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

<로마서 12장 1-2절>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나님의 뜻

이 말을 들으면 무엇이 먼저 연상되십니까?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말라는 성경의 도덕규정들입니까?

이것 때문일까 저것 때문일까, 이해되지 않는 현실상황입니까?

이걸 택해야 하나 저걸 택해야 하나, 찾아내야 할 최선의 길입니까?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아무 의미없이 살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삶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생각하려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뜻은 ‘나는 누구인가’, 즉 정체성(identity)의 문제와 연관되고,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즉 소명(vocation)의 문제와도 연관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일은 우리에게 지극히 바람직한 것이라 할 것입니다.

문제는 그걸 구하는 이의 마음과 시각이 부적절하여 허공을 칠 때가 많다는 점입니다.

오늘 본문 2절 하반절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언급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 이것이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How? 어떻게 우리가 그분의 뜻을 분별하고 성취할 수 있을까?

이에 관해 바울은 본문에서 두 가지 중요한 권면을 줍니다.

첫째,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둘째,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

몸의 드림과 마음의 변화,

이 두 가지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전제조건이란 것입니다.

이 각각이 의미하는 바를 좀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먼저, 우리 몸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말씀.

여기서 ‘몸’이라는 말은 ‘삶’이란 말로 바꿔도 무방할 것입니다.

너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라!

내 몸이 있는 그 곳에서 우리는 삶을 살아갑니다.

어떤 이는 인간을 육신과 영혼의 둘로 나누어 보고,

어떤 이는 몸과 혼과 영의 셋으로 나누어 보지만,

여기서 바울이 ‘몸’을 얘기할 때 그 의미는

전체 인간을 구성하는 어느 한 부분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수많은 문제와 부대끼며 살아가는 한 사람 전체,

그의 존재와 삶 전체를 말하는 것으로 보는 게 적절할 것입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바울은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희생제사를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 모두를 위해 자기를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피를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짐승을 잡아 죽이며 제사를 드리면서도

마음이 떠난 형식적인 제사,

자기 욕망과 위안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속된’ 제사를 드릴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 예배는 ‘영적인’ 듯 보이나 실은 ‘육적인’ 예배,

결코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수 없는 ‘죽은’ 예배였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참되게 섬기지 않는 사람들,

또한 하나님을 알지 못함으로 헛된 우상을 섬기며 사는 사람들,

그들 모두를 하나님께 이끌기 위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고,

우리 모두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희생제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히브리서 9장 13-14절에 말씀합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 삼으시려고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우릴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셨음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임한 그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근거하여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여러분의 전 존재와 삶을 하나님께 내어드리십시오!

여러분 삶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온전히 내어드리고,

여러분 삶의 매순간이 하나님 기뻐하시는 거룩한 예배가 되게 하십시오!

이것이 본문 1절을 통해 사도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존재와 삶 전체를 하나님께 내어드리셨습니까?

나의 일부만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 전체를 하나님께,

내 삶의 일부만이 아니라 내 삶의 전영역을 하나님께 내어드리셨습니까?

내어드리십시오! 그분께 맡기십시오! 그분이 주관하시게 하십시오!

그럴 때 새로운 생명이 저와 여러분 안에서 역사할 것입니다.

주일 하루만이 아니라 나머지 엿새의 시간 중에도,

교회에서만이 아니라 내가 생활하는 다른 모든 곳에서도,

믿는 사람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교회 일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내가 행하는 다른 모든 일들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온전히 주인되시게 하고,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십시오!

그것이 낫습니다. 내 뜻이 이루어지는 것보다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는 게 낫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지금 이 곳에 오셔서 이 강단에 서신다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실까요?

저는 그분이 전하실 메시지 중 하나는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가복음 9장 23-24절에,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

나를 위해 제 목숨 잃으면 구원하리라!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 새로운 자아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자아를 넘겨받으시고, 그대신 그분의 생명, 그분의 자아를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뜻이 곧 우리의 뜻이 되게 하고,

그분이 뜻하시는 일에 우리로 동참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하십니까?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큰 뜻’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 안에서 먼저 나의 존재와 삶 전체를 하나님께 내어드릴 때,

비로소 내 존재와 삶은 그 하나님의 선하신 뜻 안에 온전히 설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20절에 말씀합니다.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다음으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는 말씀을 생각합니다.

여기서 ‘마음’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누스(nous)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heart’보다는 ‘mind’에 해당하는, 인간의 지성적 측면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는 ‘지성의 갱신’을 통해 하나님 뜻을 ‘분별하라’ 권면하는 셈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합니다.

그 시대에 세상에서 유행하는 가치와 패턴에 우리 자신을 우겨넣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나타내는 가치와 삶의 길을 본받아 따라가라는 것입니다.

그 둘 중에 무엇이 정말 선하고 온전한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결단하란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지 않는다면,

분명 우리는 세상의 틀이 찍어내는 대로 살게 될 것입니다.

변화는 안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새롭게 되는 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우리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살았고 운동력 있는 그분의 말씀은 예리한 검처럼 사람의 마음과 뜻을 판단하고

수술하여 치유하며, 참으로 선하고 유익하고 온전한 것을 향해 이끌어줍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개인의 자율성이 지나치게 강조되고 있는 시대입니다.

