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미가 6:6-8>

6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송아지를 가지고 앞에 나아갈까

7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허물을 위하여 맏아들을,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몸의 열매를 드릴까

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은 지난 송구영신예배 설교 본문으로 한번 더 여러분과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2026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올해 여러분이 소망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학생들 중에는 올해 예정돼 있는 시험을 잘 통과하는 것이 목표와 바람일 수 있겠습니다. 어른들 중에는 올해 새롭게 시작한 사업이나 계획한 일들이 잘 이루어지는 것이 목표와 바람일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이 마음에 소원하는 바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길로 여러분을 이끄시고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으로 여러분을 축복하시길 기원합니다.

그런데 올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들이 진정 복이 되기 위해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것이 내게 있어도 거기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으면 그 모든 것은 내게 복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반면 지금 내게 주어진 것이 아무리 적거나 없을지라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결국 그 모든 상황은 내게 복이 될 것입니다. 요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시라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복을 진정 복이 되게 하시는 분,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천국이 그들의 것이다”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 채워지지 않은 그 마음 속 빈자리가 결국 하나님으로 채워질 수 있고, 따라서 그가 진정 복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천국의 약속은 하나님께서 그의 삶을 온전히 다스리심으로 말미암은 구원과 은혜와 축복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래서 올해 우리 공동체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함께 소망하며 노력하는 한 해가 되면 좋겠습니다. “동행 2026”, 저와 여러분 모두 하나님과 동행하는 매순간으로 채워지는 복된 한 해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이라는 주제는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아주 중요한 주제입니다. 창세기 5장에 보면 에녹이란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육십오 세에 아들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였고, 이에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더 있지 않게 된 사람이었습니다. 이 에녹에 대해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히11:5)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요, 그것은 곧 믿음의 삶이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에녹만이 아니라 노아, 아브라함, 요셉, 모세, 다윗, 예레미야와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셨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이 무엇인지를 몸소 그분의 생애를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기 원하신다는 것과, 우리도 성령 안에서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오늘 본문 미가서 6장 8절에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여기 ‘행하다’라는 말이 두 번 나오는데, 앞에 ‘정의를 행하며’에서 행하다는 do, 무언가를 한다는 의미이고, 뒤에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에서 행하다는 walk, 걷는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걷는다, 즉 동행한다는 뜻이며, 이것이 하나님께서 보이신 ‘선한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구하시는 것’이라 합니다.

본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당시 유다는 강대국 앗시리아의 위협 아래 있었습니다. 이미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한 상황이었기에 유다 백성들에게 그 위협은 더 심각하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선지자의 눈에 그 외부의 위협보다 더 큰 문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었습니다. 이에 선지자는 유다가 북이스라엘처럼 비참한 처지에 떨어지지 않으려면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일이 필요하다 외치면서, 이를 위해 하나님께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선지자는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얼마나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는지를 느낍니다. 죄악 가운데 있는 그들과 거룩하신 하나님 사이의 그 아득한 거리를 느끼며 그는 백성들을 대신해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일 년 된 송아지는 성전제사에서 드려질 수 있는 최고품질의 제물을 말합니다. 천천의 숫양과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이란 성전제사에서 드려질 수 있는 최대치의 제물을 말합니다. 가장 좋은 걸 드리고 드릴 수 있는 최대한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뻐하실까 묻고 있는 것입니다.

맏아들을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일은 당시 가나안 이교의 풍습 중 하나였습니다. 이것은 모세의 율법을 통해 하나님께서 엄격히 금하신 일이었지만 이스라엘 백성 중에도 그 이교의 풍습을 따라 이 일을 행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드리면 신의 노여움을 잠재우고 현재의 위기를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서 행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내 허물이 사해질 수 있을까? 혹은 내 몸의 열매, 내 몸의 수고와 희생을 통해 내 영혼의 죄가 씻겨지고 다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을까?

