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19년 6월 23일)
- 빌레몬서 1장 1-25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평화를 이루는 사랑 - 몬1,1-25.docx
<빌레몬서 1장 1-25절>
1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2 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
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4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
5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6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느니라
7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노라
8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9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10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11 그가 전에는 내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12 네게 그를 돌려 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심장)이라
13 그를 내게 머물로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14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
15 아마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너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두게 함이리니
16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17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18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내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19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네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20 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21 나는 네가 순종할 것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내가 말한 것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
22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숙소를 마련하라 너희 기도로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노라
23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와 함께 갇힌 자 에바브라와
24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과 함께 있을지어다
‘평화’라는 단어를 말하거나 들을 때 사람마다 생각하는 바가 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평화’를 단순히 ‘전쟁이나 갈등이 없는 상태’로 이해합니다.
이런 의미의 평화가 이루어지려면 전쟁을 억지할 힘이 필요하게 되고,
이 경우 평화는 세력 균형을 이루는 일을 의미하거나,
질서유지를 명분으로 강자가 약자를 억누르는 폭력의 모습을 띠곤 합니다.
이에, 어떤 사람은 ‘평화’를 정의가 구현되는 상황으로 보거나,
갈등을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해결해가는 과정으로 이해합니다.
‘평화’는 성경 전반을 흐르는 기독교적 핵심가치 중 하나입니다.
‘평화’를 뜻하는 히브리어 ‘샬롬’은 인간이 모든 관계에서 평화를 누리는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에서 모두 평화를 누리는 상태가 바로 ‘샬롬’입니다.
이 샬롬의 ‘평화’ 안에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권리를 향유하게 되는데, 이것이 성경적 의미의 ‘정의’입니다.
따라서 정의가 없으면 샬롬도 없습니다. 하지만 샬롬은 정의 이상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우리 모두의 샬롬을 위해 오신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이 주시려는 평화는 당시 세상에서 이해되던 평화와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14:27)
예수님의 평화가 미치는 범위는 온 세상 모든 생명을 포괄할 만큼 넓은 것이었지만,
그 평화가 이 세상 속에 이루어지는 방식은 저기 어딘가에서부터가 아니라 바로 여기서부터,
바로 내 안에 주님의 평화가 이루어지는 일로부터 시작되리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신약성경에는 ‘평화’나 ‘화평’보다는 ‘평안’이나 ‘평강’이란 말이 더 많이 등장하는데,
이는 기독교가 내면의 영역에만 집중하며 세상의 문제에는 무관심한 종교라서가 아니라,
평화의 일이 바로 여기, 우리 마음과 관계의 변화로부터 시작된다는 인식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마음과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 그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내 마음 안에서 하나의 장벽이 무너질 때, 또한 나와 그 사이에서 하나의 장벽이 무너질 때,
그것은 세상에 평화를 이루는 일의 시작점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빌레몬서는 어찌 보면 매우 사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는 한 장 짜리 짧은 바울서신입니다.
1절에 보시면 편지의 발신자는 바울과 디모데, 수신자는 빌레몬과 압비아와 아킵보, 그리고 그들의 교회 공동체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이란 표현에서 알 수 있듯, 당시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 이 편지를 썼습니다.
이 편지의 주요 수신자인 빌레몬은 바울 일행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로 묘사됩니다.
당시 그 라오디게아 지역의 교회 공동체가 이 빌레몬의 집에서 모이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빌레몬은 지금으로 치면 재력이 좀 있는 그 교회 장로쯤 되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이 빌레몬에게 편지를 보낸 이유는 무엇인가?
그 배경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복음을 전하다 감옥에 갇힌 바울이 그 갇힌 중에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의 이름은 오네시모, 그가 바울과의 만남을 통해 회심하고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 회심이 얼마나 진실한 것이었던지, 바울은 그를 옆에 두고 동역자로 삼고자 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걸리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 오네시모는 한때 노예였다가 그 주인에게서 도망쳐나온 전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오네시모의 옛 주인은 바울이 잘 알고 있던 사람, 즉 과거에 바울에게서 복음의 빚을 진 바 있던 빌레몬이었습니다.
자,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그냥 그 두 사람 사이의 과거 일 따위는 무시하고, 서로 불쾌한 기억 다시 들먹일 것 없이,
바울은 바울대로, 오네시모는 오네시모대로, 빌레몬은 빌레몬대로 각자 자기 일 열심히 하며 살자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빌레몬과의 관계에서 생겨날지 모를 골치아픈 상황을 막으려는 현실적인 조치였는지,
아니면 기도할 때마다 그 문제를 그냥 넘어가지 않도록 성령께서 그 마음을 이끄셨는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바울은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로 마음 먹습니다.
골로새 교회에 보내는 편지와 이 라오디게아의 빌레몬에게 보내는 편지, 이 두 통의 편지를 두기고의 손에 들려 보내며, 그 여정에 오네시모를 동행시킵니다.