과거에 어른이 된다는 것은 결혼하고 양육하는 일과 주로 연관되어,

다른 누군가를 위해 책임을 감당하는 사람이 된다는 의미가 강했는데,

최근엔 독립적인 결정을 내리는 일, 재정적인 독립을 이루는 일 등과 주로 연관되어,

어른이 된다는 건 스스로에 대해 책임질 능력을 갖춘단 의미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기서 ‘삶’은 사람과 사람이 서로에게 의존하고 또 서로에게 책임을 감당하는 모습보다는,

각자 우선적으로 자기 것을 챙기려는, 자기-충족적이고 이기적인 모습을 띠기 쉽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젊은이들은 나는 누구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충분히 고민하지 못하고,

자신은 아직 준비가 덜 됐다는 생각에 결혼을 미루거나 학업의 기간을 연장하며

경쟁에서 이기고 물질적 보상 얻는 걸 삶의 최우선 과제로 삼게 되기 쉽습니다.

또한 우리가 사는 시대는 이용 가능한 선택들을 끊임없이 늘리려 하는 시대입니다.

최선의 선택을 위해선 가능한 옵션을 최대한 많이 확보하는 게 유리하다는 생각이

이 시대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옵션이 많고 매력적일수록 선택의 과정은 고통스럽습니다.

이러한 환경은 젊은이들의 진로 선택을 더 힘들게 하고,

선택한 길에 만족하거나 헌신하는 일을 더 어렵게 만듭니다.

선택한 길에서 어려움을 만나면, 선택하지 않은 다른 길에 더 큰 미련을 갖고,

선택한 길이 나름 괜찮아도, 다른 길 뒤엔 뭐가 있을까 자꾸 기웃거리게 됩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에 길들여진 크리스찬들이 빠지기 쉬운 유혹은

다른 사람들과 같은 욕망과 목표를 가지고 살면서

그 일에 성공하길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모습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반대로 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그리스도인의 소명으로부터 옵니다.

내가 누구인가는 나를 부르신 분이 나를 어떻게 여기시는가,

또 어떤 목적으로 나를 부르셨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어느 시점에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을 부르십니다.

이 부르심에 응답함으로 우리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합니다.

이것을 일컬어 소명(calling, vocation)이라 합니다.

이 주님의 부르심은 두 단계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 자신에게로 부르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 부르심에 응답함으로써 우리는 내가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기로 결단합니다.

두 번째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일에 동참하도록 부르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 부르심에 응답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두신 그 자리에서,

저 첫 번째 부르심을 따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

말과 삶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첫 번째 부르심이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우리 정체성에 관한 것이라면,

두 번째 부르심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우리 사명에 관한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미래와 관련해 ‘하나님의 뜻’을 묻곤 합니다.

그런데 그 대부분은 내가 어떤 학과를 선택하고 어떤 직업을 선택할까,

어느 지역에 가서 어느 포지션에서 어떤 일을 하며 살아갈까에 관한 것일 때가 많습니다.

물론 이것도 당사자에겐 너무나 중요한 사안일 것입니다.  

하지만, 첫 번째 부르심 속에서 그리스도의 제자 정체성이 분명히 정립되어 있지 않으면,

이 두 번째 부르심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분별하기는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의 삶에 대해 분명 계획을 갖고 계시지만,

그것을 미리 보여주시겠다 약속하신 적도 없고,

마치 퀴즈를 내듯 그 정답을 추리하여 맞추라 요구하신 적도 없습니다.

우리의 내일에 대해 하나님이 주신 명령은 단 두 가지 뿐입니다.

내일에 대해 염려하지 말아라! (마6:34)

그리고 내일에 대해 자만하지 말아라! (약4:13-16)

이 두 가지 명령은 다음의 사실에 기초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를 그분의 손으로 붙들고 계시며,

매순간 우리를 돌보시는 그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안식하길 바라신다는 사실.

어쩌면 우리가 어느 자리에서 살아야 하는가에 관한 ‘하나님의 뜻’은

정답이 하나로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여럿으로 열려 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의 뜻은 이런 것들입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 (마6:33)

거룩한 삶을 살아라!” (살전4:3)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라!” (미6:8)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살전5:16-18)

우리가 이런 삶을 사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이 바라시는 뜻일 것이며,

이것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 우리 삶의 모든 자리에서, 얼마든 실천 가능한 삶입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충실히 살아갈 때,

바로 그것이 미래에 우리가 살아갈 삶에 대한 최선의 준비가 될 것입니다.

“지금 이 일이 나에게 잘 맞는가?”라는 질문도 물론 중요한 질문이지만, 

“지금 이 삶이 하나님 마음과 뜻에 잘 맞는가?”라는 질문은 더 본질적인 질문일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확보하라고 부추기고 있지만,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이미 우리에게 은혜로 주어진 것에 더 집중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시지 않은 것으로 뭘 해내라 윽박지르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나에게 주신 은사들, 열정들, 기회들, 그리고 공동체…

이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인식할 수 있고,

그 이미 주어진 것들로 오늘도 감사히 선한 청지기같이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사는 삶이 늘 즉각적인 행복을 가져오는 건 아니지만,

믿는 사람 안에서 솟아나는 참된 열정은 고난 가운데서도 종종 기쁨을 발견하게 합니다.

어쩌면 고난과 시련의 와중에도 지속되는 열정,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서 있어야 할 자리를 알려주는 중요 힌트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합니다.

하나님도 그분의 뜻을 우리에게 알려주길 원하십니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알려 주셨습니다.

다만, 하나님 사랑 안에서 내 존재와 삶 전체를 하나님께 내어드린 사람,

또한, 복음 안에서 마음이 새롭게 되어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는 사람,

그 사람은 오늘 여기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을 행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이 은혜가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 함께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합니다. 또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원합니다. 우리의 전 존재와 삶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서게 하여 주옵소서.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