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20년 7월 12일)
- 로마서 2장 12-16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하나님의 공평한 심판 - 롬2,12-16.docx
로마서 2:12-16 – 새번역
12 율법을 모르고 범죄한 사람은 율법과 상관없이 망할 것이요, 율법을 알고 범죄한 사람은 율법을 따라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오직 율법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의롭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14 율법을 가지지 않은 이방 사람이, 사람의 본성을 따라 율법이 명하는 바를 행하면, 그들은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자기 자신이 자기에게 율법입니다.
15 그런 사람은, 율법이 요구하는 일이 자기의 마음에 적혀 있음을 드러내 보입니다. 그들의 양심도 이 사실을 증언합니다. 그들의 생각들이 서로 고발하기도 하고, 변호하기도 합니다.
16 이런 일은, 내가 전하는 복음대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사람들이 감추고 있는 비밀들을 심판하실 그 날에 드러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매주일 로마서를 함께 읽고 있습니다. 이 편지에서 바울이 궁극적으로 말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말하기 전에,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를 말했고, 또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말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인간의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해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도 바로 알 수 없으리란 뜻일 겁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분명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심판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까요? 지난 주일 본문은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 날에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함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은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는 이렇게 항의할지 모릅니다: 그것을 과연 차별 없고 공평한 심판이라 말할 수 있습니까? 어찌 보면 그것은 특정인에게 더 유리한 심판 아닌가요?
예를 들어, 선생님이 시험을 치르기 전에 일부 학생에게만 문제와 답을 알려줬습니다. 그리고 시험이 끝난 후 그 시험 성적에 따라 상을 주고 벌을 주었습니다. 그럼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한 학생 입장에서는 억울하겠죠. 그건 공평한 시험이 아니었다 말할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은 불만을 가질지 모릅니다. 그 ‘행함에 따른 차별 없는 심판’이라는 것이 실은 유대인들에게 더 유리한 심판 같다고요. 그들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잖아요. 우리는 알지 못했구요. 그런데 어떻게 공평한 심판이 될 수 있죠?
어떤 의미에서 오늘 본문은 이런 항변에 대한 바울의 답변이 될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의 심판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인지에 대해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을 더 말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심판은 각 사람이 처해 있던 조건을 고려해 이루어질 것입니다.
12절에 말씀합니다: “율법을 모르고 범죄한 사람은 율법과 상관없이 망할 것이요, 율법을 알고 범죄한 사람은 율법을 따라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바울은 두 종류의 범죄자를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성경)을 모른 상태에서 범죄한 사람과 율법(성경)을 아는 상태에서 범죄한 사람.
율법을 모르고 범죄한 사람은 율법과 상관없이 망할 것이라 합니다. 그들은 알지 못했던 기준에 의해 심판받지는 않을 것입니다. 죄인 줄 모르고 죄를 짓는 경우라면 하나님이 정상참작을 해주시리란 뜻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들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몰랐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죄 때문에 망할 것입니다.
한편, 율법을 알고 범죄한 사람은 율법을 따라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익히 알고 있던 기준이 심판의 근거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심판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알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행했느냐’입니다. 그 사람이 행한 대로 하나님은 갚아주실 것입니다.
13절에 말씀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이처럼 하나님의 심판은 각 사람이 처해 있던 조건을 고려하여 이루어질 것입니다. 율법을 알고 있던 사람에게는 율법을 기준으로, 율법을 모르고 있던 사람에게는 그가 부인할 수 없는 또 다른 기준을 따라, 하나님은 각 사람이 행한 대로 보응하실 것입니다.
둘째로, 율법을 듣지 못하고도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14절에 말씀합니다: “율법을 가지지 않은 이방 사람이, 사람의 본성을 따라 율법이 명하는 바를 행하면, 그들은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자기 자신이 자기에게 율법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전혀 들어 본 적 없는 사람이 직관을 따라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성경을 읽어본 적 없는 사람들 중에도 부모를 공경하고 배우자에게 신실한 경우가 있습니다. 정직하게 행동하고 이웃을 잘 돕는 사람도 적지 않죠.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자기 속에 어떤 법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어떤 상황에서 스스로에게 옳게 행동하도록 요구하는 마음의 소리가 있고, 그것을 따르지 않을 때 양심에 거리낌을 느끼기도 하는 것이죠. 물론 그 내면의 법이 하나님의 법과 완전히 일치하는 건 아니겠지만, 때때로 일치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C. S. 루이스는 그의 책 <순전한 기독교>에서 말합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요지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지구 위에 사는 인간은 누구나 일정한 방식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기묘한 생각을 갖고 있으며, 그 생각을 떨쳐 버리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사람들은 그런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사람들 속에 존재하는 이 기묘한 생각, 어떤 상황에서 옳게 행동하도록 요구하는 그 내면의 법, 그 마음의 소리는 어떻게 생겨나게 된 걸까? 바울은 그것이 ‘우리가 창조될 때 우리 안에 새겨진 것’이라 말하는 듯합니다.
