이 자기 힘만으로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하나님도 아시고 기드온 자신도 압니다. 그렇다면 뭘까요? “그럼 네가 하면 되겠구나! 다른 누가 하길 기대하지 말고 네가 하거라! 내가 너와 함께 할 테니 네가 가서 그 일을 하여라!” 이런 뜻으로 하신 말씀 아닐까요?
우리는 현실의 문제점들을 얘기합니다. 뭔가 변화가 필요하고 조치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합니다. 그런데 움직이지 않습니다. “에이, 내가 어떻게 그런 일을…”, “에에, 내 상황이 이런데…” 얼마전 어떤 분이 그런 말씀 하시는 걸 들었습니다. “나이 오십인데, 아직도 먹고사는 문제에만 골몰하며 사는 것 같아요. 도대체 경제적 여유가 얼마나 더 생겨야 삶이 좀 달라질 수 있을까요?” 생계의 문제가 다 해결되어야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사는 건 분명 아닐 것입니다. 변화는 지금의 상황 속에서 내딛는 작은 한 걸음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앞서 기드온은 물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나이까?” 이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이것입니다. “그래, 네 말대로 내가 너와 함께할 때 새로운 일이 일어날 것이다. 자, 이제 네가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여라! 너의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이 바로 너다! 너를 통해 할 것이다. 그래서 지금 내가 너를 보내는 것이 아니냐? 가라 내 이름으로!”
이후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그의 아버지 집에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며 그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 그 찍힌 나무로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라 명령하십니다. 기드온은 이 말씀에 순종하여 그 일을 감행하지만 가문과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낮이 아닌 밤에 몰래 행합니다. 그리 멋진 모습은 아닐지 모르지만, ‘멋있는 불순종’보단 ‘멋없는 순종’이 낫습니다. 그 일 이후 바알의 무력함이 폭로되고, 기드온은 ‘여룹바알’이란 별명을 얻습니다. 여룹바알이란 “바알이 그와 더불어 다툴 것이라”는 뜻입니다. 순종의 결과, 기드온은 바알과 맞장뜨는 인물로 사람들에게 각인됩니다. 이런 식으로 기드온은 점점 더 큰 용사가 되어갑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 상황은 우리 인간의 과도한 욕심과 무절제한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까? 코로나 초기에 우리는 그런 말 주고받았습니다. 전 세계 모든 사람이 딱 2주만 아무것도 안 하고 멈춰있을 수 있다면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을 하면서도 우리는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으리라는 것을 예감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난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우리가 겪고 있는 일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이 고통스런 상황에 대한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고 또 하나님께 돌리며 불평과 원망의 자리에 서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의 상황에 적극 관여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동참하는 것은 하나님과 한 마음 한 뜻을 품은 사람이 아니면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무절제한 자원개발, 그 가운데 이루어지는 노동착취, 생태계파괴, 잘 사는 나라들 속에 만연한 폭식과 미식의 문화, 그로 인해 산더미처럼 쌓여가는 쓰레기들, 그 와중에도 여전히 굶어죽어가고 있는 사람들, 대중의 두려움과 욕심을 이용하고 조종하여 권력을 쟁취하고 유지하려는 기득권자들, 그 와중에 자행되는 불의와 폭력, 그로 인해 소리없이 눈물을 삼기는 힘없고 억울한 사람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문제가 많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 문제를 바로잡는 방향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적을 뿐이지요. 기드온을 큰 용사로 부르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 안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사람이란 뜻이 아닙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떤 삶으로 부르시는지 늘 귀기울이며 순종의 한 걸음을 내딛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