그러나 선지자는 8절에서 말합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께서 이미 선한 것이 무엇임을 보이셨지 않은가!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할지를. 그것이 무엇입니까? 선지자는 세 가지를 말합니다. 정의를 행하는 것, 인자를 사랑하는 것,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정의를 행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옳게 여기시는 일을 행한다는 뜻입니다. 사람마다 각자 옳게 생각하는 것이 있을 수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정의는 그런 각자의 정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하나님은 구약시대엔 율법을 통해, 그리고 신약시대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분이 옳게 여기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나타내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 제가 알고 있는 가장 훌륭한 정의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사람과 피조물이 하나님의 다스리심 아래서 각기 제 자리를 갖게 하는 일. 이 세상에서는 힘있는 사람들에 의해 힘없는 사람들이 제 자리를 뺏기고 억울한 일을 겪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반영된 구약의 율법이 약자보호법의 성격을 갖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또한 예수께서 이 땅에서 걸어가신 길은 이 하나님의 정의를 나타내고 그것을 행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분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 병들고 눌린 자, 더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여겨지며 배척받던 자들에게 나아가 그들도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나라에 그들을 위한 자리가 있음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께서 당시 바리새인과 종교지도자들을 호되게 책망하신 이유도, 십자가에 달려 죄인들을 대신해 죽으신 이유도, 다 하나님의 정의를 나타내고 행하는 길에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구하시는 것이 이 하나님의 정의를 행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행한다는 것은 아는 것을 넘어 실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걸 바라는 것을 넘어 행동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다음, ‘인자를 사랑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여기 ‘인자’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헤세드’입니다. 기본적으로 이 헤세드는 관계에 있어 신실함을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결혼한 남녀가 결혼하며 했던 서약을 지키는 것, 계약 당사자들이 계약 내용을 이행하는 것이 그런 경우일 것입니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쌍방이 그처럼 약속한 바를 잘 지키는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한쪽이 그 관계에 있어 신실하지 못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 경우 세상에서 보통 벌어지는 일은 계약의 파기, 관계의 단절일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헤세드’가 내포하고 있는 또하나 중요한 의미가 나타나는 지점이 바로 이 지점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라엘은 출애굽 후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그들에게 율법을 주시며 그들이 그 언약을 잘 지키면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겠다 하셨고, 그들은 그러겠다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이스라엘은 그 언약에 신실하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하나님 아닌 다른 우상을 은밀히 숭배했고 이웃을 대하는 데 있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저버릴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럼에도 그들과 맺은 언약에 끝까지 신실하고자 하셨고 오래 참으셨으며 선지자들을 통해 그들이 돌이킬 것을 끊임없이 말씀하셨고 그들이 돌이킬 때마다 용서하셨습니다. 포기하지 않으시고 자비를 베푸시며 구원의 새 길을 여셨습니다. 이것이 ‘헤세드’입니다. 관계의 신실함에 기반한 자비롭고 한결같은 사랑. 그래서 NIV영어성경에서는 이 헤세드를 mercy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번역된 새한글성경에서는 “한결같은 사랑”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또한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는 이 헤세드의 사랑이 낯설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나타내신 십자가 사랑이 바로 이 헤세드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 무엇인지를 아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눅6:36) 바로 이 헤세드의 사랑을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인자를 사랑한다’는 말은 이 헤세드의 사랑을 사모하고 추구하며 실천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관계맺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신실하고 자비로우며 한결같은 사랑을 자유롭게(freely) 그리고 의지적으로(willingly) 행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그 사랑을 경험한 사람만이 그것을 사모할 수 있고 또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이신 선한 것, 그분이 자기 백성에게 구하시는 것, 마지막 셋째는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입니다. 함께 걷기 위해서는 같은 곳을 향해 나아가는 일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과 함께 걸어갈 수는 없는 일입니다. 내 뜻을 중심에 두고 하나님이 내 뜻에 맞춰주시는 것이 나은 길이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중심에 두고 내 뜻을 그분의 뜻에 일치시키며 나아가는 것이 나은 길이겠습니까? 후자의 길을 선택하는 사람은 높으신 하나님의 지극히 선하심을 따라 점점 더 하나님 닮은 모습으로 고양되지만, 전자의 길을 선택하는 사람은 만물보다 부패한 인간의 마음을 따라 끝없이 아래로 추락할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내 뜻을 중심에 두고 그걸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중심에 두고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나를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삶입니다.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여기 ‘겸손하게’라는 말이 붙어 있는 것은 하나님과의 동행을 위해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뜻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 뜻에 나 자신을 비추어보며, 그 뜻에 나를 순복시키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그것을 행하며 하나님과 같은 방향으로 함께 걸어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은 그 앞에 언급된 두 가지 일, 즉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는 일과 동떨어져 행해질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정의를 행하는 가운데, 그리고 헤세드의 사랑을 실천하는 가운데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보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위해 우리에게는 적어도 두 가지를 실천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기도 가운데 또 말씀 가운데 하나님 앞에 지속적으로 나아가는 일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계속해서 접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상식 선에서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지속적으로 더 깊이 이해해가야 합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매일의 삶은 그 진리의 하나님 말씀을 품고 걸어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 말씀이 우리를 이끌고 그 말씀에 순복하여 나아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그곳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행하고 헤세드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실천할 때에만 체험하고 깨닫는 것들이 있습니다. 지금 서 있는 자리가 아니라 그 말씀을 행하며 나아간 자리에서 비로소 만나게 되는 진리가 있습니다. 주어졌으나 깨닫지 못한 말씀이 그 말씀을 행하는 길에서 깨달아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니, 이 과정이 없이는 우리의 신앙이 자라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올해는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이전보다 더 깊이 경험하는 한 해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어떤 낯선 곳에 서게 될 지도 모릅니다. 거기서 이전엔 경험해보지 못한 어떤 새로운 상황을 마주하게 될 지 모릅니다. 그러나 또한 그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새롭게 경험하고 그 하나님 안에서 새롭게 빚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미리 계획되지 않은 길을 가는 모험과 같지만 너무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길에서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신실하신 동행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이곳 꼬빌리시에서 첫 한국어예배가 드려진 지 26주년이 되는 주일입니다. 인간적 편안함을 좇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나아온 이 교회의 여정이었습니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앞으로 이 교회가 나아가는 길을 주님께 의탁합시다. 이미 잘 알고 있는 편안한 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정의와 사랑의 길로 나아가며 성령에 의해 계속해서 새롭게 창조되며 하나님의 선교에 요긴하게 쓰임받는 이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에 두신 뜻을 발견하며 그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도록 올해 하나님과 언제나 동행하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