15절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그런 사람은, 율법이 요구하는 일이 자기의 마음에 적혀 있음을 드러내 보입니다.” 우리 내면 깊은 곳에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그렇다’와 ‘아니다’, ‘옳다’와 ‘그르다’에 공명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율법을 듣지 못했다는 사실만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은 데 대한 충분한 변명이 될 수 없으리란 뜻입니다. 율법을 듣지 못하고도 자기 마음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따라 하나님의 법을 행한 사람들이 존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메시야의 표적을 보이라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눅11:32)
회개한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은 유대인들에게 변명의 여지가 없게 하리라는 말씀이죠. 동일한 맥락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율법을 못듣고도 하나님의 법을 따른 사람들’이 ‘율법을 듣고도 따르지 않은 사람들’을 그 심판 날에 할 말 없게 할 것입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들은 자든 못 들은 자든, 결국 중요한 것은 ‘어떻게 행했느냐’라는 것입니다. 주어진 조건과 기회들 속에서 그 사람이 행한 바를 따라 하나님은 갚아주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람들 속에 감춰져 있던 것들이 그 심판날에 다 드러날 것입니다.
16절에 말씀합니다: “이런 일은, 내가 전하는 복음대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사람들이 감추고 있는 비밀들을 심판하실 그 날에 드러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공평한 것이 되려면 이 부분 역시 중요할 것입니다. 속이는 사람, 꼼수를 쓰는 사람이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죠. 예컨대 이럴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많이 알수록 더 높은 기준이 적용된다면 차라리 모르는 게 낫겠다… 그럼 정상참작이라도 될 테니까…” 그러면서 일부러 하나님께 귀를 막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죠.
또 이런 사람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사람. 무엇이 하나님 앞에 옳은 일인지 알았으면서도 행하지 않고는 뒤에 가서 몰랐다 우기려는 사람. 또 이런 사람도 있을 수 있겠죠. 제대로 하지 않고 시늉만 하는 사람. 마음이 담기지 않은 행함. 사랑이 없는 실천. 그런 식으로 해놓고는 할 거 다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
그런데 다 부질없는 짓입니다. 그 날에는 사람들 속에 감춰져 있던 것들이 다 드러나 판단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통해서든 양심을 통해서든 우리에게 알려진 하나님의 ‘그렇다’와 ‘아니다’에 우리 각자가 어떻게 응답했는지는, 그분이 모든 사람에 대해 최종 심판을 내리시는 그날에 확연히 드러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이 행한 바를 보시되, 그 이면에 진심과 믿음도 함께 보실 것입니다.
자, 이제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공평합니까?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차별 없이 행해지는 하나님의 심판은 공평합니까? 그렇습니다. 공평합니다! 그 심판은 각 사람이 처해 있던 조건을 고려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고, 율법을 듣지 못하고도 하나님의 법을 행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며, 또한 사람들 속에 감춰져 있던 것들이 그 날에 다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메시지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일부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 심판의 중심에 서 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날에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리라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다’(요5:22) 하였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이가 곧 예수 그리스도라’(행10:42) 하였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께서 심판날을 작정하시고 심판자를 지정하셨다’(행17:31) 선포했습니다. 이에 따라 우리는 사도신경을 통해 ‘그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고백합니다.
그 날에 어떤 사람은 믿음 안에서 늘 사모하며 동행해왔던 분 앞에 감격스레 설 것이고, 반면 어떤 사람은 서먹하고 낯설기만 한 분 앞에 떨면서 서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심판자로 오실 분이 다름 아닌 우리 주님이라는 사실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요!
그 날에 예수님 앞에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 모르게 행했던 나쁜 일들만 드러나지 않고, 우리가 다른 사람 모르게 행했던 좋은 일들도 드러나 합당한 보상이 주어질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심판은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을 위한 복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강조하지만, 여기서 바울은 우리가 선행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한 대로 심판하시고, 모든 감춰져 있던 것들을 다 드러내 판단하실 것이기에, 이 세상 그 누구도 자기 행위의 의로움으로 하나님의 기준을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울의 입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비밀을 들으려면 좀 더 기다려야 합니다. 하지만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공평한 심판의 메시지 속에서도 이미 우리는 복음을 접합니다. 결국 모든 사람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설 것입니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나를 사랑하는 사람도, 내가 미워하는 사람도 나를 미워하는 사람도, 내가 잘 아는 사람도 내가 잘 모르는 사람도, 모두가 그 심판날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설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하며, 주님 앞에 서는 그 날까지 늘 믿음으로 그분 앞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하나님의 심판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심판이며, 그 심판날에 우리 모두는 심판주 예수님 앞에 서게 될 것이란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주님 앞에 서는 그 날까지 늘 믿음으로 담대하고 신실하게 주님 앞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