그러니까, 빌레몬이 이 편지를 읽을 당시 그 앞에 오네시모가 서 있는 모습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그 둘 사이의 관계에 평화가 이루어지려면, 그 당사자들 사이에 찾아가고 용납하는 일, 용서를 구하고 용서하는 일이 필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일이 성사되려면 우선적으로 서로간에 깨어진 신뢰가 재건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바울이 이 편지를 통해 수행하고 있는 평화의 중재자 역할, 그것을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첫째는 ‘기도’입니다.
4절에 말씀합니다: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
바울은 빌레몬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전에도 생각날 때마다 기도했겠지만, 이 오네시모의 일을 생각하며 그는 더욱 기도했을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빌레몬에 대한 좋은 평판들이 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게 된다 말합니다.
빌레몬이 그 라오디게아 교회 모임을 위해 자기 집을 오픈한 일도 작은 일이 아니겠지만,
무엇보다 바울은 그가 다른 성도들에게 나타내고 있는 ‘사랑과 믿음’에 주목합니다.
5절에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으니…”
그 ‘사랑과 믿음’은 그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고 있었을까?
6절에 ‘네 믿음의 교제’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여기서 ‘교제’로 번역된 헬라어는 ‘코이노니아’, 보통 성도간의 ‘사귐’이나 ‘나눔’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빌레몬이 다른 성도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내고 있던 사귐과 나눔의 모습이 주 예수에 대한 믿음에 기반하고 있었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당시는 노예제도가 합법적으로 존재하고 남녀차별이 당연시 되던 계층사회였습니다.
그런 다양한 계층에 속한 사람들이 신앙 안에서 한 교회로 모일 때, 과연 그들이 서로를 주 안에서 한 형제 자매로 대하는 일이 쉬운 일이었을까요?
교회가 세상의 다른 모임들과 구별되는 점을 골로새서에서 바울은 이렇게 역설합니다.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골3:11)
그리스도는 한 민족, 한 종파, 한 인종, 한 계층, 한 성별에 의해 독점될 수 없고, 그 모두를 품으며 그 모두 안에 계신 그 모두의 주님이시라는 의미입니다.
이론상으론 그렇지만, 집에서 노예를 부리며 사는 주인이 교회 공동체 모임과 교제 속에서 그리스도인 노예들을 동등한 형제자매로 대하며 나눔과 섬김을 실천한다는 게 어찌 쉬운 일이었겠습니까!
바울이 여기서 칭찬하며 언급하는 빌레몬의 ‘믿음의 교제’란 바로 이 부분을 두고 한 말이 아니었을까요?
빌레몬은 집에서 노예를 부리며 사는 주인이었지만, 교회 안에 다른 성도들을 ‘믿음’ 안에서 한 형제자매로 바라보며 어느 정도 차별 없이 대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 듯 합니다.
그가 다른 성도들과 나누던 교제의 모습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들 안에 선한 것을 인식하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그가 행하는 ‘사랑’으로 인해 성도들이 평안함을 얻었다는 소식에 바울은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다고 합니다.
각 사람 안에는 좋은 면과 안 좋은 면이 다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무엇에 집중하느냐가 많은 것을 좌우합니다.
바울이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일에 개입하는 것은 적잖은 위험부담을 내포하는 일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만 보자면, 매우 조심스럽고, 왠만하면 끼어들고 싶지 않은 사안일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그 일을 위해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그의 눈을 열어 빌레몬 안에 좋은 면들을 보게 하시고 거기에 집중하게 하신 것 같습니다.
그에게서 나타나고 있던 그 ‘사랑과 믿음’이 오네시모를 향해서도 나타나기를 기대하고 소망하는 마음을 품게 하신 것 같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이 빌레몬의 좋은 면을 오네시모에게도 들려주면서 그가 용기를 낼 수 있도록 도왔을 것입니다.
이처럼 기도가 중요합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보아야 할 것을 볼 수 있고, 주목해야 할 것에 주목할 수 있고, 품어야할 마음을 품을 수 있고, 나아가야 할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평화의 길은 우선적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열릴 것입니다.
둘째는 ‘존중’입니다.
본문 8-10절 함께 읽겠습니다.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바울이 얼마나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내고 있는지 여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명령하지 않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의 사도로서의 권위로 강요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의 사랑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13-14절에도 함께 읽겠습니다.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
복음 사역에 오네시모가 필요해서 내가 옆에 두고 쓸 테니 당신은 그렇게 아시오,
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고 바울은 빌레몬의 자발적인 동의를 구합니다.
그것 없이는 오네시모에 관해 어떤 것도 임의로 하지 않겠다 말합니다.
승낙한다면 그를 자신에게 다시 돌려 보내달라는 말도 하지 않습니다.
모든 걸 빌레몬의 손에 맡깁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성도들에게 어떤 것을 은근히 강요하려는 유혹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이건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한 일이잖아… 이건 저 사람에게도 유익한 일이잖아…
물론 때로는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따라 좀 강하게 권면해야 할 때도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되도록이면, 어떤 선한 일도 억지가 아니라 자의로 이루어지게 하는 게 좋습니다.
강요하지 않고 존중한다는 것은, 그 사람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신뢰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상대방를 존중할 때, 그 사람도 다른 상대방을 존중할 것입니다.
평화의 집은 이 존중의 터 위에 세워질 것입니다.
셋째는 연대입니다.
본문 11-12절에서 바울은 오네시모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네게 그를 돌려 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오네시모’라는 이름의 뜻이 ‘유익함’이라 합니다.
전과 달리 이제는 그가 그 이름처럼 ‘유익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내 심복이라’ 말합니다. 헬라어 원어를 직역하면 ‘내 심장’이란 말인데,
‘내 심장을 떼어 보내는 것처럼 내게 소중한 사람을 네게 돌려 보낸 것’이란 의미일 것입니다.
오네시모가 옛 주인 앞에서 혹여 수모와 고초를 겪진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이 느껴집니다.
17절에서 바울은 또한 빌레몬에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자기를 영접하듯 오네시모를 영접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이어 18-19절에서 말합니다.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과거 빌레몬과 오네시모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바울이 정확히 다 알지는 못할 것입니다.
혹 오네시모가 말하지 않은 것 중에 빌레몬의 기억에 남은 거리끼는 것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불의한 행동이었든, 아니면 물질적 손해였든, 그것을 자기 앞으로 계산하라, 자신이 갚겠다 합니다.
이 모두가 오네시모와 ‘연대’하고 있는 바울의 모습들입니다.
이 연대가 오네시모로 하여금 다시 빌레몬 앞에 서게 했을 것입니다.
이 연대가 빌레몬으로 하여금 오네시모를 달리 보게 했을 것입니다.
평화의 의지는 이 연대의 온기에 의해 북돋아질 것입니다.
마지막 넷째는 ‘수고’입니다.
이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화해를 위해 바울은 많은 수고로움을 감내하고 있습니다.
그 시간과 노력을 다른 복음 사역에 쏟으면 더 많은 결실을 얻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나라 일들은 이러한 수량적 효율성의 논리로 설명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세를 키우기보다 ‘한 사람’에게 집중하는 사역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변화된 ‘한 사람’의 잠재력을 우리는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15절에서 바울은 빌레몬에게 말합니다.
“아마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너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두게 함이리니”
‘잠시’의 경험과 기억에 한 사람을 가둬버릴 때가 많은 우리들이지만,
‘영원’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보시는 하나님은 우리와 다른 그림을 그리시며
때로는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어떤 일로 우리를 이끄실지 모릅니다.
20절에서 바울은 다시 한번 빌레몬에게 간구합니다.
“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바울은 평화를 위한 수고를 감당하고 있지만, 그 평화를 자기 힘으로 쟁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기도하고, 존중하고, 연대합니다. 그리고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 빌레몬 안에서 행하실 일을 기대하고, 거기서 오는 기쁨과 평화를 기다립니다.
그렇습니다. 수고하고 소망하며 기다리는 일… 평화는 그렇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평화는 거저 얻어지지 않습니다. 평화는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평화를 위해 열심히 수고하고, 또한 분투해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는 이 평화의 사역을 묵묵히 감당하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서로 다른 인종과 민족과 언어와 문화와 전통과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주 안에서 함께 모인 이곳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다리가 되어 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다름으로 인해 서로간에 생겨나는 여러 장벽들을 자기 몸을 헐어 소리없이 허물어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 깨어진 관계, 상처받은 마음들을 붙들고 기도하면서 치유와 회복을 위한 수고를 묵묵히 감당해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없었다면 아마 이 교회 공동체가 지금의 모습으로 있을 순 없었을 것입니다.
제가 읽었던 책의 구절들 중에 제 마음에 지속적으로 울림을 주는 한 문장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도의 공동생활>이란 책에서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이 하신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귐 보다도 사귐에 대한 자기의 꿈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본래 뜻하는 바가 정직하고 진지하고 희생적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그리스도인의 사귐을 파괴하는 사람이 되고 만다”
교회에 대한 이상보다 내 앞에 현실로서의 교회, 내 앞에 한 사람으로서의 교회를 사랑하며 섬길 수 있을 때, 그것이 진정 교회를 교회답게 세우는 일이 될 것입니다.
또한 평화에 대한 어떤 거창한 이상보다, 지금 여기 내 마음과 관계 속에 주님의 평화가 이루어지도록 나를 내어드리는 일에 먼저 집중할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주님의 평화의 도구로 쓰임받게 될 것입니다.
평화의 공동체는 이 사랑의 수고 위에서 선물로 주어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이 우리를 평화의 길로 이끌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사랑으로 기도하는 일, 사랑으로 존중하는 일, 사랑으로 연대하는 일, 그리고 사랑으로 수고하는 것, 작은 일 같아도 결코 작은 일이 아님을 기억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은혜 주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우리 마음에 사랑을 부어주셔서 우리를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